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89 화

예언자들 – 89

이디레이아의 얘기를 들은 건수는 영 입맛이 썼다. 엉뚱한 사람에게 따진다는 걸 알면서도 원망 섞인 하소연이 절로 나왔다.

“아니, 엘리시움이라니요. 왜 제가 케르케로우스님을 따라 엘리시움에 간다는 건가요? 왜 원치도 않는 일에 휘말려서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야 한다는 건지.... 이건 너무하잖아요.”

“난 내가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본 것을 말했어요. 아마 거의 모든 수가 그 길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렇게 될 겁니다.”

“거의 모든 수가요?”

“미래는 그냥 바라보면 혼돈이지만 그 안에 질서도 분명히 있어요. 그 법칙을 통해 보면 그 길이 보이는 거랍니다.”

‘우당탕탕.’

“어딨어? 운명의 어머니, 그 여자가 여기 있다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텔리가 주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우리가 식사 준비하는데 도와주려고 왔나요, 텔리?”

“뭐? 음식? 헛소리하지 마. 누가 아침식사 같은 거 먹고 싶댔어?”

“호호. 그렇죠. 당신은 굳이 음식을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갑자기 텔리의 눈에서 하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본 건수는 그가 신의 힘을 꺼내 쓰는 중인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텔리님! 왜 힘을 쓰시려는 건가요? 할머니가 위험하실 수도 있는데..... 이디레이아님, 조심하세요.”

“네. 텔리가 힘을 개방하려고 하는 거는 저도 알고 있어요.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걱정 말아요.”

그녀는 자기를 걱정해주는 건수를 안심시킨 다음 자기의 등 뒤에 서라고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텔리는 눈에서 빛을 내며 이디레이아에게 사납게 말했다.

“이번엔 네가 쉽게 도망가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하는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떠나기 전에 네 예언자인 이 할머니를 죽여 버리겠다.”

“호호. 도망이요? 제가 그럴 리가요. 난 여러분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당연히 식사시간 동안 함께 할 겁니다. 이 가여운 할머니를 그만 위협하라고요.”

“좋았어. 그럼 내가 첫 번째로 물을 질문은.....”

텔리가 이디레이아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하자 그녀는 손을 들어 잠시 멈추게 한 다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꺼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일어났어요. 텔리, 당신이 내게 질문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상들을 펴주세요.”

“상? 그게 뭔데?”

“테이블이요. 어젯밤처럼 모두 모여 식사할 거예요.”

“뭐야? 지금 감히 나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

텔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디레이아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녀가 또 도망가 버리면 자기가 궁금한 것들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없을 것이기에, 올라오는 화를 꾹 참고 건수와 함께 상들을 펴기 시작했다. 그가 근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건수을 보고 물었다.

“저 여자가 너한테 뭐라고 했냐?”

“아, 예..... 그러니까 제가 좀 걱정하는 게 있었......”

“너 내 얘기 잘 들어.”

텔리는 건수의 얘기를 중간에 끊고 충고의 한 마디를 건넸다.

“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저 여자는 다른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홀려 놓는단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

건수의 반응이 궁금하지도 않은지 텔리는 또 다시 말을 끊고 자신의 얘기를 이어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냐고? 너 스타워즈 봤지?”

“영화요?”

“그래. 그 영화에서 말이야. 제다이들이 제다이 마인드 트릭(Jedi mind trick)이란 걸 쓰잖아."

"예? 제다이 어쩌고... 그게 뭐에요?"

"그 영화 시리즈 한 번도 안 봤어? 제다이들이 적인 스톰트루퍼들 앞에서 이렇게 손을 올려서 슥- 하잖아.”

텔리는 손을 올려서 손가락을 펴고 건수 앞에서 슥- 하고 휘저었다. 건수의 눈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런 다음에 적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예를 들어, ‘난 지금 이 기지에 막 들어온 네 아군이다. 너흰 날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말야. 그럼 그 적들이 세뇌가 된단 말이야.”

“세뇌요?”

잠깐만. 그건 텔리 본인의 얘기 아닌가? 아무래도 그가 불새 둥지에 잠입할 때 트럭운전수 테디에게 썼던 방식 같은데?

“그래. 바로 그거야. 세뇌지. 그런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가 있어. 문제는 이거야. 저 여자는 동시에 몇 십 명, 몇 백 명, 아니, 나도 몰라. 저 여자가 한 번에 몇 명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지. 아무튼 그런 능력을 가진 여신이란 말이야.”

