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사실 화령은 천사성과 통성명을 한 적이 없다. 하오문을 통한 뒷조사로 이름을 알게 된 것이고 실제로는 몰라야 한다. 말을 건네고 난 후 화령도 자신의 실수를 금방 깨달았다. 천사성이 추궁하면 들어올 때 총관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대답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천사성의 입장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니 방금 한 말과 모순이 된다.
하지만 천사성은 화령처럼 심계가 깊지 않았다. 화령과 며칠이나 같은 배에 타고 왔으니 화령이 자신의 이름을 알겠거니 하고 무심코 지나쳤다.
"저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화령은 천사성과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 말을 걸었다. 천사성은 아직 정식으로 화산의 제자가 아닌데 화산의 후기지수 신분으로 모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자들은 강호에 어느정도 알려진 자들이고 천사성은 아직 내공도 없고 무공도 검법서를 보며 홀로 수련했다. 그래서 화령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간단한 대답으로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하지만 화령은 천사성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말을 걸아왔다. 그리고 현문천에게도 간간이 말을 걸어주었다. 현문천은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자 헤벌죽해서 몸둘바를 몰라했다.
자연스럽게 화령의 무리가 천사성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천사성은 타의로 무리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화령이 천사성에게 거듭 관심을 보이지 화령과 친분을 쌓기 위해 애썼던 몇몇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본인은 금릉 칠성문의 소문주인 호경이라고 하오. 천공자는 화산의 누구에게 사사받고 있으시오?"
화령을 둘러싼 무리중에서 호경은 자신이 몸담은 칠성문이 가장 앞선다고 생각했다. 칠성문의 문주는 무당파의 속가제자로 호경은 화령과 안면을 튼지 이미 며칠이 되었다. 화산이라면 조자운과 단손경만 알려지고 다른 제자들은 전혀 유명하지 않았다.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천사성에게 화령이 호감을 보이는 듯 하자 호경은 참다못해 나섰다.
"아직 정식으로 화산에 입문하지 않았습니다. 한달뒤에 입문할 예정이고 아직 어떤분을 사부로 모실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천사성은 거짓말을 기피하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 이득도 없는데 거짓말을 일삼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이들에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천사성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단한 천재라서 화산에서 서로 제자로 들이려고 다투나 보군.'
'조자운이나 단손경을 대신해서 온 것을 보면 차기 장문인으로 이미 내정되었나 보구나.'
화령주변에 모인 자들은 호경을 비롯한 무당의 속가제자인 몇몇만 빼고 나머지는 이 자리에서 비교적 떨어지는 존재들이다. 문파의 세력이 약하든지 아니면 개인이 문파에서의 위치가 애매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천사성과 안면을 트려고 말을 걸어왔다.
덩달아 현문천에게도 말을 거는 자들이 생겼다. 현문천과 천사성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것으로 오해한 자들이었다. 천사성도 자신이 아직 화산에 입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터놓으니 마음에 걸릴게 없어서 말문도 함께 틔었다.
천사성과 화령을 중심으로 무리가 새롭게 형성되자 자격지심에 홀로 있던 자들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합류했다. 한쪽 귀퉁이에 큰 무리가 형성되자 모용가의 형매를 중심으로 한 무리와 남궁청아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호, 누군가 했더니 미래의 천하제일검이로군."
서문초신의 말에 남궁청아가 입을 열었다. 처음 인사를 나눌때를 제외하고 거의 입을 열지 않았던 남궁청아다. 그래서 남궁청아가 입을 열자 무리에 속한 모든 남자들이 숨을 죽였다.
"화령소저는 수공을 익힌것으로 보이고 개방 소방주 현문천은 봉법을 익힌 자입니다. 칠성문의 호경은 칠성검이 소성을 이루었다지만 칠성검으로 천하제일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서문공자가 말씀하신 미래의 천하제일검은 화산의 천공자인 모양이군요."
"남궁소저의 혜지(慧智)는 외모에 못지 않으시오. 일년반 전인가 천검산장에 서장로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소. 그때 형산삼걸의 장현성이라는 자와 대결을 한 적이 있는데 일합만에 패퇴시켰소."
"그정도는 서문공자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남궁청아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띄워주는데 능하다. 무공이 평범한 남궁청아는 가문의 내총관 자리를 노리고 있다. 가문이 정해주는대로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평생 아이를 낳고 돌보는 일은 싫다. 남궁청아의 모친은 일대에 유명한 미인이었지만 못생긴데다 성격도 별로인 남궁청아의 부친한테 시집와서 많은 마음고생을 했다. 남궁청아는 모친처럼 되지 않기 위해 어릴때부터 노력했다.
"천공자는 목검을 장현성의 목울대 앞에서 멈추었소. 부끄럽지만 나는 무흔검법의 경지가 낮아 멈추지를 못한다오."
서문초신은 오만한 사람이긴 하지만 무공에 대해서만은 누구보다 엄격한 자이다. 남궁청아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하자 서문초신은 말을 이어나갔다.
