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망월
천살은 초화규가 이해되지 않았다. 글을 수십번 읽게 하여 자신을 속이는지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여주던 초화규가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초화규가 재촉하자 천살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암문(暗文)입니다. 밀문(密文)이라고도 하는데 일정한 법칙으로 글자를 다른 글자로 치환(置換)하는 방식입니다. 대조문(對照文)이 없으면 사실상 풀기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니 당연히 밀문인 걸 알고 있지. 하지만 밀문도 사람이 만든거야. 사람이 만든걸 사람이 풀지 못할리가 없지 않느냐."
초화규의 말에 천살은 답이 궁했다. 일자무식의 초화규가 명화교의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목적만을 바라보는 이런 막무가내적인 성격이 한몫 했다. 문득 서장로도 합리성이나 가능성 따위를 따지지 않고 목적만을 바라보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을 하려면 방법이나 수단을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원하는 목표를 꼭 달성하는 뚝심이 필요하구나.'
많이 아는 자가, 현명한 자가 사람들을 이끄는게 아니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일로정진하는 사람의 뒤를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초화규는 비록 일자무식이지만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그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이루려 하고 있었다.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려는 것일까?'
한편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도 천살의 입은 초화규가 원하는 대답을 뱉어냈다.
"제가 비록 부족한 점이 많지만 어떻게든 풀어내도록 해보겠습니다. 다만 이 가죽 두루마리를 제작한 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시면 암문을 풀어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화규는 한참동안 생각을 하더니 풀이 죽은 어조로 답했다.
"내가 이런데 신경을 안 써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저 이 열개의 그림을 십전도(十戰圖)라고 부른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럼 이게 내공심법인지 외공수련법인지 아니면 초식인지라도 아는게 없으신가요?"
"신화공이라고 신이 신도들에게 내려준 무공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오랫동안 익힌 사람이 없어서 어떤 형태의 무공인지도 모르겠구나."
사실 신화공을 사용하면 어떤 형태인지 교도들이 배우는 동요와 구전으로 전해지는 설화에서 서술하고 있다. 다만 광서와 귀주쪽에 있는 교도들과 달리 감숙과 청해에 있는 명화교도들은 무공에 치중하고 교리를 멀리하고 있었다.
광서와 귀주에 근거지를 둔 명화교도들은 성녀와 제사장을 모시고 종교의 형태를 이어가고 있고 감숙과 청해의 명화교도들은 교주를 모시고 무림방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초화규는 신화공에 대해 거의 아는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이들은 서로 구분하기 위해 성녀를 모시는 쪽을 성화교(聖火敎)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할정도의 명화교의 신도들이 성화교에서 차출된데 반해 초화규는 처음부터 명화교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교리나 설화 등에 대해 아는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초화규처럼 일할정도의 명화교에서 자란 자들이 교를 장악하고 있기에 종교색채보다 방파색채가 짙은 것이다.
그후 천살은 초화규의 감독하에 매일 암문의 풀이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초화규는 동자공의 수련도 못하게 막으려 했지만 괴질을 앓고 있어 수련을 빼먹으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천살의 말에 어쩔수 없이 양보해야 했다.
"제가 해석한건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니 장로님께서 듣고 판단하세요."
초화규는 천살이 장로님이라 불러주면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천살은 꼬박꼬박 장로님이라 불러줬다. 초화규는 천살이 암문을 풀이한 것을 한참 듣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주 그럴듯 하기는 한데 나도 무공을 많이 익힌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구나. 우선 네가 한번 익혀보거라."
초화규는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천살이 모르는 부분은 해석까지 상세히 해줬다. 이런자가 왜 일자무식인지 궁금한 천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장로님은 머리도 좋으시고 오성도 뛰어나신데 왜 글공부를 하지 않으셨나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글자만 보면 어지럽고 메스껍고 그래. 글의 획수가 복잡할수록 더
어지러운데 저기 바위의 여덟글자는 아무리 쳐다봐도 울렁거리지 않는걸 보니 참으로 잘 쓴 글씨같단 말이야."
천살은 자신이 응익검을 깨달은 것처럼 초화규도 글자로부터 무공을 깨달을까 걱정되어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제가 해석을 잘못한 거면 어떻게 되는건가요? 익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나요?"
"그건 나도 모르지. 이제부터 네가 직접 알아보거라."
천살은 십전도의 첫번째 그림의 자세를 취한 후 의념을 단전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초화규가 가르쳐준 순서대로 의념을 혈도에서 혈도로 옮겼다. 동자공의 수련을 계속했기에 이런 방식의 수련이 낯설지는 않다.
아무런 느낌도 없자 두번째 그림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세번째 네번째까지 아무 느낌이 없다가 다섯번째 그림을 수련할 때 무거운 망치가 배를 두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천살이 울컥 선혈을 토하고 기절해버리자 초화규는 깜짝 놀라 천살의 맥을 짚었다.
"다행이구나. 내공이 전혀 없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들지는 않았구나."
곧 천살이 기절해서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살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천살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토혈의 후유증도 거의 없어보이자 몸은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불사공의 덕분에 빠르게 회복된 것이지만 말이다.
"네가 기절한 동안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순서가 잘못된 것 같다. 네 해석은 그럴듯했는데 그림의 순서가 이 가죽에 적혀진 순서대로가 아닐 가능성이 높구나."
