6 부. 솔로우스 - 25 화
솔로우스 – 25
데디쿠스를 억지로 무릎 꿇린 바이베노파시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면, 네놈은 예전에 이 세계에 온 불새군이렸다?”
“그... 그렇습니다.”
데디쿠스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놈들에 대한 얘기는 예전부터 들었다. 바로 내가 들어가 있는 이 몸의 원주인과 관계있는 녀석이 불새군에 있다고 하더군.”
“저... 전 잘 모르는 일입니다.”
데디쿠스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에 짚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저 육체와 관계있는 사람이라..... 아마도 알렉시스님을 말하는 것 같군. 그러고 보니 LA에서 머무르고 있던 불새군 병사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돈 적이 있었어. 알렉시스님이 때때로 뉴욕에 가는 이유가 옛 애인을 못 잊어서 그런 거라고. 그렇다면 지금 파괴신이 들어가 있는 저 육체는 그 애인이란 자의 것일지도 몰라.’
“너희 불새군 놈들은 에피로제의 명령을 받아 케르케로우스를 처치하려고 이 세계로 왔다고 전해 들었다. 그게 너희가 오늘 밤 이곳에 있는 이유인 것이냐?”
“조금 전 말씀드렸듯이 전 이제 불새군이 아닙니다. 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 신께서 제게 물으신다면.....”
“거짓말 하지 마라!”
바이베노파시스는 눈에서 빛을 번쩍거리면서 소리쳤다. 그 앞에 꿇어 엎드린 사신교 신도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데디쿠스를 노려봤다.
“네놈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내가 순순히 믿을 줄로 알았느냐!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다. 네놈들은 오늘 밤 케르케로우스 때문에 여기 온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전 정말 불새군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 케르케로우스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하! 케르케로우스를 구한다고? 헛소리!”
그렇게 말하면서 바이베노파시스는 손을 펴서 옆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나무들 몇 그루가 몸통이 부러지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콰지직-!’
그것을 본 데디쿠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인데 상대방이 믿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 의심많은 상대방이 하필이면 파괴의 신이었다.
“저... 정말입니다! 불새군 내에서 내... 내분이 일어났었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이 반기를 들었고 케르케로우스 편에 서서 그와 살육의 신을 도와 베... 베토케로우스를 무찔렀습니다! 저... 저기 보십시오! 저기 베토케로우스가 죽어 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바위만한 검은 물체를 가리켰다. 바이베노파시스는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텔리가 주입한 검은 연기 때문에 부패가 많이 진행된 베토케로우스의 사체가 있었다. 파괴의 신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사체를 주시했다.
“흐음.... 저 덩어리가 그 괴수의 사체란 말이지? 그리고 살육의 신이라고 했느냐? 텔리가 저놈을 쓰러뜨렸다고?”
“그렇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살육의 신께서는 여러 번의 사투 끝에 전설의 괴수를 쓰러뜨리셨습니다!”
“그리고 너와 네 동료들이 그를 도왔단 말이지?”
“네! 믿어주십시오.”
“그렇다면..... 너흰 정말 바보 같은 짓을 벌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괴수의 편에 서서 그를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넷? 아니 그런....!”
데디쿠스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파괴의 신이 괴수를 돕고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군을 죽이는데 협력했다는 것을 자백해버렸으니 이제 그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확률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바이베노파시스는 크게 당황하고 있는 데디쿠스를 보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비릿한 미소와 함께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크크크. 물론 계속 그를 도우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 그는 나와 함께 엘리시움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려고 했었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난 그저 이곳에서 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검은 방의 새로운 주인이 될 그를 이용해 다시 엘리시움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니까. 즉, 지금에 와서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누구든지 내가 엘리시움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면 난 그와 손을 잡을 것이다. 그게 케르케로우스라도 난 상관없다. 아니지, 오히려 그 녀석 쪽이 상대하기 손쉬운 편이니 더 잘 되었을 수도 있다. 좋다. 불새군의 건방진 애송이야. 지금 텔리는 어디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분은 아까 베토케로우스와 일전을 벌이면서 크게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이후 제 눈앞에서 사라져버리셨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십니다.”
“지금 너 말고 그가 베토케로우스를 쓰러뜨린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느냐?”
“그의 사제와 전사가 곁에 있었습니다만, 그들 역시 살육의 신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넌 우리와 함께 케르케로우스에게 가서 내가 괴수를 쓰러뜨렸다고 증언하여라.”
“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엎드려 있던 데디쿠스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바이베노파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엘리시움의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파괴신은 이미 아까 한 번 작은 거짓말을 했었다. 자신을 파괴와 죽음의 신이라고 소개했던 것 말이다. 죽음의 신은 그의 아버지인데 그는 자신이 파괴의 신을 넘어 죽음의 신이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거짓말은 아까보다도 훨씬 노골적이다.
“내가 말한 것을 넌 듣지 못했느냐? 우리와 함께 케르케로우스에게 가서 내가 베토케로우스를 쓰러뜨렸다고 증언하라고 했다.”
데디쿠스는 설마 신이 자기에게 거짓말을 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이베노파시스는 지금 분명 거짓말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닌데요?”
“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텔리는 곧 나와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한 모든 행동은 내가 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데디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둔한 전 신께서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면 잘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다시 한 번 바이베노파시스의 눈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화난 목소리로 데디쿠스에게 말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베토케로우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지금 내가 널 죽여 버린다면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겠지. 어떻게 하겠느냐? 내 말을 순순히 따르겠느냐?”
데디쿠스는 덜덜 떨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실은 나도 텔리님이 베토케로우스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아닌데..... 그 건방진 사제 녀석과 내가 여기에 왔을 땐 이미 그와 괴수가 동시에 쓰러져 있었어.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고 말했던 것이 실수다. 실수!’
그렇다. 따지고 보면 그는 이미 바이베노파시스의 질문에 대답할 때 약간의 거짓을 보탰던 것이다. 그런데 또 거짓말을 하라고 한들 못 할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그것이 다른 신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파괴의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의 대답을 듣자 바이베노파시스의 눈에서 하얀 빛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그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좋아. 그럼 넌 이제 우리와 함께 간다. 케르케로우스는 어디 있느냐?”
“검은 방의 입구에 계십니다.”
바이베노파시스와 그의 일행은 데디쿠스를 데리고 검은 방의 입구를 향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기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이 생길지 이때로서는 그들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데디쿠스 외에 이곳에서 베토케로우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상하게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있을 것이라고는 데디쿠스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텔리를 버리고 간 릴리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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