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 예언자들 - 113 화
예언자들 – 113
강원도 아저씨 집의 거실에 모두 모인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그들 앞에 서있는 맥스 라볼타가 입을 열고 말하기만 기다렸다. 그들은 모두 처음 라볼타를 봤을 땐 그를 경계했지만 그가 이디레이아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내는 것을 보고나서는 안심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라볼타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볼타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많이 놀라셨죠?”
그러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틀 사이에 하도 이상한 일을 많이 목격하게 되니까 ‘이 정도 일이야’ 싶은 거였다. 사실 그들은 그녀보다도 마룻바닥 한 구석 그늘진 곳에서 목만 내밀고 있는 텔리의 모습이 훨씬 공포스러웠다. 마치 단두대로 처형된 죄수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 모습 같았다.
“음, 그래요. 라볼타 사장의 몸을 빌린 내 모습보다는 바닥에 머리만 내놓고 있는 텔리의 모습이 훨씬 기괴하겠죠. 텔리, 내가 아까 여기 들어올 때 얘기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러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은 겁먹는 다고요. 여러분, 저 자가 저러고 있다고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요. 저것은 저 자의 특기입니다. 그림자에서 다른 그림자로 이동할 수 있지요. 또 보다시피 기괴한 짓을 일삼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갖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특기겠네요. 아무튼 텔리는 우리 세계의 신들 중 가장 괴이한 신이니까 우리가 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얘기나 어서 해, 이디레이아. 아니면 네가 몸을 빌린 그 녀석을 죽여서 널 귀찮게 할 테니까.”
텔리가 한 마디 쏘아붙이자 이디레이아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았다.
“예, 맞아요. 내가 얘기할 것만 빨리 얘기하고 가보려고 해요. 아까 내가 경고한 대로 이곳에 위험이 닥쳐올 거예요. 음... 그 꼬마 아가씨는 이곳을 떠났군요. 잘했어요. 오달희씨와 부인도 그렇게 해요. 할머니..... 음... 할머니도 안전을 생각하면 떠나면 좋겠지만 내게 몸을 빌려줘야 하니 아마 안 되겠네요.”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신령님. 저야 살기도 오래 살았고..... 다만 아파서 누워있는 건수 친구는 이곳을 떠나야지요. 또 건수도 웬만하면이곳을 떠나는 게....”
“건수는 안 됩니다. 그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아마 그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운명의 장소에 갈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듣고 텔리가 바닥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올라오면서 물었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운명의 장소라니? 건수가 뭔 장소에 먼저 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거야? 이디레이아, 너 또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거야?”
“장난이라뇨. 난 막으려고 애썼지만 건수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휩쓸려간 거라고요. 여기 오달희씨에게 물어봐요. 그가 여기 빨리 오도록 재촉한 게 납니다.”
“아니야, 너가 실을 당겼어. 내가 뭐라고 했어. 다른 사람의 운명을 맘대로 결정하지 말라고 했지?”
“텔리 당신이 내게 뭐라고 생각하든 난 신경 쓰지 않아요. 아니, 이번엔 내가 한 마디 하죠. 당신은 자기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고 나더러 뭐라고 하지 말아요. 내가 할 일은 운명의 흐름 속에서 미래를 보고 예측하는 일입니다. 이번에도 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예측했고 내가 건드려야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선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은 일단 일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으라고요. 이젠 건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을래요. 그리고 계속 그런 걸 묻는다면 이후 당신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 이 여자가 진짜!”
텔리가 다시 한 번 발끈하며 이디레이아에게 나아갔지만 미스터 황이 재빨리 일어나서 그를 말렸다. 그녀가 입을 딱 다물어 버리자, 씩씩거리던 텔리는 그만 포기하고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더 이상 그녀에게서 올바른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예 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흐름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건수는 건수대로 이 모든 일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게 될 거예요.”
“......”
텔리는 그녀의 말을 더 이상 막지 않았다. 이디레이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까 내게 물었던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저 쪽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었죠? 예. 뭔가 큰 일이 난 것 같아요.”
텔리는 입을 오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것 같다고? 뭘 그렇게 불확실하게 말하는 거야? 진짜 엘리시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일어난 거지, 그런 것 같다가 뭐야?”
“왜냐면 나도 오랫동안 이 세계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죠. 나도 지금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있잖아요? 18 년 전부터 검은 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왕래도 없었어요.”
“그런데 넌 어떻게 저쪽 세계에 일이 났다고 아는 거야?”
“검은 방의 문이 닫혔다지만 약간의 틈은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건 텔리 당신도 직접 목격했으니 알 것 아니에요?”
“음. 그렇지. 에뮤니우스 녀석이 베토케로우스와 검은 방의 틈으로 서로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었지.... 잠깐만! 너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내가 에뮤니우스 방에 몰래 들어가서 본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미래를 전에 미리 봤다고 해두죠.”
“우아아.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야! 진짜 화가 난다. 내 일까지 엿보고 있었다니! 넌 언젠가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음... 글쎄요. 딱히 그런 미래를 본 기억은 없는데...?”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오르며 텔리의 흥분하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검은 방의 문에는 작은 틈이 있었는데요. 그 틈을 통해서 누가 내게 정보를 전해주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낸 사실은 지금 엘리시움에서는 18 년 전부터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봐, 잠깐만!”
텔리는 또 다시 이디레이아의 말을 중지시키면서 그녀의 말에 꼬투리를 잡았다.
“무슨 소리야? 신들 사이의 전쟁은 각지에서 늘 있었어. 그게 뭐가 새삼스러운 거라고 그래? 심지어 내가 마지막으로 엘리시움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땐, 그 정신 나간 불새 놈이 이곳저곳에 전쟁의 불꽃을 퍼트리고 다닌다고 하던데!”
“물론 작은 전쟁이야 늘 있었죠. 당신 말대로 지난 몇 백 년 간 한 번씩 불새 에피로제가 전쟁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군대의 기세가 워낙 거세서 아무도 함부로 맞서지 못했지요. 그대로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엘리시움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패권자가 나타났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18 년 전에 베토케로우스가 갑자기 나타나 에피로제와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커볐던 모양입니다.”
“베토케로우스가.... 음. 그럼 일이 커지지.”
오래 전 검은 늑대 괴수와 맞섰던 텔리는 그녀 말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 후 둘이 팽팽히 맞서면서 서로 피해가 컸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끝내 베토케로우스측은 맹렬한 불새 군을 당해내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이, 잠깐만!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텔리가 또 다시 말을 끊자 이디레이아는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아이, 진짜.... 왜 자꾸 말을 끊어요? 또 뭐에요?”
“베토케로우스가 어떻게 불새 따위에게 전쟁을 진다는 거야? 너 그 놈이 어떤 괴물인지 몰라? 세상에 누가 그 괴수를 이길 수 있다고!”
“현재의 베토케로우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무적의 괴수가 아니에요.”
“뭐?”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텔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그가 이디레이아의 말에 제대로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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