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Next step
회귀 후 인간관계가 극도로 좁아졌다.
“사장님. 친구 오상욱이란 분이 또 전화하셨습니다. 좋은 투자처가 있다는데... 아무래도 사기 같습니다. 조사할까요?”
“됐어요. 무시할거예요. 적당히 시간만 끌며 응대해주세요.”
“네.”
돌아서는 비서를 보며 오상욱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내렸다.
돈이 없어봐야, 돈이 많아봐야, 상대의 밑바닥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오상욱은 내가 망했을 때 격하게 날 물어뜯으며 즐긴 놈이고, 내가 돈이 많으니 격하게 달라붙으려는 놈이다.
오상욱 같은 인간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꼴을 수없이 봤으니 인간관계가 좁아질 수밖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열고 싶지가 않다.
“오빠 땅콩 줄까?”
“어.”
애플과 한창 전쟁 중인 3월의 어느 날, 쇼파에 앉은 예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땅콩을 받아먹었다.
ㄷ자 쇼파 옆면엔 닥똥커플이 나란히 앉아 속닥이고, 반대면엔 가오리 혼자 넓게 누워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수골 가오리네 집.
모든 종류 게임기와 온갖 만화책과 애니 씨디가 가득한 놀이방.
누군가 본다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덕후라고 칭하지 않을까.
티비를 보며 다들 하고 싶은 거 하는 시간.
“언니 결혼 준비는 끝났어요?”
예하의 물음에 닥똥은 한숨을 셨고, 길영주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해. 시간이 지날수록 할 일이 계속 생겨.”
“계속 맘을 바꾸니까 그렇지.”
“그럼 어떡해. 더 좋은 게 보이는데.”
“적당히 맞춰서 하면 되지 않아?”
“한번 뿐인 결혼인데 어떻게 그래? 나 혼자 결혼해? 왜 이렇게 무관심해.”
저 커플은 매일 싸운다.
결혼생활의 기쁨은 결혼하자고 말하는 순간까지이며 결혼준비를 시작하는 순간 인생의 무덤에 들어간다더니.
닥똥이를 위해 전쟁을 끝내주자.
“닥똥아 영국은 어때?”
“좋지. 콜체스터의 프리미어 승격은 거의 확실해. 너 시발. 엘랑 홀란이 그렇게 잘할 줄 어떻게 알았냐?”
“후후훗. 투자자의 눈이란 거지. 자 받어.”
“뭔데?”
선수 이름 20여개가 적힌 종이를 건네줬다.
한가할 때마다 유럽의 선수 이름을 하나씩 읽으며 기억나는 이름을 체크해서 건네줬다.
열다섯 아이도 있고 스무네살 무명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얼굴인데 몸값이 싸면 무조건 이득이겠지.
“무려 열흘이나 걸쳐서 조사한 거다.”
“오올. 얘들이 다 홀란만큼 해주려나?”
“모르지. 홀란급은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손해는 없을 거야.”
“오케이. 각자 개인 트레이너 붙여서 빡세게 관리해도 손해 없다는 거지?”
“어.”
선수 판매로 매년 5000억 원 정도 벌자.
큰돈은 아니지만, 심심할 때 조사하는 걸로 그 정도 벌면 꽤 짭짤하잖아.
“이러면 선수단이 너무 커지는데.”
“구단 몇 개 더 인수하든지. 스위스나 벨기에나 이탈리아 등으로. 이탈리아는 가난하니까 쉽게 살 수 있겠네.”
“알았어. 본사에 문서 넣을게.”
“그래.”
몇 개 더 사도 광고비용으로 본전치기는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야구단은 그냥 쭉 갈래? 손해가 크잖아.”
영국의 축구팀은 돈을 확실하게 벌어주지만, 한국의 야구팀은 다르다.
광고효과가 있지만, 눈에 보이는 효과가 아니니.
“얼마 하지도 않은데 뭘. 선수들은 잘 하냐?”
“어. 올해는 4강 갈 수 있을 듯. 니가 찍은 유망주들도 엄청 괜찮고.”
“흐흐흐.”
“다만 1순위가 좀 이상해.”
“어? 누구였지?”
