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4 부. 예언자들 - 77 화

예언자들 – 77

“허억!”

알렉시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여기는.... 실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멧돼지 산신령의 거대한 앞발이 자신의 머리 위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그 후에는 큰 충격을 받고 기절한 것 같았다.

“큰 발바닥이 나를 밟았었는데.... 아직 살아있다니....”

그녀는 손으로 자기 목을 만져봤다. 분명히 몸과 하나로 붙어 있었다.

“하아...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사방이 어두컴컴하긴 했다. 그녀는 잠시 눈이 어둠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만히 어둠을 응시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으로도 대충 물건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일단, 정면에 보이는 것은 천정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작은 방 안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누구의 방이지? 누가 날 여기로 데리고 온 걸까?’

상반신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바닥에 뭔가 히끄무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실루엣은 분명 사람이었다.

‘아니! 저것은 사람이다! 이 방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

경계심이 발동하면서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즉시 손에 힘을 주입해서 불 주먹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그 불 때문에 주위가 환해지는 것 아닌가.

‘아, 저 사람은... 싸이언스였구나. 그럼 여긴 아까 그 집의 내부임이 틀림없겠지. 그나저나 난 정말 멍청하구나.’

그녀는 자신의 불타오르는 손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불을 만들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려고 했단 말이야. 텔리놈의 말대로 난 정말 멍청한가 보다.’

알렉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온몸이 쑤셨다. 아까 건수와 일전을 벌인 것과 멧돼지 산신령에게 밟혀서 충격이 컸었던 것 같다. 혹은 침대 생활이 익숙한 그녀가 바닥에 이불 한 장을 깔고 누워있었던 것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전장을 누비고 다닐 땐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서도 잘만 잤었는데, 겨우 지난 몇 십 년 동안 편하게 살았다고 몸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부끄럽다.’

그녀는 미국에서 편하게 먹고 잤던 세월이 자신의 정신을 느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구에 와서 사랑타령이나 하면서 살았던 것이 여러 면으로 미숙한 케르케로우스의 사제와 그 주변인들에게 무릎을 꿇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정말 부끄럽다. 케르케로우스 녀석들에게 무릎을 꿇다니. 게다가 그들은 엘리시움인도 아닌 약하디 약한 지구인들 아닌가! 이 치욕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알렉시스는 언제까지고 자아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그녀가 직면한 문제는 적의 소굴에서 무사히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불 붙은 주먹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분명 이 문 뒤에는 적들이 있을 것이다. 케르케로우스의 사제도 미숙해서 그렇지 절대 약한 상대가 아니었어. 게다가 그 이상한 할머니와 정체모를 멧돼지 신수도 있지. 아, 심지어 날 너무 잘 아는 텔리도 날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저 녀석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이렇게 멀쩡하게 방에 가둔 걸까? 내가 방심하길 기다렸다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심문과 고문을 시작하려는 속셈인가?’

긴장해서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화가 단단히 난 텔리의 목소리였다.

“아이씨! 나와, 이 자식아! 비켜! 안 비키면 죽여 버린다!”

그리고 이윽고 들리는 두 남자의 목소리.

“안돼요! 텔리님! 제발 참으세요.”

“건수야, 절대 물러서지 마. 텔리님을 꼭 막아야 돼!”

알렉시스가 들어보니 세 사람 중 둘은 텔리와 케르케로우스의 사제임이 분명했다. 셋은 모두 엘리시움어를 쓰고 있었다.

‘둘은 누군지 알겠는데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군. 아무튼 셋 다 전부 고향의 언어를 쓰고 있어. 나머지 둘이 텔리에게 존칭을 쓰는 것을 보니 저 셋 중엔 텔리가 가장 높은 위치인 것 같군. 그나저나 텔리놈이 왜 저리 화가 나있는 거지?’

텔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화가 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었다.

“너 인마, 지금은 널 위해 날 막아줄 늑대도 없어! 좋은 말로 할 때 문에서 비켜서! 내가 아주 알렉시스 저 년을 죽여 버릴 거니까! 으아아아악!”

알렉시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어도 이젠 그가 자기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머지 둘이 광분한 그를 가까스로 말리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텔리님, 제발 진정하세요.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에요? 천사의 오후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당연하지! 네가 뭘 알아? 지난 몇 달간 계속 놓쳤는데 오늘이 마지막이었다니!”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그게 중요해도 그렇지, 화가 좀 난다고 다쳐서 아픈 여자를 죽이겠다고요?”

적의 입에서 자기가 모르는 정보가 술술 나오기 시작하자 알렉시스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천사의 오후가 뭐지? 케르케로우스 놈들의 비밀 무기인가? 몇 개월간 뭘 놓쳤다는 거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니... 혹시 오늘이 그 천사의 오후라는 걸 이용해서 불새군을 공격하는 디-데이였던 건가? 그런데 이름이 좀 이상해. 천사의 오후라니... 아, 설마 그건 무기가 작전명일지도 몰라.’

그녀가 천사의 오후에 관해 망상을 계속하는 동안 문 밖에서 세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 되었다. 알렉시스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문에 귀를 갖다 댔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아까 그 예의 없는 여편네가 그랬어. 오늘 재방송까지 다 끝났다고.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잖아! 비켜! 안 비키면 너도 죽어!”

‘우당탕탕!’

“억!”

텔리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 뒤에서 한 바탕 소란스러운 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알렉시스는 밖에서 무슨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쉽게 손잡이를 돌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왜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지? 저들 사이에서 내분이 생겼나?’

‘쾅! 우지직!’

강한 파열음과 함께 문에 귀를 대고 있는 알렉시스의 얼굴 바로 옆에 구멍이 하나 뚫렸다. 깜짝 놀라 뒤로 피한 알렉시스는 하얀 빛을 내는 손이 구멍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 손은 방문을 잡고 문을 조각조각 뜯어내기 시작했다.

‘저 손! 빛이 나는 것을 보니 신의 능력을 받은 자의 것이다.’

알렉시스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팔에 힘을 집중했다. 그녀의 팔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들어오기만 해봐라. 방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잡아서 불태워 죽여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