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점작소
칠호는 손에 비수를 꼬나들고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상대는 아마 당문인 듯 한데 기본도 안되어 있는 놈들이다. 놀랍게도 총지휘자로 보이는 자가 전음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다. 아마 자신의 은신술에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지만 칠호는 부자연스러운 기운을 감지함으로 당문의 총지휘자의 위치를 알아냈다.
여기저기에서 동료들의 비명이 터지고 있었지만 칠호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자들도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죽기전에 자신의 위치를 알려서 다른 동료들에게 조심하라고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암기의 고수라면 굳이 이렇게 다가갈 필요가 없이 적당한 거리에서 암기를 던지면 된다. 하지만 당문의 총지휘 정도라면 웬만한 암기는 손쉽게 피해버릴 것이 불보듯 뻔하다. 그래서 칠호는 비수를 들고 은신술을 사용한 채 몰래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지척에 도착했는데도 상대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칠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당문의 총지휘를 암살한 공로는 매우 크다. 비록 사씨가문이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을 더 귀하게 대접할 것이다. 적절한 거리에서 발길을 멈춘 칠호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비수로 심장이라 짐작되는 위치로 찔러갔다.
허공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한 찌르기를 한 칠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 길이가 짧고 유난히 굵은 검 하나가 칠호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허리를 비틀어 급하게 피했지만 어깨가 검에 가격당해 팔 하나가 그대로 떨어졌다.
그때 또 하나의 검이 옆구리로 짓쳐들었다. 이미 더이상 공중에서 회피할 여유가 없기에 칠호는 비수를 검에 가져다 댔다. 비수가 수십조각으로 깨지고 쇠몽둥이같은 검이 천근거력을 안고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목숨이 몇호흡 남지 않은 상황에서 회광반조 덕분에 칠호의 정신은 전에없이 또렷해졌다.
그제야 자신과 이장정도의 거리를 둔 삼호와 사호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개자식들은 함정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미끼로 삼아버린 것이다. 속으로 둘을 저주하는데 둘의 은신술이 갑자기 깨지고 삼호와 사호가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렸다. 삼호와 사호의 심장부근에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작은 비수가 꽂혀 있었다.
'암왕(暗王)이 나타났구나.'
칠호는 언젠가 자신들을 훈련시키던 사부의 말이 생각났다. 은신하면 천하의 누구도 찾을 수 없고 암기가 몸에 꽂히기 전까지는 암기가 날아오는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암왕이 나타나면 황제라도 편하게 발 뻗고 자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었다. 그때는 그저 은퇴한 살수의 허풍이려니 했는데 죽기전에 직접 눈으로 보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무영은 귀를 쫑긋 하더니 고삼에게 말했다.
"저쪽에 당문의 형제가 암기에 맞았다고 하니 해독하러 가야 한다. 너는 여기서 내가 올 때까지 숨어있거라."
당무영이 명현공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고삼은 몸을 숨길 수 없다. 당무영이 떠나자 고삼은 벽에 기대 당무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은신술로 접근한 살수가 비수로 고삼의 심장을 찔렀다.
고삼을 찔러오던 비수는 고삼의 몸에 닿자마자 강한 반탄력에 부러지고 말았다. 살수의 찌르는 힘이 약했다면 그저 비수가 튕겨나갔을턴데 혼신의 힘을 다했기에 비수가 부러지고 살수의 손목도 부러졌다. 고삼은 검도 필요없이 발길질로 살수의 머리를 걷어차 목숨을 거뒀다.
사장로는 하인들도 입지 않을 낡고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선착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남은 식솔들에게 전부 도망가라고 명한 다음 단약을 먹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곧바로 면도칼로 머리와 수염 그리고 눈썹을 밀어버렸다. 눈썹은 원래 밀 생각이 없었는데 수염과 머리를 밀다보니 그만 자기도 모르게 밀어버렸다.
