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56 화
만월의 밤 – 56
검은 방의 주인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수세에 몰리고 있는 케르케로우스에 대비되게 건수와 데디쿠스 쪽 병사들은 상당히 영리하게 전투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속도의 움직임을 가진 건수가 제일 선봉에 서서 릴리카의 병사들을 발로 차서 쓰러뜨리면 데디쿠스나 붉은 수염의 헨리가 그들의 숨통을 끊는 방식을 취했다. 그들이 사람의 목숨을 끊을 때마다 건수의 마음은 침통해졌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살인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건수는 병사들을 발로 차서 넘어뜨린 후에는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고개를 돌렸다. 릴리카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능력만으로는 건수를 상대하는 것이 너무 힘에 부쳤기 때문에 포위선을 풀고 점점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자리를 지키며 릴리카의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상대하고 있자, 어느새 릴리카가 그들 가까이에 와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는 케르케로우스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그가 도망가버리자 이젠 건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사방에서 늑대의 긴 울음소리와 짖는 소리가 온 산을 뒤엎자 그녀는 건수에게 겁을 먹고 물러선 병사들에게 빽 하고 소리 질렀다.
“봐라! 저기 베토케로우스님의 검은 늑대들이 우리를 도와 케르케로우스를 잡으려고 숲속에서 달려 나오고 있다. 이제 이 전투도 끝자락에 온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뭐 하는 거냐? 겁을 먹고 물러서다니! 케르케로우스를 죽이고 나면 에피로제님을 뵐 텐데, 그분께 어떤 내용의 승전보를 들려드리고 싶은가? ‘늑대들이 몰고 가는 승리의 마차에 우리가 나중에 살짝 올라탔습니다’라고 할 테냐?”
“아, 아닙니다!”
“그럼, 말로만 하지 말고 저 녀석들 목에 칼을 꽂으란 말이야!”
건수는 릴리카 입에서 나오는 끔찍한 말에 혀를 내둘렀다. 이 여자가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미 며칠 전 지하실의 창고에서 산채로 사람의 머리를 불태우는 것을 목격했었다. 그때 그 끔찍한 일을 겪은 후부터 건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릴리카만큼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음. 그렇다면 그보다 몇 배는 더한 텔리는 어떻게 생각하니, 건수야?
양 측이 대치된 상황에서 건수와 릴리카는 다시 한번 맞붙게 되었다. 다른 병사들은 일제히 물러서서 두 사람 주위를 빙 둘러서더니 일종의 작은 링을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치 양 진영의 적이 가까이 오면 자신들의 무기로 그를 뒤에서 공격하겠다는 것 같았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무래도 보다 많은 테두리를 확보한 쪽은 릴리카니까 그녀의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온 건수를 해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되겠다. 그것을 안 데디쿠스는 자기 쪽의 병사들이 폭을 넓게 해서 더 많은 테두리 공간을 확보하기 원했다. 그러나 건수는 뒤를 돌아보며 데디쿠스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릴리카는 착용한 금색 그물 옷이 받은 충격을 되돌려주기 때문에, 혹시라도 누가 그녀를 뒤에서 공격한다 해도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건수도 주의만 잘 기울인다면 릴리카 쪽 병사들이 그렇게 큰 위협이 될 리 없었다. 그들이 무기를 휘두르는 동작은 그의 눈에는 슈퍼 슬로우 모션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정신만 차리면 별일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일은 모르는 거니까 데디쿠스는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는지 한 바가지 욕을 퍼 올렸다. 히메이오스도 한숨을 쉬며 순식간에 인간 띠로 만들어진 링을 원망했다. 하지만 붉은 수염의 헨리는 이렇게 불리하게 펼쳐진 상황보다는 건수에게 좀 더 집중했다.
“건수, 아까 내가 보니까 네가 하는 공격이 릴리카에게 크게 피해를 주는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분명 어디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이미 다 아는 얘기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헨리의 마음이 고마워서 건수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소리도 울리지도 않았는데 건수와 릴리카는 다시 맞붙게 되었다.
마치 격투기 시합 같은 결투가 시작되었다. 건수는 최대한 릴리카로부터 떨어지려고 했고 그에 반해 릴리카는 될 수 있는 한 둘 사이에 짧은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릴리카는 아까와는 달리 두 주먹에 힘을 주입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건수를 상대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어차피 그녀의 동작이 너무 느려서 그의 몸에 닿지 않을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수의 행동이 너무 빨라서 아무리 공격해도 한 방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겠는가. 그건 마치 낮에 필요도 없는 전깃불을 끄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아까 건수가 넘어졌을 때처럼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그땐 제대로 불새가 부여한 힘을 사용하려는 계획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건수 말고도 케르케로우스라는 더욱 신경 써야 할 대상이 있지 않은가. 건수 역시 그녀와의 거리만 유지한 채 전혀 그녀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격해봤자 어차피 충격은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올 것이고 아까처럼 고통에 휩싸여 땅을 구르게 될 텐데, 그렇다면 그게 바로 그녀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은 서로 빙글빙글 돌면서 탐색전만 벌이게 되었다.
그렇게 잠깐 힘과 눈치의 줄다리기를 진행되던 중, 먼저 균형을 깨고 상황을 리드하게 된 것은 릴리카였다. 일단은 아까와 같이 무모하게 돌진하며 건수를 공격했다. 그녀가 힘껏 휘두르는 주먹들은 건수의 눈엔 그저 느려터진 단순한 동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돌진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몸을 틀면서 그 모든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는데, 갑자기 칼날이 그의 얼굴의 왼쪽 뒤에서부터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인간 띠로 이뤄진 링의 끝까지 몰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불새군의 공격은 머리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의 빠른 다리가 전투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리 쪽을 향해서도 공격했다. 생각보다 많은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오자 그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야만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향해 공격해오는 릴리카를 향해 날아올랐다. 릴리카는 건수의 무릎에 얼굴을 맞았는데, 아마 금색 그물 옷을 입지 않고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도 남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몸만 뒤로 휘면서 움직여졌을 뿐, 별다른 타격은 입지 않았다. 그에 반해 건수는 자신이 릴리카에게 가한 충격의 대부분을 다시 돌려받아야 했다. 그 결과, 한쪽 무릎에서 찌르는듯한 고통을 느끼며 땅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야만 했다.
건수가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고통에 휩싸여서 쓰러진 것은 릴리카에겐 그를 해치우기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녀는 다시 오른손에 힘을 주입하고 건수에게 걸어갔다. 그는 그녀가 손에 화염을 붙이고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기어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곧 릴리카에게 따라 잡혀버렸다. 그녀는 건수와 처음 싸울 때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불붙은 손을 그의 얼굴에 가져갔다. 뺨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건수는 몹시 긴장했다.
“으윽!”
“자, 이제 죽어야지. 예쁜 모습으로 저세상으로 갈 수 있게 누나가 도와줄게!”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