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세이셀 휴가2
“오빠, 할 말 있으니까 여기 앉아.”
루비가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컴히어 프리티보이~”
핀빙빙이 자기 옆을 탁탁 쳤고.
“여기 앉으랍니다. 예쁜 남자.”
공은진은 그걸 또 통역하고 앉았다.
“우와. 언니. 너무해. 우리 같은 그룹 준비했었잖아. 난 아예 안보이나 봐! 빙빙 언니도!”
예하가 오랜만에 화냈다.
이건 화낼 만 하지.
일단 공은진에게 말했다.
“공비서님. 휴가 왔으니 통역일 하지 않아도 돼요. 휴가잖아요.”
“아뇨. 전 대화하고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의 가교로 같이 대화.”
그러시다면야.
예하가 루비에게 가 진짜 화를 내자 루비가 난처해하면서 예하의 허리를 안고 아양을 떨었다.
그 사이 핀빙빙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날 끌어앉혔다.
“우와. 언니. 너무해.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
예하야 너 캐릭터 깨지는데?
테이블 위엔 감바스와 빵, 소고기 스테이크와 김치찌개(?) 등 안주가 있고, 위스키와 향 좋은 칵테일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핀빙빙 옆에 앉으니 호텔 안에서 서버가 살얼음이 껴있는 칵테일을 가져다줬다.
복숭아 맛인가.
달다.
“뭐하고 있었어요?”
“어느 위인의 영웅담. 내 생명의 은인 얘기를 하니까 핀빙빙도 자기 생명의 은인 얘기를 하더라.”
루비의 표정이 묘해졌다.
핀빙빙도. 공은진도.
공은진씨는 왜 저러지.
“아. 울 오빠 얘기? 나도 오빠가 구해줬는데.”
“어라. 우리 모두 공통점이 있네. 은인께 감사하며 다 같이 한 모금.”
여자 넷이 일치단결해 칵테일잔을 들어올렸다.
공은진씨는 저기 왜 끼는 건데.
“아. 오빠아~ 같이 마시자.”
“민망하게 내가 어떻게 끼냐? 그만 해.”
민망해 죽을 것 같다.
극단적 비난도 싫지만, 이런 극단적 찬양도 싫어.
“그리고 영입하고 있었지. 심심하다고 해서 미래스쿨 선생으로 꼬시고 있었어.”
루비가 말하면 공은진은 모든 대화를 핀빙빙에게 전해주고 있다.
공식적으로 휴가지만, 자기 스스로 통역을 자처하는 중.
탑스타 핀빙빙과 친해질 계기인데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핀빙빙은 아직 숨겨야 해요. 중국하고 어느 정도 해결 본 다음에 밖에 나와야 해요.”
망명(이라 읽고 목숨 건 탈출)을 한 핀빙빙은 아직 공식활동을 할 수 없다.
뉴욕에서 숨어살던 핀빙빙이 우울증에 죽을까봐 세이셀 여행에 불렀는데 오는데도 CIA와 미국 외교부의 허가와 호위를 받아야 했다.
“난 언제까지 숨어있어야 해? 중국에도 메신저 퍼졌으니 된 거 아냐?”
핀빙빙이 물었다.
“빙빙이 나서면 중국 공산당이 규제를 시작할 테니 조금 기다려요. 좋은 시기가 올 거에요.”
“언제까지?”
“그......”
미래의 말을 해야 하나.
그대로 하면 미친놈이 될 테고, 이걸 어떻게 멋지게 포장해야 하나.
“내가 주역과 천문을 보건데 노란 강물이 다시 흐를 때 그날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딱 이 정도가 좋겠군.
적당히 멋있고 간지 넘치는 예언.
공은진의 통역을 들은 핀빙빙이 말했다.
“황하는 항상 흐르는데. 항상 노란색이야.”
......
통역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나보네.
노란 우산이 흐른다고 하면 너무 구체적이려나.
나중에 실제 발생하면 나보고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테고.
굳이 말한다고 좋아질 것도 없겠지.
“조금만 참아 봐요. 여름이 되기 전에 밝은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 해줄게요.”
“하아. 솔직히 방에만 갇혀 사니 힘들긴 한데. 버텨야지. 그게 구해준 사람에 대한 예의지.”
“많이 힘들어요?”
“방 밖에 나가는 건 아예 불가능 하니까. 누구와 연락할 수도 부를 수도 없고. 혼자 인터넷으로 뉴스 읽고 쇼핑하고 그러다보면 그냥 끔찍한 기억만 계속 떠오르고. 연락 할 수 없는 엄마가 무슨 일을 당했나 걱정되고.”
“혼자 있으면... 끔찍하겠네요. 일단 가족부터 안전하게 빼내야 할 텐데. 계획을 세워보죠. 음. 이건 CIA랑 공조해야겠는데. 1년 안에 다 잘 풀릴 테니 마음 편히 놀아요. 재충전하는 휴가다 생각하고 맘 편히.”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고 있다.