하지만 눈썹을 밀고나니 본인도 거울속의 모습이 낯설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독단을 하나 꺼내 삼켰다. 산공독이 들어있는 독단은 반시진가량 사장로를 내공이 없는 사람처럼 꾸며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억지로 내공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반드시 내상을 입는다. 무공을 익힌 살수들이 하인이나 일꾼으로 위장할 때 사용하는 약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 챙겨둔 것이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내공이 사라지자 노쇠한 육체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죽기 싫다는 일념으로 사장로는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나루터로 향했다. 요즘 큰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나루터는 한산했다. 스무명 정도 태울수 있는 크기의 배 하나가 마침 대기하고 있자 사장로는 곧바로 올라가서 출발을 명했다.
"아직 출발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리시오."
뱃사공의 말에 사장로는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참았다. 잠시후 시간이 되었는지 세명의 뱃사공은 배를 출발시켰다. 한명이 장대를 잡고 두명이 노를 저으며 배를 능숙하게 몰아갔다.
배가 어느정도 나가자 세명의 뱃사공이 갑자기 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호수에 뛰어들자마자 잠수를 한 세명은 배에서 서른걸음정도 되는 곳에서 물위로 올라와 한번 호흡을 한 후 다시 잠수를 했다. 내공이 돌아오려면 아직도 일각은 있어야 하기에 사장로는 도망치는 자들을 그저 눈뜨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사장로, 그게 무슨 꼴이오. 이 선우복명이 오랜만에 인사드리겠소."
"허허허, 선우장로 오랜만이오. 이리 건너와서 나랑 회포나 푸는게 어떻소. 자네 수하들도 전부 데리고 와서 말이오."
내공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장로는 허장성세를 펼쳤다. 선우복명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자인지 잘 아는 까닭이다. 사장로의 예상대로 선우복명을 실은 배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술한잔 나눠야 하는데 그럴 상황이 아닌것 같소. 그 배안에 사장로께 드리는 선물이 있는데 한번 받아보시오."
배판아래는 비어있는 공간이다. 안에 묵직한 돌멩이들을 적당한 위치에 놓아 배의 균형을 잡기도 하고 가볍지만 부피가 큰 짐들을 넣기도 한다. 사장로는 독이나 기관이 걱정되어 열어보고 싶지 않지만 약세를 보이면 선우복명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바로 공격해올까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덮개를 열어보았다.
그안에는 사람의 머리 수십개가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이 일그러져 알아보기 힘들지만 선우복명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검은 천에 붉은 주사로 이름을 적어서 수급의 머리에 둘러매었다. 첫글자가 사(史)로 시작된 몇개의 이름을 확인한 사장로는 허겁지겁 덮개를 다시 덮어놓고 뒤로 물러섰다.
사장로는 덮개를 다시 열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아서 희생하고 가족들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십사명의 천마신공을 수련한 천인이 산채로 불태워졌다는 말에 겁이 나서 도주를 시도했다. 자신이 도주해서 이들이 죽은것 같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의 도주와 이들의 죽음이 필연적 연결이 없음을 알면서도 밀려오는 죄책감을 어쩔 수 없었다.
사장로는 평생 힘이 아닌 계책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그것은 힘으로 교주를 능가할 수 없기에 사장로가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그러다 천마신공을 얻고 교주가 사라지자 밖에서는 마인이라 부르고 사장로는 천인이라 부르는 자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사장로가 커다란 힘을 얻자마자 더 강대한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사장로의 모든것을 부숴버렸다.
갑자기 사장로가 큰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옷을 찢자 선우복명은 사장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사장로의 무공이 매우 강한것은 아니지만 구유음풍선은 반양검에 상극인 무공이다. 비슷한 경지의 둘이기에 선우복명이 조금 밀린다. 그때 사장로의 품에서 책 한권이 떨어지자 선우복명은 참지 못하고 신형을 날렸다.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사장로는 허리를 숙여 천마신공의 비급을 챙기려 했다. 하지만 선우복명의 발차기에 비급을 회수하지 못하고 청해호에 떨어졌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적시자 사장로는 정신을 차렸다. 실성하기 일보직전인데 차가운 물에 밀어넣은 선우복명은 어쩌면 사장로의 은인이라고 칭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린 사장로는 곧바로 청해호 바닥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아직 내공이 돌아오지 않아 억지로 끌어올렸지만 약효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큰 내상을 입지 않았다. 사장로는 방향을 하나 잡고 호수바닥에 잠수한 채 은밀히 움직였다.