“저... 전 그런 건 잘 모르겠고요. 암튼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제게 곧 일어날 미래를 예견해주셨어요. 그게 다입니다.”

텔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그래. 그래. 처음엔 다 그렇게 환심을 사는 거지. 인마, 넌 이미 저 여자의 덫에 걸려들기 시작한 거야. 운명의 어머니? 흥! 저 여자는 모든 일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이뤄져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내 충고를 잊지 마. 저 여자를 상대할 때는 진짜 조심해야 돼. 아니, 일단 저 여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네 그 잘난 운명의 절반은 이미 개판이 되었다고 보는 게 좋을 거야.”

건수는 텔리가 너무 이디레이아의 흉을 보니까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감이 있었다.

‘이상하네. 내가 보기엔 저 여신님은 상당히 온화하시고 사려 깊은 분 같은데, 왜 텔리님은 이렇게 흉을 보시는 거지?’

텔리는 마치 지금 건수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이 계속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너도 이미 반쯤 저 여자에게 넘어갔어. 쯧쯧쯧.”

계속 자기만 쳐다보면서 얼굴을 구기고 있는 텔리를 보기가 영 민망해서 건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 *

강원도 아저씨 내외와 손님들이 모두 모이자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디레이아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든 음식을 권하며 웃었다.

“여러분, 반가워요. 우리들, 이미 몇 번씩 만난 사이지요?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겠어요. 내 이름은 이디레이아라고 해요. 난 다른 세계에서 온 여신입니다. 우리 세계에선 흔히들 운명의 어머니라고 부른답니다.”

사모님, 그러니까 강원도 아저씨의 아내가 남편의 귀에 손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신이라니.... 어제 그 여자 귀신이 할머니에게 또 빙의한 거예요? 도통 이상한 언어를 쓰네.”

강원도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귀신이 아니라 완전히 초강력한 무슨 신령님 같은 거야. 지금 우리 집에 오신 멧돼지 산신령님 같은, 뭐 그런 신령이 있어.”

사모님이 아저씨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에요? 멧돼지 산신령? 뭐가 또 이 집에 기어 들어왔어? 미치겠네. 우리 집이 완전 무당집 다 됐잖아.”

“쉿! 말조심해. 이 여편네야!”

아저씨는 재빨리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붙이고는 입조심을 시켰다. 이디레이아는 두 부부를 흐뭇하게 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건수와 광식씨는 수고스럽겠지만 여기 한국분들에게 통역을 좀 해주세요. 사실 오늘 내가 한국 음식을 처음 만들어봐서요. 혹시 입맛에 맞으실지 잘 모르겠지만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난 아주 옛날에 아테네가 만든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솜씨가 대단했어요. 그리고 그 때 알았죠. 내 운명엔 요리는 없다고요. 호호호.”

텔리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디레이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가 아테네 따위에게 관심이 있대? 너, 겨우 음식이나 만들어서 맛보게 하려고 나타난 건 아닐 거잖아.”

이디레이아는 텔리가 무례하게 굴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화사한 미소로 답했다.

“오... 텔리. 역시 당신은 날카롭군요. 맞아요. 아침식사 때문에 찾아 온 건 아녜요. 어젯밤에 일이 좀 있었어요.”

일이 있었다니... 텔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일? 무슨 일?”

“일, 그러니까 사건이요. 어제 여기 들렀던 경찰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이 났었어요.”

“난 또 뭐라고. 쳇.”

그러자 텔리는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뇨. 텔리.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에는 당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도 해요.”

“뭔 헛소리야? 내가 그놈들을 안 죽이고 살려줬는데.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는 거야?”

“그들은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검은 늑대에게 습격을 당했어요. 내가 원래 봤던 미래에선 그들은 적어도 다음 주나 되어야 당신들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었다고요. 그런데 어제 무슨 일이 생겼죠?”

텔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몰라! 어제 뭐 일이 한 가지만 있었어? 아니, 어제 하루가 제대로 된 하루였냐고? 검은 방에서 100 년의 시간을, 산 속에서 이틀의 시간을 보낸 하루였잖아. 그리고 별별 이상한 것들을 다 보고 싸우고 어디 한두 가지 일이 일어났냐고!”

이디레이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텔리를 바라봤다.

“당신이 케르케로우스를 죽였잖아요. 그 일을 말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