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 솔로우스 - 14 화
솔로우스 – 14
릴리카가 베토케로우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오른 쪽에서 늑대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다. 그 늑대는 크기만 해도 그녀만할 정도로 크기가 컸지만, 얼굴이 그녀의 몸에 닿자마자 새카맣게 타버렸던 것이었다. 얼굴을 그을린 녀석은 소리 한 번 지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거꾸러졌다. 그런데 늑대가 비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도 또 다른 늑대들이 옆에서 튀어 나왔다. 아마 평소라면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할 놈들이었지만 지금은 베토케로우스에게 정신을 조종당해서 말 그대로 물불을 못 가리게 된 것이었다. 릴리카는 불붙은 팔을 휘두르며 새롭게 등장한 늑대들을 불태우며 돌파했다.
“에잇! 비켜라! 귀찮은 것들!”
그녀를 막으려다가 털에 불이 옮겨 붙은 늑대들 중 하나는 활활 불타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또 다른 한 녀석은 서둘러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땅바닥에서 굴렀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불이 그리 쉽게 꺼지지 않았다. 혹시 릴리카의 몸을 덮은 화염은 그냥 평범한 불이 아니었던 것일까? 끝내 그 불은 늑대를 순식간에 불태우며 시커멓게 변한 숯덩이만을 땅 위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릴리카는 순식간에 늑대를 홀라당 태워버릴 만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그녀의 부하들 몇 명이 늑대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는 ‘가죽방패’로서 죽지 않아도 되지 않았잖은가. 그건 아마도 그녀가 지금 발휘하고 있는 힘을 베토케로우스와 대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두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그녀가 부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그녀의 성품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상하게도 베토케로우스는 릴리카가 자기에게 달려오고 있는데도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옆과 뒤에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어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남은 검은 늑대들의 정신을 조종하여 그녀의 질주를 막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는 침착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 신전 전사의 기세가 대단하다. 으음.... 그리고 난...... 나는 지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당장 나가서 저따위 한입거리도 안 되는 성전 전사를 해치우기는커녕 저년이 내게 올 때까지 힘을 모으고 있어야 하다니.....’
그렇다. 베토케로우스가 지금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허세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부하들을 조종하여 릴리카를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텔리와 맞붙었을 때 그는 입은 피해가 상당했었다. 그리고 겨우 다시 일어난 후, 두 번째 대결에서 텔리를 쓰러뜨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너무 많은 힘을 낭비했다. 아마도 그가 가진 힘의 전부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는 텔리를 거의 죽음에 몰아넣은 후 그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다시 알렉시스와 릴리카에게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몸 상태를 생각했더라면 절대 취하지 않았어야 할 행동이었다. 그리고 막상 그녀들을 상대하려고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서 보니까 생각처럼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처음 엘리시움에서부터 이 세계로 올 때부터 정상이 아니었던 그의 몸은 몇 달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다가, 이제는 몇 천 년에 걸쳐 부활한 괴수의 위용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늑대의 것과 별반 차이 없게 되어 있었다. 이젠 돌이킬 수도 없고 한참 늦었지만, 그는 마음 속 깊이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우울함이 그의 눈빛에 가득했다.
‘생명의 정수 없이 너무 긴 시간에 걸쳐 부활한 후, 그 긴 시간을 허비한 것을 보상받고자 마음이 조급해져서 너무 빨리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 문제였다. 엘리시움에서 텔로토마나 그의 형제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전쟁을 일으켰어. 예전 날 대항했던 신들이 너무 허약해서 그 정도 힘만 가지고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단정 지었지. 하지만 그 불새 녀석이 그렇게나 강했을 줄이야.... 그때,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몸을 이끌고 이곳을 온 것도 실수였다. 이 세계로 도망 온 케르케로우스만 처리해서 다시 검은 방의 주인이 되어 세력을 키우려고 했는데..... 아아, 여기서 저 빌어먹을 텔로토마 놈을 다시 만나다니! 이곳에서 내게 이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릴리카가 자기가 있는 곳 바로 앞까지 온 것을 보고, 베토케로우스는 나무들에 기대고 있던 큰 몸을 서서히 움직였다. 그는 입을 한 번 크게 벌리더니 달려오고 있는 릴리카에게 말했다.
“예전의 실수는 이미 지나간 일.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내가 다른 누구에게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신전 전사 따위에게 내 최후를 맞을 수는 없지. 자! 와라!”
언제 후회했었냐는 듯이 그의 표정은 다시 침착해졌다. 우울했던 그의 눈빛은 다시 붉은 색의 광기로 가득해졌다. 그는 사납게 짖으며 릴리카에게 달려 나갔다.
자신의 상체가 활활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인 채 달려온 릴리카는 베토케로우스의 턱 밑 바로 앞에까지 파고 들더니 온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타앗!’
어차피 그녀 역시 자신의 체력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번에 급소부터 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겐 다행스럽게도, 괴수의 몸놀림은 놀라울 정도로 굼뜨기까지 했다. 그녀가 뛰어오른 것을 보고도 베토케로우스의 앞발은 한 두 박자 늦게 그녀에게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좋은 기회를 살려 공격을 감행했다.
“에잇!”
기합소리와 함께 그녀의 불타는 주먹이 괴수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퍽!’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일격을 맞고도 괴수는 쓰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털조차 불이 붙지 않는 것이었다. 부하 늑대들은 그녀의 화염에 닿자마자 불이 몸에 달라붙었는데 이 괴수의 털은 그녀의 화염에도 끄떡없었다.
“이럴 수가! 몸이 마치 철 덩어리 같아!”
일격에 실패한 릴리카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크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불타는 주먹이 베토케로우스의 몸에 닿았을 때 그녀가 느낀 것은 일반적인 동물의 몸이 아닌 마치 단단한 철의 느낌이었다. 단단하기가 웬만한 무기로도 절대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철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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