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호화피
"나는 천살의 독을 겨우 이겨냈지만 중독된 상태에서 천살의 상대가 될 수 없소. 그리고 여러분께 미안한 말이지만 천살의 경지는 나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되오. 내가 중독되어 있다면 천살 혼자서 우리 모두를 죽일지도 모르오."
밖에서 명화교의 교도들이 한창 시체를 태우고 있었다. 명화교는 예로부터 화장을 해왔다. 만약 화장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교도들을 모았을 것이다. 관을 마련하기조차 힘든 자들은 화장에 큰 거부감이 없어 교도가 되었지만 어느정도 살만한 자들은 화장때문에 명화교를 꺼려했다.
시체 태우는 역한 냄새가 회의장에까지 퍼졌다. 이는 회의에 참석한 자들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씨 가문의 세력이 한씨 가문을 전면적으로 압도한 상황에서 교주의 자리를 찬탈하지 못한 유일한 장애가 바로 교주의 무력이었다. 홀로 무당을 봉문시킨 천살이 자신들을 적대하고 교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청해호의 사도에 있다면 몰라도 수백의 인원이 밖에 나와있자 두려움을 더 깊이 느끼고 있다.
금의위의 지휘검사는 주체에게 보고를 올렸다.
"우선 무림맹으로부터 얻은 정보입니다. 한선후의 천신공으로 강해진 자들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죽어버립니다. 아마 인체의 잠력을 격발시켜 강한 힘을 내지만 그만큼 수명도 줄어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강해지는 정도를 줄이고 오래 살 수 있게 하면 강력한 군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의위의 분석과 판단으로는 아마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지휘검사는 황제의 안색을 흘낏 살폈다. 여러가지를 보고할 때 그 순서를 잘 짜야 한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적당히 섞어서 황제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해야 하며 마지막 마무리는 기쁜 소식으로 마무리 해야 한다.
"다음으로 무당에 갔던 추적조가 올린 보고입니다. 마교 소교주 천살의 무위는 측정이 불가합니다. 무당의 고수들을 연파하였고 무당 최고수인 송백자와 이십여명의 장로 및 장문인의 사형제들을 일합에 전부 패퇴시켰습니다. 송백자는 즉사했고 남은 자들은 전부 팔을 쓸 수 없는 폐인이 되었습니다."
주체의 얼굴에 무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황궁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자가 무력도 강하다고 한다.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황실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잡아내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마교와 표운으로부터 들어온 정보입니다. 천살이라는 자가 교주의 무위를 가늠하려고 마교의 무리에 접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신공을 익혔다고 하는 자들이 전부 쓰러졌고 그중 살아남은 자가 한선후를 포함해 서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중 한선후와 고삼이라는 자를 제외하고 남은 스물여덟은 내공을 잃었다고 합니다."
"한선후는 천살이 독을 살포했다고 하는데 표운의 말로는 그때 거리가 너무 멀었고 독을 살포하는 기미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뭔가 숨겨진 내막이 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후 한선후가 천신공으로 교도를 강화하려고 했는데 횡련일기공을 익힌 교도가 그대로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천살과의 접촉을 통해 뭔가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 때문에 천신공이 효과를 잃은 듯 합니다."
"천살, 천살, 천살. 모든게 천살이라는 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군. 금의위의 분석에 천살과 한선후 둘중 누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되는가?"
주체의 질문에는 답이 포함되어 있다. 지휘검사는 그 정도 눈치가 없는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천살이라는 자가 백배는 위험합니다. 천신공은 이미 그 위험성이 사라졌습니다. 더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마교의 재력으로는 새로운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반면 천살이라는 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한선후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면서 표운에게는 교주의 무위가 강해 자신의 기척이 들켰다는 식으로 과장된 정보를 전해 우리가 한선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려는 시도를 보였습니다. 무공뿐 아니라 머리도 아주 비상한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 스물한살에서 스물두살로 추정됩니다. 십년뒤면 그 무공이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천살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표운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한선후를 유인할 계획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만 어차피 홀몸이라 이상한 점이 있으면 도망가면 된다.
무림맹에서 원각이 직접 회의를 주최했다. 무림맹주이지만 평소 소림에 기거하고 있었다. 송백자와는 달리 무공만 강하고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기에 자리를 비우는게 돕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마교의 움직임뿐 아니라 천살이 무당을 봉문시켰고 황제의 명령도 내려왔기에 회의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무당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천살이 송백도인을 포함한 무당의 이십여명의 장로와 장문인의 사형제들을 일합에 패퇴시켰다고 합니다. 그중 송백도인은 심장이 뚫려 즉사했고 남은 사람들은 두팔이 파열되어 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마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천살이 천신공을 익힌 자들을 죽이거나 폐인으로 만들었고 둘만 마수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천신공을 만들어낸 것이 천살이고 한선후는 그저 사용법만 천살에게서 얻어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재 한선후의 천신공은 이미 무인을 강하게 만드는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천살이라는 자가 손을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은 황실에서 금의위를 통해 전해온 내용입니다. 한선후와 손잡고 천살이라는 자를 전력으로 처단하라고 합니다. 한선후도 천살이라는 자의 손바닥에서 놀고 있다는 금의위의 분석입니다. 이것이 금의위가 전달한 계획서입니다."
원각은 보고를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비록 명나라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황실에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다니 조금은 불쾌하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무작정 자신들의 계획에 따르라니 토사구팽이 걱정되오."
"그래서 저희가 금의위와 접촉을 시도해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금의위는 막대한 재물과 함께 무림맹의 행사에 대해 어느정도 편의를 봐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거기에 서무림맹을 해산시켜주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원각은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얼굴이 펴이지 않았다.
"천살을 한선후가 없이 우리가 처단한다고 치고, 천살을 처단한 후 개봉으로 향하는 한선후는 그대로 놔둘 것이오?"