"무흔검법은 쾌검이라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원하는 곳에 멈추지 못하고 조금 더 찔러나가는 결함이 있소. 그래서 경지가 낮을 때는 쾌검 주제에 찌르기보다 베기를 더 많이 사용하오. 최대한 사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것인데 그래도 많은 피를 보았소."
"무흔검법의 찌르기를 원하는 곳에 멈출수 있다면 천하제일검을 논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오. 그런데 저자는 그때 전력의 찌르기를 원하는 곳에 멈추었소."
"그것은 천공자의 검법이 무흔검법과 달라서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화산의 검법을 잘 몰라서 단언하기는 힘들지만요."
서문초신은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항상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서문초신에게서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남궁소저처럼 생각했소. 그래서 조부께서 천공자를 미래의 천하제일검이라고 말할때 속으로 수긍하지 못했소. 그러다 조부에게서 모든 전말을 전해듣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소."
"천공자는 그때 무공에 입문하지도 않은 상태였소. 무공을 전혀 배우지 않은자가 형산삼걸의 하나로 이름을 떨친 장현성을 일합만에 패퇴시킨 것이오."
서문초신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조용해졌다. 풍운장의 소장주 장문산은 외공에 가까운 금강불두공을 수련하기 때문에 천하제일검이라는 말에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자가 형산파에서도 기재로 꼽히는 형산삼걸중의 하나를 일합만에 이겼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얻어들은 소문에 의하면 무림맹을 결성한 후 젊은 고수들을 모아 하나의 부대를 창설한다고 하오. 아무래도 저자가 그 부대의 인솔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군."
장문산이 입을 열자 서문초신은 곧바로 말을 받았다.
"그건 아닐 것이오. 지금 싸워도 내가 이길 수 있소. 저자는 다만 미래가 기대되는 것이지 지금 당장 강한것이 아니오. 이제 겨우 열셋이니 내공도 부족하고 힘도 약할 것이라 생각되오."
남궁청아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른 후 서문초신의 말을 받았다.
"생각 났어요. 화산에서 기재가 한명 나타나 서장로가 직접 제자로 들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잠깐 있었어요. 아무래도 천공자의 이야기인것 같네요."
"그렇다는 것은 자자가 아직도 화산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았다는 말이군. 서장로의 제자라면 이런 자리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말이오."
"화산은 정해진 달에만 제자를 받는다고 합니다. 아마 다음달이 화산에서 제자를 받는 달일 거예요. 그때 서장로의 제자가 된다면 무림맹의 부대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 같네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내 생각에는 장문제자로 들어간 후 무공만 서장로에게서 배울 것 같소. 화산파의 다음 장문인은 저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소."
"조자운이라는 자도 보기드문 기재라고 들었는데 천공자까지 가세하니 화산의 기세가 대단할 것 같네요. 옥골선풍의 위명이 강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풍도인이 우화한 후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분이 분명한데 그 뒤를 이을 자들까지 있으니 당분간 화산천하가 될 것 같네요."
원래 강호는 소림천하였다. 소림이 천하무림의 삼할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소림과 명화교가 시비가 붙었고 명화교는 무인뿐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 소림을 공격했다. 소림의 무수한 전각들이 불타올랐고 강호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들이 소림의 중들과 경서들을 하나라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렇게 소림이 불타고 수많은 고수들이 타계하자 무당천하가 되었다. 무당과 비슷한 세력을 자랑하던 화산이 내분으로 세력이 위축되자 무당이 소림의 위치를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무당의 문제는 삼풍자가 우화등선한 후 그 뒤를 이을 대표적인 무인이 없는 것이다.
현재 옥골선풍 서창훈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화산의 세력이 큰 타격을 받아 무당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창훈의 뒤를 이어 천사성이 천하제일을 차지하면 화산의 성세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저자가 천하제일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소. 소림이나 무당에 저자처럼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시든 자들이 한둘이 아니오."
장문산의 말에 서문초신이 말을 받았다.
"나는 저자가 천하제일이 되었으면 좋겠소. 그다음 저자를 꺽으면 내가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니 말이오."
오해와 소문 그리고 억측으로 천사성은 의도치 않게 후기지수들의 모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천사성 본인은 강호의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자신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모임이 끝났다. 대부분 후기지수들은 풍운장을 떠났다. 천사성은 대화를 나눈 자들과 일일이 작별을 한 후 자신이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달빛을 받은 풍운장의 밤풍경이 너무도 좋아서 자연스럽게 발길을 화원으로 향했다.
감상에 빠져서 풍경을 감상하다보니 갑자기 소피가 급했다. 달빛이 너무 밝아서 천사성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을 찾아 급한일을 해결했다. 일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이쪽으로 향하는 기척이 들려왔다. 천사성은 잘 꾸며진 화원에서 작은일을 본것이 다른 사람에게 들킬세라 황급히 몸을 숨겼다.
- 작가의말
여자일까요 남자일까요? 설마 여자가 와서 소피를 보다가 천사성과 눈이 마주치고 남은 인생 책임지라고 들러붙는 진행을 원하는 분은 없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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