"장로님, 여기 그림이 열개잖아요. 그럼 수억번을 해봐야 정확한 순서를 알 수 있다는 말이예요."
"좀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거라."
"하루에 열가지 순서를 시험해볼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십만년 이상 걸릴 거예요."
사실 천살도 정확하게는 얼마나 해봐야 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초화규가 무식하고 자신을 유식한 서생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이용해 이대로는 불가능함을 주장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나는 십년정도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천살은 속으로 나이도 많은것이 인내심도 깊구나라고 비꼬았다. 하지만 표면으로는 더없이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무인들은 흡기공이라고 벽에 붙을수 있는 무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무공을 사용하면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다음 성화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암문을 풀이할 수 있는 책을 찾으면 됩니다."
"사실 나 혼자 여기를 탈출하려면 네가 말한대로 흡기공을 이용해 나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러면 너만 홀로 이곳에 남지 않겠느냐. 우리가 이렇게 만난겄도 인연인데 내 어찌 너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있겠느냐."
초화규는 내공은 충분하지만 나이와 부상때문에 근력과 체력이 부족하다. 근력과 체력이 떨어지면 내공의 소모가 커지기에 초화규는 자력으로 공동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살도 그러한 사정을 어느정도 짐작하지만 짐짓 감격하여 대답했다.
"장로님이 이렇게까지 절 위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를 제자로 받아 흡기공을 가르쳐 함께 탈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밖으로 나가면 제가 장로님의 다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사실 초화규는 밖으로 나가도 갈데없는 신세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사람들 눈에 잘 띈다. 거기에 명화교와 무림맹이라는 양대 세력에게 모두 쫓기는 신세다. 원래는 이곳에서 신화공을 익혀내고 다시 강호로 나갈 생각이었지만 천살의 말을 듣고 마음이 동했다. 천살의 조력이 있다면 신분을 숨기는게 더욱 용이해 질 것이다.
"그럼 우선 내공심법을 가르쳐줄테니 네가 한번 수련해보거라. 이 초화규는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다. 네 자질이 어떠한지 먼저 시험해 봐야겠다."
초화규는 기본토납법을 천살에게 가르쳤다. 그후 인내를 가지고 석달동안 기다렸지만 천사성의 단전에는 한톨의 내공도 모이지 않았다. 장심을 천살의 명문에 대고 몸속을 탐지하던 초화규는 신음을 흘렸다.
"혈도들은 깨끗하고 단전도 튼튼한데 왜 내공이 모이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보통 내공이 모이지 않는 자들은 단전에 문제가 있거나 혈도들이 꽉 막혀서인데 너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구나."
"장로님, 그러면 저를 버리고 혼자서라도 여기를 탈출하십시오. 명화교의 교주가 되신다면 백만 방도를 거느리고 소림을 불태운 후 저를 구해주십시오."
천살은 아부가 먹혀도 좋고 설사 초화규가 진짜 혼자 탈출한다고 해도 손해볼 것은 없다. 암벽등반에 자신감이 붙었기에 언제든 힘과 체력만으로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천살의 아부가 너무 과했는지 초화규는 감동한 표정이었다.
"내가 방금 생각해낸 것이 있는데, 내 내공을 너에게 넣어주마. 너는 그걸로 흡기공을 익히고 나를 업고 여기를 빠져나가면 되지 않겠느냐."
"장로님의 내공을 저에게 넣어주신다구요? 타인에게 내공을 전해주는 건 절세고수만 가능하다고 들었는데요?"
"허허, 절세고수는 무슨. 이정도 가능한 사람이 강호에 열명은 있을거다."
전해받는 사람이 내공을 익혔을 경우 내공을 전하는 자는 그것까지 고려해서 내공의 성질을 제어해야 한다. 그래서 내공전이가 힘든 것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동문이거나 받는 사람이 내공을 아예 익히지 않은 경우 웬만한 고수들은 다 가능하다.
초화규는 명화교에서 사람들이 경원시하며 항상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일을 하는데 원칙성이 없어 곁에 있던 심복들이 대부분 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명화교에서 외톨이가 된지 이십년은 된 것 같은데 천살이 입안의 혀처럼 굴어주자 마음에 쏙 들었다.
초화규는 자신의 내공을 조금 넣어주고 천살에게 흡기공의 요결을 읊어주었다. 내력을 운용하여 손바닥과 신체의 흡착력을 강하게 하는 흡기공은 아주 쉬운 운기법이다. 다만 흡기공을 사용한 채 움직이는것이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초화규는 벽호공이라고도 불리는 흡기공을 사용해서 담을 넘은 경험이 많기 때문에 천살에게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었다.
천살 역시 하나를 들으면 둘을 깨우치고 둘을 깨우쳐주면 열을 알아냈다. 초화규는 자신이 불어넣은 일푼도 되지 않는 내공으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천살을 보고 희망을 불태웠다. 암문을 풀어내고 신화공을 대성한 후 명화교의 교주가 되는 희망을 말이다. 물론 암문을 풀어내면 곧바로 천살을 제거해야 함은 두말할 것 없다.
- 작가의말
水中望月, 물속의 달을 바라보다. 볼 수는 있지만 만지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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