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지재
천사성이 화산으로 온지 벌써 삼년이 지났다. 그간 천사성의 일과는 매우 간단했다. 아침 저녁으로 동자공을 수련하고 낮에는 글공부를 했다. 동자공을 아무리 수련해도 내공이 모이지 않자 천사성은 자신이 재능이 없다고 수련을 그만두려 했지만 서장로의 엄명에 의해 매일 수련해야 했다.
효자봉에는 서장로와 천사성 그리고 벙어리 노인 한명이 함께 살았다. 서장로가 때때로 자리를 비웠기에 천사성을 돌본건 아노(啞老 - 벙어리 노인)였다. 수련하는 시간과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천사성은 아노를 도와 집안일을 했다.
삼년의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효과도 없는 동자공도 싫증이 나고 공부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천사성은 서장로에게 다른 것을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다.
"장로님, 동자공이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을 보니 저는 무재가 아닌가 봅니다. 그리고 글공부도 더이상 공부할게 없으니 다른 재주를 익혔으면 합니다."
"동자공은 익히자마자 효과를 보이는 공부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동자공의 수련에 힘을 쓰거라.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너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낮에 하는 글공부를 그만두고 무공초식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안되나요?"
"내가 비록 무인이지만 글공부가 심오하고 어려워서 백번 읽어도 매번 새롭다고 알고 있다. 남들은 평생 하는 글공부를 너는 삼년 하고 싫증을 내니 다 네 마음이 굳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장로님과 내기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장로님이 아무 책이나 집어드시면 제가 그 책을 거꾸로 외워보겠습니다. 책속의 글자들이 머릿속에 박혀 있는데 매일 책을 읽는것도 시간 낭비라 생각됩니다."
장로는 상위에 널려있는 책중에 아무거나 하나 집어들었다. 물론 두터운 책으로 하나 골랐다. 그러자 천사성은 책의 마지막 글자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외우기 시작했다.
천사성의 외우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중간에 한번도 끊기지 않았다. 반시진의 시간이 훌쩍 지나도 천사성은 멈추지 않았다. 서장로는 천사성이 책에 씌인 주석까지 거꾸로 외우자 할말을 잃었다.
"그만 하거라. 이런 글공부가 의미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내 나름 방도를 찾아보마."
말을 마친 서장로는 나무집을 나서서 연화봉으로 향했다. 천사성은 아노를 보고 말했다.
"아노 할아버지, 이젠 저에게 다른 무공을 가르쳐 주시겠죠?"
아노는 천사성의 말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사성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아노가 고개를 젓자 심술이 났다. 그래서 아노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그럼 우리 내기를 해요. 제가 이기면 아노가 소원 하나 들어주고 내가 지면 아노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성은 아노에게 어떤 소원을 말할지 궁리하며 자신만만하게 서장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잠시후 서장로의 손에 들린 책을 보자 실망하고 말았다.
"이건 천축어로 된 불경이다. 그리고 이건 그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두가지를 서로 비교하며 천축어를 공부하거라."
서장로는 천사성에게 천축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는 수련하러 떠났다. 서장로가 떠나자 천사성은 아노에게 불퉁스럽게 말했다.
"아노 이겨서 좋으시겠네요. 소원이 뭔지 말해주시죠. 패자는 무언인 법이니까요."
아노는 히죽 웃고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손가락이 복잡하게 움직였지만 천사성은 용케 알아보았다.
"아직은 제가 애송이라서 말할 소원이 없다구요? 언젠가 제가 절세고수가 되면 아노가 소원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힘이 곧 명분이니까요."
아노는 웃으면서 허공에 글을 써내려갔다.
"힘이 명분이라면 더 강한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그럴듯한 말이긴 합니다만 아노가 저보다 강해지기는 어려울 걸요. 저는 무공을 익히는 순간 그 요체를 깨달아서 절대고수가 될 거예요."
아노는 입을 벌리고 웃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을 어떻게 다쳤는지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노의 손가락은 쉬지 않았다.
"동자공 삼년이나 익히고도 진전이 없는 사람 처음 본다구요? 저는 당연히 동자신(童子身 - 총각의몸)이죠. 제가 화산에 올때 여섯인가 일곱인가 그랬는데 그때 벌써 동자신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노도 일을 해야 해서 천사성은 곧 혼자가 되었다. 천축어로 된 불경과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함께 펼치며 천축어를 공부했다. 처음에는 오리무중에 빠졌으나 시간이 흐르자 천축어의 규칙을 발견하고 언어체계를 유추했다.
가끔 잘못 알고있던 단어의 진짜 의미를 깨달으면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그렇게 천사성은 천축어 공부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 천축어가 어느정도 익숙해 졌지만 천사성은 서장로에게 다른걸 가르쳐 달라는 말을 못했다. 이번에는 남만어나 동영어 혹은 여진어를 배우라고 할지도 모른다.