서로 관세를 메겼고,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탈출해 인도와 베트남등 주변국에 자금이 몰리는 등 국제 정세를 바꿀 정도.
거기서 핀빙빙이 중요한 키가 될 수 있다.
“자꾸... 나한테 해주려고 하지마. 미국에 또 뭘 퍼줘야 할 거 아냐? 목숨 구해준 것만으로 고마워.”
“... 알고 있었어요?”
“공짜 점심은 없다는 건 알지.”
“저도 딱히 손해 볼 게 없어서 하는 일이예요. 내 전 재산 바쳐야 하면 안 하지.”
나란히 앉은 핀빙빙과 말을 마치며 앞을 보니 예하가 껄쩍미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왜?”
“아니. 오빠가 좋은 일 하는 거 아는데. 아니까 암 말도 못하겠는데. 그런데... 빙빙언니 너무 예쁘고. 또......”
“에휴. 빙빙 서른여덟이야. 앗 공은지씨 이거 통역 하지 마요. 나랑 열네살 차이. 울엄마랑 빙빙이랑 열한살 차이.”
“아.”
예하의 표정이 막힌 속이 뻥 뚫린 듯 해맑아졌다.
“그리고 니가 천배 더 예뻐. 걱정마.”
“으히익! 이 싸람들 진짜.”
루비가 질색하며 팔을 쓸었다.
핀빙빙이 공은지한테 뭔데 뭔데 하니까 공은지는 또 그걸 통역해주고 있고.
“우우우~”
서른여덟 핀빙빙이 야유를 보내는데 귀엽다.
5년 연속 중국여자 연예인 수익 1위에 빛나는 미모.
살이 꽤나 빠졌지만 여전히 예쁘다.
후두두두.
비가 온다.
이 시기는 우기라 비가 자주 온다고 한다.
정자 비슷한 야외 테이블이 빗소리에 잠기고 바닥에 부딪쳐 흩날리는 작은 물방울이 호텔에서 넘어오는 불빛을 몽실몽실 뭉갰다.
“운치있네.”
루비가 자기의 칵테일잔을 들고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저 쪽에 예하 혼자 앉아있다.
“언니?”
“호텔 쪽 풍경이 보고 싶어서.”
“아이. 언니. 진짜.”
“잠깐만 빌려줘. 잘 땐 돌려줄게.”
하며 루비가 내 허리를 팔로 감는다.
남자냐?
내가 여자역이야?
“... 뭐하슈.”
“그냥. 잠깐 이러고 있을게.”
허리를 감은 팔이 앙상하다.
억지로 밥을 먹고 있다는데 여전히 비쩍 말라있다.
핑빙빙이 눈치를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했다.
내 허리를 교차해 감은 두개의 앙상한 팔.
“이모는 뭐하슈?”
이모란 말을 공은진이 순화해서 통역했는지 발끈하지 않는다.
“나도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딴 마음은 없어.”
내 허리를 감은 핀빙빙이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빤히 쳐다봤다.
솔직히 핀빙빙은 예쁘다.
나이가 있음에도 예하에 거의 근접한 외모.
안쓰러운 마음에 자꾸 신경 쓰이기도 하고.
위험한데.
예하가 칵테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턱에 손바닥을 대며 날 빤히 바라본다.
그 표정은 평화롭다.
“화 안내?”
“그냥. 숙명이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질투해봤자 좋은 모습도 아닐 테고.”
“그래.”
투투투투.
“오빠가 멋있어서 그런 거니까 다 괜찮아.”
......
에라 모르겠다.
막장드라마는 현실을 못 이기지.
거세게 쏟아지던 비는 딱 10분가량 내리더니 그쳤다.
강하게 지면과 부딪쳐 솜사탕 실처럼 피어오르던 안개방울이 금세 사라지고, 호텔에서 넘어오는 빛이 또렷해졌다.
“끝.”
마법이 풀린 듯 루비가 팔을 풀고 내 등을 톡톡 친다.
“예하야 반납할게. 충전 다 됐어.”
“...... 뭔 생각인지 모르겠네. 예하야 그만 먹고 들어가자.”
“에? 술 더 먹고 싶은데.”
“그럼 나 혼자 들어갈까?”
“아니 가자. 같이. 언니들 내일 봐~”
예하의 손을 잡고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다행히 잡지 않았다.
핀빙빙과 루비 둘이 잔을 들며 뭐라 말할 뿐이다.
살짝 아쉽군.
따라 들어왔으면...
호텔에 들어가 격렬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아까 좀 많이 야릇했다.
“어제, 언니들 생각했지?”
뜨끔.
“아닌데? 너한테 미안해서 위로해 준건데?”
“후헤헤. 나한테 왜 미안해. 잘못은 언니들이 했지.”
착하다 예하.
사람이 너무 똑똑한 것도 매력 없더라고.
통유리 창밖을 보며 비 내리는 바다를 본다.
