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30 화
만월의 밤 – 30
알렉시스는 잠자코 있으면서 텔리가 뭐라고 말할지 기다렸다. 이디레이아도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음.... 그래서 바이베노파시스가 검은 방에 관심을 가졌던 건가? 그렇다면 그가 베토케로우스와 손을 잡은 이유도 알 것 같아. 바이 녀석은 검은 방에 있는 암흑이 필요했던 거야. 왜냐면 암흑으로 만들어진 육체 외에는 그의 정신을 온전히 담을 그릇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케르케로우스 말고는 검은 문을 열 수 있는 존재는 베토케로우스 밖에 없으니까.”
알렉시스는 그 말을 듣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맙소사. 그럼 텔리님과 파괴신이 힘을 합칠 수도 있겠다는 제 생각은 큰 착각이었건 거군요.”
“그래. 그가 베토케로우스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확률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둘이 협업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그건 정말 무리겠어. 하지만 그 두 녀석은 어떻게 서로 의기투합하게 되었을까? 베토케로우스는 케르케로우스가 사라진 최근 십몇 년 동안에만 검은 문을 열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 둘은 서로 같이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긴데.”
조용히 텔리의 추리를 듣고만 있던 이디레이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꽤 좋은 추리네요. 그건 둘의 공통관심사 때문이 아닐까요?”
“바이와 고대 괴수의 공통관심사라고? 둘은 몇천 년 전에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 사이인데 무슨 공통관심사가 있겠어?”
“호호호. 글쎄요. 뭐, 그럼 그 둘의 공통의 적이 있다든지?”
“그 두 악신이야말로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지 보이는 게 적일 텐데. 공통의 적이라.... 공통의 적이라....?”
알렉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혹시..... 엘리시움의 신들이 아닐까요? 베토케로우스는 신들의 연합군과 싸우다가 육체의 정수까지 잃었었고, 바이베노파시스는 신들의 미움을 받아 이 지구에 감금되었던 거잖습니까? 만약 제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신들을 아주 증오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알렉시스는 이디레이아를 보았다. 그녀는 엘리시움의 신들 중 하나인 여신 앞에서 말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알렉시스는 즉시 땅에 엎드리며 이디레이아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 여신님 앞에서 감히 제가 그런 말을 하다니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디레이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알렉시스더러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아니야. 알렉시스의 말이 옳아. 그 둘은 분명히 신들에 대한 엄청난 원망과 분노를 쌓아두고 있었을 거야. 최고로 흉폭한 신수와 또 그만큼 파괴만을 원하는 신, 그 둘이 진정 원하는 게 뭘까?”
텔리는 지금까지 입에 물고 있던 클로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표정이 다소 긴장되어 있었다.
“후우우..... 그 자식들이 뭘 원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 그놈들은 엘리시움에 돌아가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거야. 신과 신수들, 그리고 인간들. 아니, 어쩌면 둘이 힘을 합쳐 그 세계를 모조리 다 없애버리려는 걸까?”
그 말을 듣고 알렉시스는 깜짝 놀랐다. 왠지 인간인 자신이 들을 자격도 없는데 신들만 알아야 할 비밀을 듣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몹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디레이아에게 질문했다.
“여신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엄청난 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시... 시간마저도 부족합니다. 정말 어떡해야 하나요?”
이디레이아가 미소지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요? 시간은 아직 있어요. 아까 텔리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잖아요. 이곳의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흐른답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안에 좋은 생각을 내보도록 하죠.”
시간이 있다는 여신의 말에 알렉시스는 텔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텔리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느긋하게 하라고 했잖아. 여기 멧돼지 신수의 접힌 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거든. 너가 뭘 연습하고 깨달으려고 하는지 몰라도 그 안에만 하면 돼.”
* * *
미스터 황은 하마터면 텔리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강원도 아저씨를 또 한 번 구하게 되자 다리에 맥이 풀려버렸다. 그가 가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또 왜 그러셨어요?”
“뭐가? 뭘 또 왜 그랬냐니?”
“텔리님한테 접근하셔서 말을 거셨잖아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신이라는 분은 너무 이상한 성격이어서 남을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고요. 누구든 너무 가까이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제발 접근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신령님이 아무 생각이 없으시긴! 온종일 요상한 담배 피우시는 것만 생각하고 계시잖아. 아주 골초야, 골초. 내 평생에 저렇게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처음 봐. 아, 맞다. 사람이 아니시지. 신령님이시지.”
좀 전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아저씨를 보고 미스터 황은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아저씨, 아까 제가 조금만 텔리님을 늦게 말렸더라면 아저씨 큰일 나실 뻔했어요. 아니, 도대체 왜 저 골초한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가 그렇게 얘기한다고 저분이 들으시겠어요?”
아저씨는 가방에서 짐을 빼다 말고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울 집사람이 몸이 안 좋아. 그런데 가까이에서 담배를 피우시니까 혹시 마누라가 담배 연기 마실까 봐, 그래서 그랬어.”
미스터 황이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아저씨가 그냥 객기를 부렸던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아... 사모님께서 그러셨군요. 전 몰랐어요.”
“실은 집사람이 몸이 많이 안 좋아. 그래도 살 수 있을 때까진 살아야 하잖아. 그 담배 연기 때문에 몇 분, 몇 초라도 삶이 짧아진다고 생각하니까.....”
아저씨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미스터 황은 사모가 늘 씩씩하게 남편에게 큰소리치길래 그녀가 큰 병을 앓고 있었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순간 그에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저씨, 제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요!”
“좋은 생각? 무슨 생각?”
“예. 쓰러져 있는 건수 친구에게 사용하는 그 조그맣고 희한한 물건이 있잖아요. 아저씨가 여기 숲속에서 발견하셨던 늑대 몸에서 나온 것 말이에요.”
“서양 신령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 카드 말하는 거야?”
“예. 그게 몸 아픈 데를 고치는 물건이라니까요. 사모님을 그걸로 치료해봐요!”
미스터 황은 그 말을 마치고 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텔리에게로 뛰어갔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