“나선인. 평가로는 전체 48순위인데 우리가 2차 1라운더로 뽑았지. 문제는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고 유리몸에 매우 게을러. 물론 니가 강력 추천했으니까 이유가 있겠지마는......”
특별하지 않다고?
엄청 강력한 기억인데.
이상하네.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티비의 뉴스소리가 고막에 파고들었다.
-한편 빙상협회는 이번 구타 가혹행위 성폭행 사건에 대해 모두 무혐의 결정을 내려 만인의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아.
나선인.
그놈이구나.
“아시발.”
“뭐시발?”
“개시발.”
“왜시발아.”
나와 닥똥의 진심어린 대화에 예하와 길영주가 만취자 보듯 봤다. 그만해야겠다.
“야...... 나선인 계약했지?”
“어. 계약금 4억에 5년간 연봉 5억으로.”
“하아. 아니다. 음.”
나선인이 왜 기억나는지 알겠다.
1년차 고졸이 선발승을 거둬서 유명해진 순간 학폭의혹이 불거졌고, 중고등학교때 후배를 구타 고문한 미친놈이란 게 알려졌다.
심지어 중학교 때 심한 고문으로 실명한 피해자까지 있었는데 경찰서장인 아비가 무마해서 더 큰 분노를 자아냈다.
여기에 전혀 반성하지 않은 태도로 전국민의 공분을 사고 감옥에 간 미친놈이었다.
충격적인 일 덕분에 이름이 깊게 새겨졌구나.
“나선인... 이놈 제보 들은 게 있는데 학폭으로 유명했던 놈이야.”
“뭐시발?”
“미안시발.”
“늦게 제보 받았냐...... 어쩔 건데.”
“일단 사실확인부터. 미래신문에 말해서 나선인 뒷조사 시킬게. 아니다. 이왕하는 거 다 하자. 우리만 엿 될 수 없지. 모든 야구인을 뒷조사한다.”
“그래... 우리만 엿 될 수 없지.”
“철저히 조사하고 선수에게 알려서 피해자가 100% 만족하는 보상을 하게 만들어. 합의 못하면 퇴출. 그 담에 터트리자. 어차피 언젠간 터질 일이니까.”
“그러게. 운동부에선 구타 가혹행위가 생활화되어 있으니 걸릴 놈 많겠지.”
“모든 선수가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구타 가혹행위를 즐기는 선수 코치 감독을 조지면 올바른 사람만 남아 더 좋아지겠지.”
“최소한 다음 대엔 구타 가혹행위가 줄어들 거고. 니가 원하는 게 이런 거지?”
“당연하죠. 울 오빠는 미래를 생각해요. 얼마나 착한대요.”
착하네 예하. 나도 모르는 날 안단 말이야?
“뭐... 그런 거지.”
“알았어. 일단은 모른 척 할게 조사내용 나오면 말해줘.”
“그래. 이왕 시작한 거 야구를 시작으로 모든 스포츠 다 하자. 저봐 저봐.”
티비엔 미성년자 강간범이 끌려가고 있다.
무려 국대팀 코치다.
“저런 새끼 다 조지면 체육인 절반이 사라지겠지?”
“대신 옳은 일을 한 사람이 옳은 자리를 찾아가겠지.”
곰팡이 낀 귤이 윗자리를 차지하면 자신의 자리를 썩은 귤에게 물려준다.
부패는 우성유전.
국대팀 코치가 3년 전에 미성년자인 선수를 강간했는데, 협회 윗대가리들은 사건을 덮고, 피해당한 여선수를 매장했었다.
3년 만에 밝혀진 진실.
왜 그랬을까?
자기들도 그랬으니까.
부패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청렴한 자가 차지하는 걸 막는다.
청렴한 후임이 개혁하면 자기가 위험하니까.
구타 가혹행위를 하던 이가 윗대가리에 오르면 후임으로 구타 가혹행위를 즐기던 자를 선임한다.
“되물림의 사슬을 끊어야 해. 구타 가혹행위 하던 선수가 감독이 되면 똑같이 해. 또한 선수들에게 구타 가혹행위를 유도하지. 그래야 자기만 나쁜놈이 되는 일이 없으니까.”
부패한 귤 하나가 상자 속 모든 멀쩡한 귤을 썩게 만든다.
“전부 조져. 다 조져.”