가끔 고래가 뿌우 하고, 백사장에 거북이들이 기어가는 걸 답답해서 숨 참으며 보고, 상어 등지느러미가 두둥 두둥 할 때마다 우와우와하며 하루를 보냈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관광은 싫어.
이게 진짜 휴가지.
예하를 안고 있다가 필 받으면 하고, 배고프면 룸서비스 시키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핸드폰으로 웹툰보고, 예하의 노래를 들으면 거기가 천국이다.
“저녁은 뭐 먹을까?”
“어머니들하고 먹기로 했어.”
“어머니들? 아.”
하지혜의 부모님, 김유현의 어머니.
리조트 관리에 슬슬 적응하시는 분들.
음식이 준비된 룸에 들어가니 어머니들과 채인수가 먼저 앉아있었다.
“어? 늦었네요.”
“힝 죄송해요. 제가 준비가 늦어서.”
“아뇨. 아니. 괜찮아요. 괜찮아. 앉아요.”
어머니들의 환영을 받으며 앉았고, 타우바트 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했다.
천천히 먹다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채인수가 입을 열었다.
“조승학 확보에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제그룹을 무너뜨린 후부터 전화와 메일로 비밀이야기를 자제했다.
국정원에서 마음먹고 도청, 감청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건물과 집 주변에서 기자가 아닌듯한 수상한 이를 꽤 많이 발견했다.
미래쇼핑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미래쇼핑 출시 이후론 세계 각국의 정보원이 붙어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간의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전관예우를 써서 조승학을 산골 정신병원에 보냈습니다. 70대 수위 두 명뿐인 곳에 보냈죠. 한고그룹 정회장이 일본에서 탈옥한 것처럼 빼내서 필리핀에 보내려 했습니다. 곧장 사라지면 저희가 의심받을까봐 한 달 간 그냥 두려 했고, 일을 치른 후 문제가 생길까봐 감시자도 철수했는데 사라졌습니다.”
조승학을 생각하자 다시 울화가 치솟은 지혜아빠가 물었다.
“혼자 탈출했단 말입니까?”
“조심히 알아본바 누군가 빼냈습니다. 다만 흔적이 없습니다. 백제와 관련이 있는 재계 인물이거나... 국정원이거나... 현재로썬 오리무중입니다. 죄송합니다.”
“됐어요. 그만해요.”
지혜엄마가 말했다.
“충분해요. 미쳤다면서요? 미치고 얼굴 다리 굽고. 그거면 됐어요. 지금까지 해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너무 고마워요. 그러니 위험한 일 하지 않으셔도 돼요.”
“맞아요. 충분히 고마워요.”
“맞아맞아. 오빠. 위험해. 이만하면 됐어. 충분히 벌 줬어.”
유현엄마도 예하도 그만 하자고 한다.
채인수는 말없이 내 얼굴만 봤다.
조승학.
킬더 조승학.
타우바트 섬에 소세지 기계를 사 놨는데.
산 채로 갈아버리려고 했는데.
그놈에 대한 분노가 회귀하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김유현의 어머니가 말했다.
“복수에 끝은 없어요. 억울하게 죽은 제 아들을 생각하면 충분한 복수란 영원히 없을 거예요. 모든 군간부, 모든 법조계, 모든 백제 임원을 다 죽여도 그 슬픔이 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러니까 충분해요. 저도 지혜엄마랑 웃고 떠들며 즐겁게 여생을 살 거예요. 아들을, 딸을 기리며 대신해서 즐겁게 살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해요. 이만하면 됐어요.”
그런 것이었나.
유현엄마와 지혜엄마의 표정이 예전보다 한결 나아 보인다.
대신 사는 삶.
그런다고 슬프지 않을 리 없겠지만.
“그래요. 딱히 찾지는 않고, 찾더라도 검찰에 넘길게요.”
내 선언에 예하와 채인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술을 따르고 건배사 없이 다 같이 한잔 했다.
채인수가 안주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김유현군의 재판은 반년 안에 끝날 겁니다. 최소 20명의 관련자가 감옥에 갈 것이고요. 다만 김유현군이 대리 군 생활을 했다는 건 지울 수 없습니다.”
“감당해야죠. 제 아들이 잘못한 건데. 물론 이 어미 편히 살라고 빚값아 준 거지만. 흑.”
에휴.
이젠 됐다더니 또 저러시네.
채인수가 지혜아빠를 보며 말했다.
“영상 속 목소리, 조승학과 함께 있던 마영훈과 길훈재의 죄를 파냈습니다. 자료를 보내 자수하라고 했고, 상대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몇 달 안에 두 놈이 자수하면 최소 20년 형을 받게 될 겁니다.”
“잘 됐군요. 좋군요. 좋아요.”
지혜 아빠가 중얼거리는데 좋다는 말이 너무도 씁쓸하게 들렸다.
그때부터 대화가 사라졌다.
각자 말없이 잔만 채우고 마시고.
한참 술을 마셨는데 안주는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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