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진인
세월은 유수와 같아 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딸을 가지고 싶어 천살이 부단히 노력했지만 하늘이 천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원도 이럴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효는 호매령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열네살때 장원급제하여 임관을 하였는데 한림원의 검토가 되었다. 부친의 후광을 입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천효와 대담을 해본 자들은 단지 헛소문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둘째인 천화는 화산의 제자가 되었다. 조자운을 사부로 모신 천화는 다음대 화산 장문인의 유력한 경쟁자이다. 특히 열두살 때 창안한 무력검법(無力劍法)은 천살마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대단했다. 다만 천화만 무력검법이라 부르고 화산의 다른 사람들은 전부 매향검법(梅香劍法)이라 불렀다.
당무영은 황제의 명으로 삼년간 황제의 호위무사로 지냈다. 삼년의 시간동안 충성심이 검증된 자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황제를 호위하는 보천위(保天衛)를 만들어냈다. 보통 위는 오천육백명이 한개 위이다. 금의위처럼 수만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천위처럼 서른도 안되는 경우는 처음이다.
주체의 형제중 하나인 주부는 조카인 주윤문에 의해 삭번당해 구금되었다. 그러다 주체가 정난지변을 일으켜 황위를 차지한 후 다시 제왕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야심을 버리지 않고 살수들을 키웠는데 늙어서 노망이 났는지 아니면 죽기전에 황제가 되어 보려고 했는지 살수들을 파견하여 황제인 주첨기를 암살하려 했다.
당무영과 보천위는 살수들을 가볍게 처리하였고 일부러 하나 놓아준 뒤 당무영이 홀로 뒤를 따랐다. 청주의 제왕부(齊王府)까지 쫓아간 당무영은 하룻밤 사이에 제왕부의 모든 살수들을 암살했다. 죽은 자들이 어떠한 외상도 없이 죽어버려서 당무영에게는 무향암왕(無香暗王)이라는 별호가 생겼다. 피냄새도 없는 은밀한 살행에 황제가 직접 지어준 별호이다. 간접적으로 황제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셈이다.
주부는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키운 살수들이 대부분 죽자 놀라서 쓰러졌고 며칠 안 되어 세상을 하직했다. 삼년의 시간이 차자 당무영은 당문으로 돌아가서 가주가 되었다. 황제의 후광과 천살과의 친분 그리고 모용가와의 혈맹으로 당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천양은 끙 하고 신음을 냈다. 신기영(神機營)의 훈련장에서 새로운 화포의 위력시험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느낌상 세번째 화포가 가장 아팠소. 그리고 다섯번째 화포의 포알이 가장 빨랐소."
고천양은 화포에 직접 맞아본 소감을 이야기 했다. 천살이 삼십만 대군을 홀로 제압한 일이 널리 퍼진 후 황제는 과감히 군대의 숫자를 줄이고 정예화를 시도했다. 그 절약된 군비의 일부로 천살의 환심을 사고 유사시에 천살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편 천살과 같이 인간을 초월한 자들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고 그중에 하나가 화포였다. 하지만 화포로 고천양마저 어쩔 수 없자 단념하고 순수하게 군사적인 목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기마병을 상대할 빠른 화포와 보병을 상대할 위력이 강한 화포를 고천양의 도움을 받아 연구하고 있다.
천살은 호매령과 함께 화산을 찾았다. 매년 화산에 있는 천화를 보러 화산을 방문하기에 예년과 다름없는 일정이었다. 다만 화산에 도착한지 며칠이 되지 않아 천살은 홀로 화산을 떠나 무당으로 향했다. 무당에 도착한 천살은 허락을 받지 않고 장삼풍의 우화동으로 향했다.
우화동은 장삼풍이 우화등선해서 유명해진 동굴로 그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평소에 한두명의 제자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외에 굳이 찾는 사람들도 없다. 그리고 사람이 있다고 해도 천살이 마음을 먹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송운자라고 해도 말이다.
바닥에 씌여진 천살성하범(天煞星下凡)이라는 다섯글자를 천살은 처음으로 확인해 본다. 일부는 검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라 하고 일부는 손가락으로 썼다고 했다. 검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글자들이 아주 매끄럽게 씌였기 때문이고 손가락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획의 변화가 매우 유려했기 때문이다.
'심검으로 쓴 것이구나.'