"그 부분도 협상이 완료되었습니다. 금의위와 동창이 큰 전력을 내서 우리와 함께 마교의 무리들을 전부 주살하기로 했습니다. 황실에서도 마교의 천신공에 큰 우려를 가지고 있더군요."
금의위의 계획은 간단했다. 천살에게 한선후를 끌어들일 미끼가 되어달라고 부탁한 후 무림맹과 싸우게 한다. 천살에게는 한선후를 깊숙이 끌어들인 후 무림맹이 한선후의 수하들을 상대하고 천살이 한선후를 직접 상대하게 하기 위한 유인책이고 무림맹과도 이미 다 얘기가 된 상황이라고 속였다.
가장 어려운 점은 천살이 도망을 못 가게 하는 것인데 한선후가 도망가지 못하게 할 병력이라고 천살을 속이고 금의위와 동창의 정예들을 근처에 대기시켰다. 거기에 여차하면 한선후의 병력도 투입될 수 있기에 금의위는 천라지망이라고 자신했다.
계획은 완벽한 듯 했지만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서문고검과 남궁천이 다른 사람들과 연수를 할 수 없다며 홀로 천살을 상대하겠다고 우겼다. 아직 해남장문 오천과 보타암의 혜절사태가 도착하지 않았다. 팽월과 언장동은 황실의 사람이나 다름없고 개방의 태상방주 정운산도 딱히 협공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천과 서문고검은 정파의 최고수를 다투는 사람들이다. 이 둘을 제외하면 천살을 제거하더라도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원각과 정운산이 이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들에게 우선 천살을 일대일로 상대해 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은 남궁천이 조금 더 강하지만 배분은 서문고검이 더 높다. 남궁천은 어쩔 수 없이 서문고검에게 양보해야 했다. 천살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남궁천은 위기상황이 되면 천살마기가 발동할 것이기에 서문고검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문고검과 순서를 다툰것은 첫순서를 양보함으로 서문고검에게 빚을 지우려는 의도였다.
표운은 늦은 밤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마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된다는 이유였다. 천살은 십년만에 서문고검을 다시 만나자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쳐다보기에도 눈부신 강호의 거인이었지만 지금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한편 서문고검은 천살을 마주하자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삼십년쯤 뒤에는 천살이 최고를 다투는 검객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십년뒤에 만난 천살은 이미 서문고검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지난번에 한선후와 대결을 하려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선후는 서문고검을 실망하게 했다. 내공만 익히고 무공수련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처럼 움직임이 어설퍼 보였다. 서문고검의 쾌검은 이십여년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십여년간 고민하며 수련을 해온 서문고검이기에 한선후의 부족함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실 천살에게도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살의 자세에는 빈틈이 없었고 작은 움직임에도 힘이 넘쳐났다.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고 거슬림이 없었다. 서문고검은 천살과의 대결에서 무언가를 얻어낼 것만 같은 기대감이 부풀어올랐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둘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서문가의 검은 쾌검이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검은 위력이 없다. 진정한 쾌검은 상대가 반응하지 못하거나 반응하더라도 막아내지 못하는 검이다. 쾌검은 빠르기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출검하는 시점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승부한다.
서문고검의 쾌검은 빠른 검으로 견제를 하다 더 빠른 검으로 승부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워야 한다. 빠른 검에는 힘을 싣기 힘들고 힘을 실은 검은 빠르기 힘들다. 힘을 빼고 빠른 검을 사용하고 상대에게 적중되겠다 싶은 순간에 급히 내력을 검끝에 실어 위력을 증가해야 한다.
천살은 조유천으로부터 포원경을 배웠다. 포원경에는 내공으로 순식간에 강한 힘을 내는 폭경이 포함되어 있다. 그 사용법을 여태껏 제대로 몰랐는데 서문고검의 쾌검을 상대하며 감이 잡혔다. 빠르기만 하고 힘이 실리지 않은 듯한 쾌검이 몸에 닿는 순간 폭발적인 힘을 내었다.
천살 역시 강한 상대를 만나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현허도법이나 양의검법은 남과 다투기 위한 무공이라기보다 자신을 단련하는 무공에 가까웠다. 무공의 수준은 높았지만 사람을 긴장시키는 기세가 없다. 하지만 서문고검은 젊은 시절 수많은 대결상대의 목숨을 취한 자 답게 검에 언뜻언뜻 살기가 내비쳤다.
"천소협, 설마 초식을 버리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오?"
뒤로 훌쩍 물러난 서문고검은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문고검 역시 형을 버리고 쾌의 정화만 취하려 했지만 이십여년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런데 스물이 갓 넘은 천살이 무초의 경지에 이른 듯 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대결을 중단했다.
"초식을 버리기 힘들어 다시 초식을 주워담는 중입니다."
강제로 무초의 경지로 들어가다가 부족함을 느끼고 다시 초식의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천살이다. 완성된 육체 덕분에 초식을 숙련시키는 속도가 빨라져 조만간 진정한 무초의 경지에 들어설 것이다. 하지만 성라운포의 경우만 보아도 초식은 꼭 필요한 존재이다.
"고맙소, 내게 큰 깨달음을 주셨소. 염치 없지만 천소협은 내 수련상대가 좀 되어 주어야겠소."
- 작가의말
畵虎畵皮, 화호화피불화골, 지인지면불지심. 호랑이를 그릴때는 가죽을 그리지 뼈를 그리지 않고 사람을 알고 얼굴을 알아도 마음은 모른다. 우리말로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죠.
다음 글은 조금 쉬다 올리겠습니다. 남궁천의 포지션에 대해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습니다. 무공 강하고 성질 더럽고 자존심 강한 남궁천이 천살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고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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