“그래. 니 돈인데 막 써야지. 수백억 들겠네.”
“흥신소 아저씨들도 일 해야지. 다 조져.”
“그래.”
챙.
맥주병을 마주쳤다.
썩은 귤을 걷어내자.
여자배구계 폭로가 언제였더라.
이번엔 좀 더 빨리 박살나겠네.
“그러면 올림픽 성적 박살나지 않을까?”
가오리가 헛소리를 했다.
“그러니 니가 여친이 없는 거야.”
“성과주의.”
“못됐어.”
“나빴어.”
네 명의 집중포화.
“아니. 그게 아니라 실력 있는 선수도 학폭에 걸려서 은퇴하게 될 거 같아서.”
“무슨 상관?”
“쓰레기라도 실력 좋으면 봐주자고?”
“구타 가혹행위 성범죄를 눈감자고요?”
“나빴어.”
4:1이다.
“끵.”
“시끄러. 뭘 잘했다고 웃어?”
“안 웃었는데. 그냥 얼굴이 웃는 가오리 상인데.”
“시끄러. 고개 숙여. 어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이 동그래서 동그란건데. 끵.”
아 치유된다.
우울할 땐 친구를 물어뜯으면 치료효과가 있다.
푸흡.
의외로 길영주씨가 웃었다.
“왜?”
“아니.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친구랑 노는 거 보면 참 유치해서.”
“흥. 너도 똑같아질걸.”
“헐...... 끔찍하다.”
“언니. 포기하면 편해요.”
뭘 포기해? 뭘?
크고 안락한 쇼파에 최대한 편하게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하고 싶은 아무 말 하는 시간.
뇌에서 생각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예하와 길영주씨도 조금씩 이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고.
“오빠들은 정말 사이가 좋은 거 같아. 나도 오빠들 같은 친구들 있으면 좋겠는데.”
예하가 얼굴을 바싹 붙이고 속닥였다.
“트비스타 있잖아. 요즘 잘 지내더만. 매일 연락하고.”
“그래도 언니들은... 모르겠어. 느낌이 좀 달라 힝.”
미래그룹의 힘을 생각해서 다가오고 과하게 친절한 거겠지.
그 느낌을 예하가 받지 못했을 리 없다.
“늦었어.”
“어? 뭐가?”
“이런 관계는 지금 만들 수 없어. 부모 욕 빼고 모든 게 허용되는 관계는... 음... 아무 생각 없는 초중고 때 형성되지 않을까. 그 이후엔... 보험팔이용 인맥이고.”
“힝. 난 끝난 건가. 잘 못 살았어. 다시 태어나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슬퍼하는 예하를 가만히 안아줬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예하야 늦지 않았어. 저거 핸플놈의 허세야.”
“핸플 너어는 나빴다.”
갑자기 날 물어뜯네.
“아니 내가 뭐? 사실이잖아.”
“시끄러. 꿈도 희망도 모르는 놈.”
“나빴다.”
“핸플 바지벗고 손들고 있어.”
“음. 오빠가 나빴던 듯.”
예하. 너마저.
“어머어머. 예하야. 반지 없어?”
길영주씨 잠깐만.
“네? 반지는...”
“와아. 세계 최고의 부자씨. 여친한테 반지도 안 사줬어?”
“예하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와아. 그걸 그렇게 알아들었단 말이야? 사람이가?”
“핸플이 나빴네.”
“나도 우리 영주한테 반지 사줬는데.”
“넌 결혼하니까 당연하지.”
“시끄러 죄인. 죄인은 주리를 받으라.”
“오라 아니냐?”
“표적이 누군지 생각해! 명확한 주제의식!”
“맞네. 죄인놈아 오라를 틀어라.”
아 정신없어.
“산다! 예하야. 커플링 맞추러 가자.”
“에에? 괜찮아. 오빠. 난 정말...”
“아몰라 사줄거야. 그래. 서프라이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 반지 사줄게. 아주 손에 모래주머니 차듯 무거운 반지 맞춰주마.”
“진짜 필요 없대두우우우.”
하는 예하의 입꼬리가 올라가있다.
가오리 닥똥과 술을 마시면 늘상 이렇게 흘러가지.
- 작가의말
나선인은 95화에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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