천살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는 그저 마음이 움직이자 바닥에 글이 나타난 것이다. 한글자 한글자 바닥에 적은게 아니라 다섯글자가 한순간 바닥에 나타났다. 장삼풍의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에 말이다. 천살성 세글자를 되뇌이던 천살은 하범 두글자를 입밖으로 소리내어 읽었다.
책에서 묘사하기를 신선이 나타날 때 바닥에 안개가 깔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구름위에 무지개색 후광을 뒤에 인 신선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고 했다. 만약 책의 묘사가 정확하다면 장삼풍은 매우 검소한 신선임에 틀림없다. 천살이 하범 두글자를 소리내어 읽자 흰색 도포를 입은 장삼풍이 그저 나타났다.
"후배 천살이 삼풍진인께 인사 올립니다."
장삼풍은 하늘을 찌르는 거목들이 가득한 수림속에 부는 산들바람 같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지만 그 존재는 시원함을 통해 확실하게 느껴진다. 장삼풍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천살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대견하오. 일겁을 홀로 감당하셨소."
천살은 장삼풍의 칭찬을 하는 영문을 몰랐다. 장삼풍은 천살의 의문을 알고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자네의 몸에 강림한 천살성은 인간들이 천살마성이라 이름 지었소. 천살마기라고 불리운 이 기운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기운이오. 태초에 이 세상에는 혼돈만 가득했소. 가장 큰 혼돈속에 잉태된 이 기운이 혼돈을 벗어나자 혼돈은 질서가 되었소."
혼돈속에서 태어난 기운은 혼돈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이 기운이 혼돈을 벗어나면 핵을 잃은 혼돈은 질서가 되었다. 혼돈을 벗어난 이 기운은 세상에 흩어졌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혼돈속에 모였다. 이 기운이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할 수록 혼돈이 적어지고 질서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질서가 생기자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혼돈을 벗어난 기운은 어느 순간 생명체에 깃들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생명체 자체가 질서보다 혼돈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돈의 존재요. 그렇기에 인간은 단체를 이루고 사회를 이루면서 질서를 만들려고 하오. 혼돈은 질서를 향망(向望)하고 질서는 혼돈으로 회귀하려 하오."
기운은 어느 순간부터 혼돈을 벗어난 즉시 생명체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의 큰 흐름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해서는 장삼풍도 명확한 견해가 없었다. 다만 이 기운이 혼돈을 벗어나서 세상에 흩어지면 큰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고 생명체에 깃드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이 기운을 품은 자가 일찍 죽으면 제대로 뭉치지 못한 기운이 세상에 퍼져 큰 혼란을 낳소. 이 기운들이 수많은 혼돈속으로 흩어지고 혼돈들은 서로 이 기운을 빼앗으려고 싸우게 되오. 이 기운을 충분히 모으면 혼돈은 질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오. 그 과정에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들이 스러지는 것이오."
기운이 어느 정도 뭉친뒤에 죽으면 기운이 흩어지기보다 뭉쳐있기 때문에 그 피해가 매우 작아진다. 그래서 천살마성을 품은 자는 일찍 죽으면 안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혼돈이 가득할 때 인간들은 큰 힘이 없었소. 하지만 세상에 수많은 질서들이 생겼고 그중 일부 질서를 인간들이 감지해냈소. 그래서 인간들이 도술도 익히고 내공도 익힐 수 있는 것이오."
혼돈일 때는 확정된 것이 없다. 법칙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운 덕분에 점차 질서가 많아졌고 인간들은 그중 일부 질서를 알아냈다. 그래서 내공심법을 만들어냈고 여러가지 술법들이 생긴 것이다.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련을 하면 내공이 모이고 그 내공을 사용해서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법칙'이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천살마기를 일원으로 만들고 남은 한조각마저 소멸시킨 것은 잘못한 것이 아닙니까?"
천살의 말에 장삼풍은 고개를 저었다.
"그 기운이 계속 존재했다면 이 세상의 모든 혼돈이 사라지고 질서만 남았을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그다음 순서는 무엇일 것 같소?"
세상의 거대한 혼돈이 사라지면 남은 혼돈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이다.
"도가에서 자연을 강조하는데 솔직히 나무도 생명이고 혼돈이오.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은 인간을 제외한 이 세상을 말하는게 아니라 모든 본능을 가진 생명체를 제외한 세상이오."