서장로는 자신이 가져다준 불경을 천사성이 손에서 놓지 않자 기쁨에 잠겼다. 천살마성이라 해서 많이 경계하고 했는데 보통의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제자로 들이고 싶을 정도로 영특하고 자질이 출중했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호군천의 제자로 들이고 자신이 직접 가르칠까 고민했다.
"장로님,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로는 천축어를 더이상 공부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책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사람을 시켜 불경을 구해오게 했다. 며칠이면 도착할 것 같으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거라. 시간의 흐름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의미있는 시간은 길게 보내고 의미없는 시간은 짧게 보내거라."
서장로의 말이 머릿속에 박히자 천사성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구었다. 책이 나무로 된 바닥에 떨어지며 작지않은 소리를 냈지만 천사성은 전혀 몰랐다. 입을 헤 벌리고 혼이 빠져버린 듯한 천사성을 바라보며 서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으로 탐이 나는 아이이다.
반각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천사성은 정신을 차리고 서장로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서장로의 짧은 한마디가 의미없이 읽었던 수십권의 책보다 나은 것 같았다. 천사성은 계곡에서 눈을 감고 명상하는 서장로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노, 장로님이 나를 제자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장로님은 진짜 대단하신 분 같아요. 고민없이 던진 한마디에 어떻게 그런 심오한 뜻을 담을 수 있죠?"
아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아노가 허공에 글씨를 쓸 때 손가락의 움직임은 매우 엄정했다. 점을 찍을때, 획을 그을때, 획을 비틀 때 손가락의 움직임과 변화가 일정했다. 그래서 아노의 글씨는 알아보기 쉬웠다.
"장로님의 배분이 너무 높아서 나를 제자로 받을 수 없다구요? 내가 장로님 제자가 되면 화산장문이랑 무당장문이 나한테 사숙이라 불러야 한다구요? 그럼 아노 할아버지한테는 화산장문이 증조할아버지라 불러야 하나요?"
천사성은 배를 잡았지만 아노는 웃지 않았다. 아노의 기분이 가라앉은 듯 하자 천사성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노, 다음번에 읍내로 나갈 때 잡서 좀 구해다 주실래요? 이젠 불경도 다 외워서 재미가 없어요."
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노가 잡서를 구해다 주면 천사성은 한번 보고 전부 암기한다. 그러면 아노가 가지고 있다가 다시 되팔고 다른 잡서를 구해오는 것이다. 잡서를 구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천사성은 아노를 도와 열심히 약초를 캐고 말리우는 일도 도왔다.
서장로도 그렇고 아노도 그렇고 동자공의 수련만 열심히 하면 글공부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섭을 하지 않는다. 서장로는 동자공의 순양지력이 천살성의 음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려는 의도이고 아노는 천사성이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난 것을 알기에 동자공을 익혀 천살성의 기운에 먹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번에 구해준 잡서에서 주인공이 불경에서 깨달음을 얻어 절세신공을 얻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천사성도 한동안 불경을 탐독했다. 거꾸로 읽기도 하고 한글자씩 건너뛰기도 하고 숨겨진 종이가 없는지 깐깐히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잡서의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라는 것뿐이다.
"장문인, 장문인이 천사성을 제자로 들이고 내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태상장로님, 그 아이의 자질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서장로는 화산파에서 제자를 하나도 받지 않았다. 눈에 차는 자가 없다는 이유였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수련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런 서장로가 천사성을 가르치려는 생각을 품자 호군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자공을 익힌지 사년이 가까운데 아무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네."
서장로의 말에 호군천의 놀라움이 더욱 커졌다. 동자공은 잠재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효과가 늦게 나타난다. 사년이나 되는데도 아무런 진전도 없다는 것은 그 잠재력이 대단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천강지재라서 천살성이 깃드는 것인지 아니면 천살성이 깃들어서 대단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대단한 자질의 아이가 화산의 제자가 된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습니다. 저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 제자를 받는 시기가 이년뒤요?"
"네, 태상장로님. 올해 제자를 받았고 다음 화산에 제자를 들이는 때가 이년뒤입니다. 그때 천사성을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이년동안 더 관찰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제자로 들일 생각이오. 무공 잠재력뿐 아니라 글공부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이고 있소. 문무가 겸전한 인재는 항상 희소한 법이오. 어쩌면 저 아이가 우리 화산을 바꿀지도 모르겠소."
- 작가의말
天降之才, 하늘이 내린 재주 혹은 하늘이 내린 인재.
혹시 아노를 야노로 읽으셨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상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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