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6 부. 솔로우스 - 21 화

솔로우스 – 21

텔리와 미스터 황, 그리고 알렉시스가 함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후 데디쿠스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았다. 벌써 텔리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세 번째 목격했음에도 그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하! 세상에..... 또 내 눈 앞에서 그림자 안으로 사라져버렸어! 이번엔 알렉시스님과 그 건방진 사제 놈까지 말이야! 그것도 인간들이 신과 함께 신의 방으로 들어갔다니! 내가 지구에 와서 도대체 뭘 보게 된 거야.....!”

사실 신과 신수가 인간과 함께 사는 엘리시움에서도 일반 인간이 신을 보게 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과 사이가 가까운 사제들은 꽤 자주 접할 기회가 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특히 그가 모셨던 신인 불새 에피로제의 경우엔 더 그랬다. 그는 자기의 영토 안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었다. 데디쿠스는 에피로제의 명령으로 정복 전쟁에 나갔던 병사였지만, 그 신수와 대화를 나누어 보기는커녕 멀리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였었다. 오히려 이번에 텔리와 대화해 본 것이 그의 인생에서 신과 대화한 첫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 그것뿐이 아니다. 조금 전 텔리의 머리를 들었던 것도 있었구나. 그는 처음으로 신의 육체와 접촉하기까지 했었다. 셋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내가 살육의 신과 대화하고 그분의 머리를 들었어. 이 손으로.... 그리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니! 맙소사!”

그는 갑자기 몸이 추워졌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후우-’하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 * *

텔리의 손을 잡고 그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미스터 황과 알렉시스는 눈앞이 깜깜해지고 온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느꼈다. 마치 몸이 공중에 붕 뜬 것처럼 발밑에 아무 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미스터 황은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오!”

잠시 후 그들은 발밑에 딱딱한 것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바닥이 있는 어떤 공간에 들어온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주위가 눈을 감은 것처럼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미스터 황이 텔리의 손을 쥔 채로 물었다.

“텔리님, 여기는 어딘가요?”

“쿨럭. 쿨럭. 내 방이다.”

“그런데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그거야 불이 없으니까.... 쿨럭. 알렉시스. 네 왼쪽에 횃불이 있으니 거기에 불을 붙여라. 그럼 뭐가 좀 보일 거다.”

“네.”

알렉시스는 텔리의 손을 놓고 한 손에 힘을 집중시켜 불을 만들었다. 왼쪽을 보니 과연 텔리의 말대로 기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옆에 천이 둘둘 말린 나무 막대가 있었다. 그녀가 횃불에 불을 붙이고 주위를 비추었다. 미스터 황의 눈동자가 그녀의 횃불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거의 100평도 넘을 정도의 큰 홀이었다. 사방에 이런저런 물건이 여기저기 아무렇게 바닥에 널려 있었다.

“여긴..... 돌로 만들어진 큰 홀이군요! 꽤 넓네요.”

텔리는 석실 바닥에 누운 채 알렉시스와 미스터 황에게 말했다.

“쿨럭. 이 방의 저쪽 끝에 관이 몇 개 있을 거야. 거기에 내가 쓸 수 있는 육체가 있을지 모른다. 너희 둘이 가서 그걸 꺼내. 그리고 어서 내게 가져와. 어떤 것을 꺼내야 하는지 가서 보면 알 수 있다.”

미스터 황은 긴장했는지 마른 침을 삼키며 텔리에게 물었다.

“육체.... 그러니까 시... 시체 말씀이신가요?”

“쿨럭. 쿨럭. 그래.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어서 가지고 와! 헉헉헉.”

“으..... 시체라니......”

관에서 시체를 꺼내오라는 말에 미스터 황이 망설이고만 있자, 알렉시스가 그의 손을 잡아채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망설이고 있어! 텔리님 말씀을 들었잖아. 어서 가자!”

“그... 그래도 시체를 가져오긴 싫은데!”

“어서! 멍청아!”

알렉시스는 강한 힘으로 미스터 황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그를 끌고 석실의 한 쪽 끝까지 달려갔다.

둘이 석실의 한 쪽 끝에 가보니 그곳엔 유리로 만든 관들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알렉시스가 불붙은 손으로 관들을 비추자, 관들 중 하나는 엄청나게 큰 관이었고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관 안에는 그들에게 익숙한 평소의 텔리의 육체가 들어있었다. 미스터 황이 텔리가 늘 사용하던 그 육체의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건 안 돼. 이건 이미 텔리님이 사용하시다가 너무 크게 부상당한 거라고 하셨단 말이야. 여기 봐봐.”

미스터 황은 손가락으로 육체의 복부를 가리키더니 말을 이었다.

“저 부분이 너무 심하게 훼손당해서 사용하실 수 없어. 이 육체나 지금 저 거인의 육체나 상태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알렉시스는 긴장해서 이마에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지? 육체는 이것들뿐인가?”

미스터 황이 옆의 어두운 공간을 보면서 말했다.

“혹시 저쪽에도 뭐가 있지 않을까?”

텔리는 그저 저쪽이라고 했을 뿐 자세하게 두 코너 중 어느 쪽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쪽 코너가 아니면 아직 어두운 코너에 다른 육체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저기도 가보자!”

불로 주변을 밝힐 수 있는 알렉시스가 먼저 앞장섰다. 이쪽 코너에서 관과 그 안에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육체를 본 미스터 황은 저쪽 코너에 가고 싶지 않아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일단 텔리를 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원치 않았지먼 그녀의 뒤를 따라 다른 코너도 살펴보게 되었다.

* * *

그들이 온갖 잡동사니를 휘저으며 석실의 다른 쪽 코너에 가보니 다행히 그곳에 유리관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어두운 색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어떤 중년의 외국인의 몸이 들어 있었다. 알렉시스가 유리관 위를 자신의 손에 붙어 있는 불로 환하게 비추자 미스터 황이 자세히 그 안에 들어있는 외국인을 보았다. 상의의 옆구리 부분이 조금 찢어져 있고 셔츠에 핏자국이 물들어 있었다. 미스터 황은 유리관을 열고 그 육체의 이마에 빛나는 손을 갖다 댔다.

“오! 이거야. 옆구리에 상처가 있었는데, 그건 이미 회복되었어. 텔리님이 말씀하신 육체가 바로 이거라구.”

“알았어. 등 돌려봐. 어서!”

알렉시스가 미스터 황더러 등을 돌리라고 하자 그는 뻘쩍 뛰며 항의했다.

“아, 왜! 내가 업고 가라고? 그건 절대 안 돼!”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등 돌아 서. 난 손으로 불을 피워야 하니까 내가 업고 갈 수는 없잖아.”

“아이, 씨X! 싸가지 없는 년이 진짜 지 힘만 믿고!”

하지만 미스터 황은 그녀에게 힘으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그는 한국말로 육두문자를 내뱉더니 이를 꽉 물고 등을 돌렸다. 알렉시스는 냉큼 관에서 중년 외국인의 육체를 꺼내더니 미스터 황의 등에 업히게 했다. 시신을 업게 되자 미스터 황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또 다시 뭐라고 한 마디 욕을 하려고 했다가 곧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다. 텔리와 달리 그는 단 한 번만 살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알렉시스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으며 앞서 달려가는 그녀를 부지런히 따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