큰 혼돈이 모두 사라지면 천살마기라 불리운 기운은 작은 혼돈들을 소멸시킬 것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와 불가에서 말하는 공(空), 이는 궁극의 경지요. 이 경지안에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들이 포함되지 않소."
혼돈의 반대편인 질서는 도가에서 말하는 무와 불가에서 말하는 공과 같다. 즉 세상에서 질서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면 이 세상은 무와 공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모든 생명이 사라지고 절대적 질서가 이루어진 후 그 질서가 일순간 혼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혼돈은 지속적일 수 있지만 질서는 항상 변화해야 하오. 하지만 질서를 변화시킬 본능을 가진 생명이 없으면 질서는 곧바로 혼돈이 되어버리오."
질서가 없는 혼돈은 긴 시간 지속될 수 있지만 혼돈이 없는 질서는 아주 잠깐만 존재할 수 있다.
"기운이 한번씩 세상에 내려올 때마다 일겁이라고 부르오. 천겁하고도 구백구십구겁을 겪으면 이 세상이 멸망되오. 그렇게 예정되었는데 그대가 기운을 일원으로 승화시켰기에 이 세상은 질서에서 혼돈으로 방향을 바꾸었소. 혼돈이 충분해지면 천살마기라 부르던 기운이 다시 생겨날 것이오. 지금의 세상은 혼돈보다 질서가 더 많기 때문이오."
이제 세상의 질서들은 차례대로 혼돈이 될 것이다. 혼돈의 세상이 도래하면 천살마기는 다시 생겨난다. 천살이 일겁을 홀로 감당했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천살 덕분에 일겁의 시간이 무척 길어졌고 그 사이 인간들이 혼돈과 질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쌓으면 이 세상의 윤회에서 벗어날 가망이 생긴다.
"질서가 사라지고 혼돈이 많아지면서 이 세상의 일부 법칙들이 바뀔 것이소. 어쩌면 수백년 후에 우리가 익히는 내공심법을 통해 내공을 모을 수 없을지도 모르오."
천살은 호매령의 주장대로 천효에게 공부를 시킨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자를 보면 전부 무공수련을 시키지 않고 공부만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삼풍의 말대로 내공을 익힐 수 없는 세상이 되면 무공검법이 최고의 무공이 된다. 화산에 가는대로 무공검법을 찾아놔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천살은 자신이 몹시 궁금해하는 질문을 장삼풍에게 던졌다. 몇번이고 확신이 생겼지만 자꾸 의심을 하게 되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살마기가 사라진 것은 하늘의 안배입니까 아니면 삼풍진인 당신의 안배입니까? 이는 미리 정해진 운명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혹시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손들이 있습니까?"
천살의 질문에 장삼풍은 한참 고민했다.
"나도 명확하게 답을 주지 못하겠소. 다만 그대가 천살마기를 이겨낸 것에는 나의 도움이 조금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해주기 바라오."
장삼풍은 자신이 어떤 안배를 통해 천살을 도왔는지 천천히 이야기했다.
- 작가의말
이놈의 오지랖.
우선 내공이 생겨난데 대한 개연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수백년후에 왜 내공이 사라졌는지도 밝혔습니다.
세상이 빅뱅을 통해 혼돈이 된 후 어떻게 질서가 생기고 생명체가 생겨났는지 개연성을 부여했습니다.
왜 옛날에는 그렇게 많던 귀신과 도깨비 그리고 요괴들이 후에 드물어졌는지 개연성을 부여했습니다. 질서가 강해져서 다른 세상에 사는 이들이 우리 세상에 간섭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헌터물들에 개연성을 부여했습니다. 질서가 점점 혼돈이 되면서 혼돈이 질서를 넘어서는 순간 게이트가 열리고 던전이 생깁니다. 그때 질서가 마지막 발악으로 인간들에게 게임 시스템을 통해 능력을 부여하죠. 이이제이라는 말처럼 작은 혼돈인 인간들을 통해 큰 혼돈을 소멸시키려는 것입니다.
1999년에 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예언, 사실은 천구백구십구겁 입니다. 일겁의 길이는 제각각입니다. 천살 덕분에 매우 긴 일겁이 되었습니다.
혹시 제가 발견못한 오지랖이 있다면 댓글로 보충 바랍니다. 장르문학의 개연성을 위해 불철주야 혈혈단신으로 노심초사하는 글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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