천마신공의 비급을 얻은 선우복명은 사장로를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곧바로 움직였다. 선우검파의 복수는 사씨가문의 수십의 목숨으로 충분히 갚았다. 이제는 죽은 손자를 잊고 선우가문의 미래를 그려야 한다. 천마신공이 마공이라고 하지만 그건 불완전한 운기경로만 강호에 퍼졌기 때문이다.
"신호를 보내라. 전부 철수해서 대기하다가 천살과 당문이 떠나면 사도는 우리가 접수한다."
천살이 소림을 봉문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선우복명은 가문의 무인들을 이끌고 사도로 향했다. 사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해듣고 사장로가 도망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몰래 감시했다. 덕분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씨가문의 식솔들을 전부 주살하여 복수를 할 수 있었고 천마신공이라는 희대의 비급도 얻었다.
'무공을 연구하고 수련하면서 천살이 사라질때까지만 기다린다. 그 뒤에는 선우가문이 천하에 우뚝 설 것이다.'
천마신공과 반양검 두가지면 천하제일을 논할만하다는 생각에 선우복명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가문보다 자기 자신을 더 크게 생각하는 사장로와는 달리 선우복명은 진심으로 가문만을 위했다. 천살이 떠나고 당문이 철수한 것이 확실시 되면 그때 사도에 들어가 무주공산을 차지하고 선우가문의 부흥을 시작할 것이다.
교주전 앞에는 백 하고도 이십팔구나 더 되는 시체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절반정도가 마인들이고 나머지는 살수들이다. 사천이 되는 교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시체가 타오르기 시작하자 교도들은 일제히 절을 하며 신의불을 경배했다.
시체가 너무 많아 다 타는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백구가 넘는 시체가 불탔지만 주변에 전혀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시체를 불태운것이 신의불이라는 확신을 더욱 부추겼다. 무언가를 태워 힘을 얻는 양화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소모해서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음화이기 때문이다. 보통 불은 음화와 양화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천살은 내공으로 음화를 만들어내서 시체를 '소멸' 시키는 것이다.
일원을 움직이면 매우 쉽게 해낼 수 있으나 천살은 일원에 의지하지 않고 외기를 움직여 직접 음화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일원이 순식간에 해낼수 있는 일을 일각이상의 시간을 소모해서 힘들게 해냈다. 시체가 전부 사라지자 천살은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외쳤다.
"명화교의 교도들은 들으라. 이곳은 이미 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진심으로 신을 섬기는 자들은 이곳을 버리고 진정한 불꽃을 찾아 떠나라."
천살의 원래 의도는 명화교의 교도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살의 말을 듣고 명화교도들은 삼만명이 넘는 무리를 지어 광서의 성화교로 향했다. 성녀가 있는 곳에 진정한 불꽃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신실한 교도들이 떠나고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이 떠났다. 사도와 청해호 주변에 남은 자들은 이만명도 되지 않았다. 그때 선우복명이 가문의 사람들을 이끌고 사도로 돌아왔다. 직접 교주가 된 선우복명은 명화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월교(日月敎)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름은 교라고 했지만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버리고 무림방파로 거듭났다. 경쟁적수가 없는 지역이라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황실에 서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하며 순식간에 서북부의 강자로 부상했다.
- 작가의말
鳩占鵲巢, 뻐꾸기가 까치둥지를 차지하다. 여기서 구는 비둘기가 아닌 뻐꾸기입니다. 검색해보니 비둘기라 했더군요. 사실 남의 둥지를 빼앗는 새를 통털어 구라는 글자로 표현했습니다. 뻐꾸기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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