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48 화
만월의 밤 – 48
조금 전 병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빛의 덩어리는 순식간에 보는 모든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불새군의 병사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릴리카는 건수와 마찬가지로 그 빛의 덩어리가 케르케로우스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일어나며 모든 불새군 병사들을 보고 일어나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히메이오스가 일어나면서 건수의 등을 손으로 밀었다. 바로 지금이 거사의 시점이니 어서 병사들에게 케르케로우스의 뜻을 전하라는 신호였다.
건수는 속으로 무척이나 떨렸지만,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케르케로우스를 돕고 싶었다. 그는 용기를 짜내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불새군 여러분들. 전 케르케로우스님의 사제입니다.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케르케로우스님께서 여러분께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불새군은 또 한 번 술렁였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건수를 보고 조롱과 야유를 보내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 하나 건수를 보고 욕을 하는 사람 없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제가 어젯밤 검은 방으로 가서 케르케로우스님을 직접 뵀었습니다. 그때 케르케로우스님은 제게 여러분께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분을 대적하지 않는다면 어떤 조건도 없이 여러분 모두에게 엘리시움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과 싸우지 마세요! 여러분 중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병사들이 서로 얼굴을 보며 웅성거렸다. 점점 그 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는 여기저기서 서로 큰 목소리로 다투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한 병사가 무기를 든 손을 들고 건수에게 크게 소리쳤다.
“거짓말! 넌 지금까지 줄곧 우리에게 잡혀있었는데 어떻게 검은 방에 들어가서 늑대에게 물어봤다는 거야?”
“맞아! 맞아! 넌 계속 우리에게 잡혀 있었잖아!”
건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 육체의 이동 없이 검은 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 케르케로우스님의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병사들은 다시 서로 웅성거렸다.
“그게 말이 돼? 몸이 여기 있는데 어떻게 검은 방에 들어갔다는 거야? 뭐, 순간이동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아니, 늑대의 사제라면 그런 능력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러자 히메이오스가 앞으로 나가서 건수 곁에 나란히 섰다.
“전우들! 이 녀석의 말이 맞아! 어제 이 녀석이 기절했던 거 다들 알고 있지? 그게 비결이야. 이놈의 정신이 몸에서 분리되어서 그 정신만 검은 방에 들어갔던 거라구!”
붉은 수염의 헨리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도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서 건수 곁에 섰다.
“맞아. 그걸 유체이탈이라고 하지. 정신만 몸에서 빠져나가서 검은 방에 들어갔던 거야. 그럼, 말이 되지. 되고말고!”
처음에 질문했던 병사가 다시 건수에게 질문했다.
“검은 방에 들어갔다는 네 말이 맞는다고 치자. 그 늑대가 말한 것을 지키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건수는 이번에도 전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케르케로우스님은 신수이십니다. 신과 신수들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그리고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그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지요!”
건수의 대답을 듣고 병사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그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지자, 삼총사 중 마지막으로 데디쿠스가 재빨리 앞에 나가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이봐, 친구들! 늑대 신수는 우리와 싸우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왜 우리가 그를 해치려고 하지? 게다가 우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잖아? 그도 일단은 저기 베토케로우스처럼 신수야. 신이라고! 아무리 우리가 힘을 합쳐 그와 싸운다고 해도, 우리들 중 몇 명이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 바잔티우스! 너 신과 싸워서 이길 자신 있어?”
데디쿠스는 손가락으로 앞 열의 병사 중 한 명을 지목하며 물었다. 바잔티우스라고 불리는 그 병사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말도 안 되지······. 예전에 엘리시움에서 다른 신의 영토에 쳐들어갔었을 때도 그들의 신과 싸웠던 건 우리 같은 일반 전사가 아니라 신께 축복을 받은 솔로우스 대사제 아니면 성전사들뿐이었는데.”
그의 대답을 들은 다른 병사들도 이어서 대답했다. 또 옆에 있는 동료들도 똑같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신과 맞서 싸워! 싸워봤자 개죽음인걸!”
“맞아! 맞아!”
데디쿠스는 시선을 릴리카에게 돌렸다.
“하지만 여기 있는 우리의 대장은 우리의 생명이 어찌 되든지 간에 위로부터 받은 명령만 지키려고 하는 거야. 우리들 중 몇 명이 죽어 나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우린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가족들을 만나고 싶을 뿐인데!”
“맞아! 윗대가리들은 지들 출세하는 것만 신경 쓰지, 우리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써!”
“데디쿠스 말이 맞아! 우린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한게 벌써 몇 년째야!”
“야이씨! 우릴 어서 집에 보내줘!”
병사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게 되자, 릴리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데디쿠스를 째려보았다. 그녀는 큰 소리로 그에게 일갈했다.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데디쿠스는 재빨리 시선을 릴리카 뒤에 서 있는 부관 이사우라에게 돌렸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사우라님. 어서!’
병사들이 큰소리로 외쳐대며 불만을 표시하자 릴리카는 지금 온 신경을 소란의 핵심인 데디쿠스에게 쏟고 있었다. 데디쿠스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사우라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어서 릴리카를 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머뭇거렸다. 그녀는 릴리카 뒤에 서 있었는데, 등을 돌린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릴리카는 데디쿠스를 죽이기 위해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사우라는 정신이 들었다. 자신도 얼른 오른 주먹에 힘을 집중시켰다. 데디쿠스도 릴리카가 빛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이사우라님! 지금입니다!”
“뭐? 이사우라?”
그 말을 들은 릴리카가 깜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이사우라는 있는 힘껏 빛나는 주먹을 릴리카의 등에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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