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 만월의 밤 - 35 화
만월의 밤 – 35
건수는 눈앞이 깜깜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사방이 칠흙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자기 손을 들어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암흑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난 두 팔이 그 붉은 끈에 묶여있었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군. 제대로 들어온 것 같군. 여긴 검은 방이야.”
그는 자신의 정신이 육체의 굴레를 벗어나 검은 방에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그는 목청을 돋워서 케르케로우스를 불렀다.
“케르케님! 저에요, 건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여기 들어왔어요. 케르케님! 어디 계세요?”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케르케로우스를 불렀다. 잠시 후, 그의 뺨에 정전기가 올랐다.
“아, 따거워. 정전기네. 이건 케르케로우스님이 신호야.”
건수는 오른쪽과 왼쪽 뺨 그리고 이마에 오르는 정전기 신호를 따라 케르케로우스가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꽤 오랫동안 걸은 끝에 그의 눈에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케르케로우스가 내는 빛이 분명했다.
“케르케님! 건수입니다! 거기 계시죠?”
건수는 그 불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 * *
건수가 빛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과연 그곳에는 케르케로우스가 엎드려 있었다. 그는 아직 어린 늑대의 모습이었다. 건수가 다가오자 그는 고개를 들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건수야.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무슨 일로 여기에 다 들어왔냐?”
건수는 달려오느라 숨이 찼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헉. 케르케님. 뭐가 오랜만이에요?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됐잖아요.”
“아냐. 내가 몸을 빨리 부활시키려고 여기 검은 방의 시간을 좀 빨리 만들어놨었어. 그러니까 내가 죽은 지 몇 백 년은 더 흘렀지.”
건수는 아직 어린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케르케로우스를 보고 깨달았다.
“예? 아..... 저희가 저번에 여기서 암흑 속에 갇혀있을 때처럼 시간을 빨리 돌리신 거군요? 빨리 육체를 성장시키시려고 하신 거네요. 며칠 전에 뵀었던 때보다는 더 성장하셨네요. 헉헉헉.”
“그렇지. 그런데 네 녀석은 뭐하러 여기 들어왔냐? 너가 들어오는 바람에 내가 시간을 다시 느리게 만들어야 했잖아.”
“그게... 헉헉. 말씀드릴 게 좀 있어서요. 여기 좀 앉아도 되죠?”
건수는 케르케로우스 앞에 털썩 앉더니 가쁘게 쉬던 숨을 좀 진정시켰다.
“그건 그렇고 케르케님, 여기 들어올 때 입구를 좀 계신 곳에서 가까운 데에 열어주시면 안 되나요? 왜 매번 오래 걸어야 하는 거죠?”
“하하하하! 이런 게으른 녀석. 운동도 되고 좋잖아?”
“하아.... 케르케님. 지금 전 육체에서 정신이 분리되어서 온 거잖아요. 몸도 없는데 무슨 운동이 됩니까?”
“쩝. 네 말이 맞네. 그런 상태로 움직여봤자 정신만 피로해지겠지.”
건수는 허술한 케르케로우스를 보고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여기 온 것은요......”
건수는 케르케로우스가 죽은 이후부터 방금 방에서 있었던 얘기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늑대에게 말해주었다. 케르케로우스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다가 중간에 한 번씩 하품도 하고 졸기도 하면서 겨우겨우 끝까지 다 들었다. 건수는 마지막 한 마디까지 얘기를 다 전했지만 졸린 눈을 하는 케르케로우스를 보고 영 못 미더웠는지 확인했다.
“그러니까 다 이해하신 것 맞죠?”
“하아아암. 그럼그럼. 그러니까 그 불새군에 반역 세력이 내게 투항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렇죠. 그래서 자기들의 우두머리인 릴리카를 배신하고 제거하겠다는 거예요. 바로 케르케님의 신뢰를 얻겠다는 거죠.”
“하아아아암. 사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꼭 릴리카를 배신하고 죽여야 할 필요도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그야 늙게 만들어서 죽게 하면 되지. 하하하...... 하암.”
건수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그 여자가 얼마나 잔인한 여자인지 말이에요. 지하창고에서 사람을 죽이는데..... 어휴. 너무 잔인하고 징그러워서 또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네요. 그들이 그녀에게 방금 케르케로우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도 귓등으로도 들을 여자가 아니에요.”
“난 진짜 날 그만 괴롭히기만 하면 불새군 전체에게 다시 엘리시움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어.”
“소용없어요. 그 여자는 오로지 케르케님을 해치는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더라고요. 응? 케르케님! 케르케님! 주무시는 거예요?”
건수는 눈을 감고 있는 케르케로우스를 보고 잠에서 깨웠다.
“아냐... 아냐. 안 졸았어. 눈만 감고 있었어. 정신 바짝 차리고 네 말을 다 듣고 있었어. 진짜야.”
건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로 케르케로우스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왜 자꾸 졸린 눈을 하고 계세요?”
“내 몸이 지금 막 성장기라서 그래. 조금만 더 성장하면 괜찮아질 텐데 말이야. 도무지 다른 자들이 내 몸이 다 자랄 때까지 날 기다려주지들 않아. 다 성장하기도 전에 모두 여기저기서 나타나서 날 공격한다니까.”
그 말을 듣고 건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요. 그때 텔리님이 케르케님을 해치신 건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었어요. 아니, 자기가 알렉시스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케르케로우스는 나른한 얼굴을 하고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난 이해해. 그도 신이니까 자기가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었을 뿐이잖아.”
“아니, 남에게 피해를 줘도 말이에요? 자기의 그런 황당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줘도 된단 말씀이세요?”
“응. 우리 세계의 신과 신수들은 다 그래. 자기들밖에 몰라. 나도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 이해가 안 갈 때도 있긴 한데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텔리의 경우는 진짜 이해해주고 싶어. 일단 신이란 건 말이야. 절대 자기가 한 말을 지켜야 하거든? 그걸 못 지키면 그가 가진 신의 자격이 사라지는 거야. 그래서 우린 처음 신이 될 때 ‘절대 약속을 지키겠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맹세도 하거든. 그걸 깨면 신이 될 수 없는 거야.”
건수는 거기까지는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요. 왜 텔리님은 알렉시스와 그런 약속을 하셨던 거에요? 다른 신을 죽이겠다는 약속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 하하하하!”
케르케로우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몸을 데굴데굴 굴러대며 웃었다.
“그야 텔리로서는 그게 당연하지! 그는 살육의 신인데 늘 머릿속에 남을 죽이는 것만 생각하는 자니까. 하하하. 이거, 지구인을 사제로 만들었더니 너무 재밌네. 하하하!”
“아..... 살육의 신이시니까.... 쩝. 그래도 그렇지... 어휴.”
“하하하하. 그렇게 당연한 걸 몰랐냐?”
건수는 계속 웃으며 데굴데굴 구르는 케르케로우스를 보고 기분이 상했는지 투덜거렸다.
“아니, 모를 수도 있죠. 제가 어디 엘리시움 출신도 아니고요. 그곳엔 발이라도 한 번 들여본 적도 없는데.”
“응?”
케르케로우스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다시 제대로 배를 바닥에 엎드려 누워서 건수를 쳐다봤다.
“왜? 너 엘리시움에 가보고 싶은 거냐?”
그 말을 듣고 건수는 아차 싶었다. 세상에 제일 하기 싫은 일이 바로 엘리시움에 가는 것이었는데 방금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케르케로우스는 자기가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뇨! 아뇨! 아뇨! 절대로 싫어요! 절대로 절대로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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