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기침습
호매령은 천을 물에 적셔 핏자국을 씻어준 후 천사성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천사성의 호흡이 평온해지자 호매령도 한시름 놓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노는 자신이 천사성을 돌볼테니 호매령더러 연화봉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호매령이 연화봉에 도착하니 화산의 산문에서 조자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사매, 어두운 야밤에 혼자서 어디를 돌아다니는 것이오. 맹수라도 만나면 큰일을 당할 수가 있소."
"대사형, 글공부가 막혀서 효자봉에 다녀왔는데 유씨 삼형제가 천공자를 구타하고 있더라구요. 대화산의 제자로서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매가 오해한 것은 아니오? 유씨 삼형제가 천공자의 무공수련을 돕고 있다는 말은 나도 얼핏 들은적이 있소. 천공자는 뭐라고 하였소?"
"천공자는 피를 토하고 혼절했어요."
"사매는 내일 오후에 다시 천공자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물은 뒤 다시 사문의 어른들에게 알려도 늦지 않소. 서로 합의하에 벌인 대련일 수도 있는데 사매가 일을 크게 만들면 천공자도 난처하지 않겠소."
생각해보니 유백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았다. 호매령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내일 천사성의 말을 들어보고 자신이 오해한거면 유씨 형제들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대사형도 함께 가요. 큰일이 아니라면 대사형이 직접 유씨 형제들에게 벌을 주고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조자운은 일이 잘 풀려간다고 생각하며 호매령에게 오후에 함께 효자봉으로 가자고 약속했다. 조자운은 유씨 형제들에게 오늘은 무사히 넘겼으니 내일 오전 확실하게 천사성의 흉성을 끌어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천사성은 아침에 일어나 동자공을 수련했지만 가슴이 여전히 답답했다. 말을 못하는 아노가 자꾸 거슬렸고 힘없는 팔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들을 모조리 잡아서 산채로 털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아노가 약초캐러 떠나자 천사성은 무공을 수련하려 했다. 하지만 온몸에 열이 나고 속이 답답해서 개울에 가서 찬물로 몸을 닦았다. 배에 난 희미한 칼자국을 보니 자신을 칼로 찌르던 숙모가 생각나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붉게 충혈된 두눈을 보니 유씨 삼형제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잔것 같았다. 밤새 유씨 삼형제에게 얻어맞고, 반격하여 그들의 사지를 찢는 꿈을 반복했다. 새벽에 고함을 지르며 깨어난 것만 해도 수차례 되었다.
그래도 피를 토한것 치고는 몸이 멀쩡해서 다행이었다. 유씨 삼형제가 평소와는 달리 오전에 찾아왔음에도 천사성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들이 오리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빨리 오기를 내심 기다렸던 것이다.
"어제 실수로 손속이 과했는데 천공자는 괜찮은 것이오?"
유백의 질문에 천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욕지거리가 쏟아져나갈 것 같았다. 불을 지필 때 쉬지 않고 입김을 불면 머리가 멍해진다. 유씨 삼형제가 나타난 후 천사성의 머리는 계속 그런 상태이다.
"그럼 오늘도 대련을 계속 하겠소?"
천사성은 속으로 거절해야 한다고 소리 질렀지만 고개는 알아서 끄덕여졌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것 같고 자기 몸이 낯설게 느껴지는 현상에 천사성은 당황했다. 하지만 천사성의 당황은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유씨 삼형제 앞에는 냉랭한 얼굴을 한 천사성이 무표정하게 서있을 뿐이다.
대련이 시작되자 유씨 형제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항상 수비에만 치중하던 천사성이 공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옥쇄와전과 양옥불전을 천사성이 삼형제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공격적으로 나온 천사성은 허점을 많이 노출하여 쉴새없이 두들겨 맞았다. 반면 공격은 초식의 운용이 너무나 정직해서 유씨 삼형제는 손쉽게 피해냈다. 조자운은 천사성이 자꾸 자신이 숨어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께름칙했다.
유백은 유숙을 도와 천사성의 공격을 막아냈다. 나이가 어린 유숙은 체력도 부족하고 덩치도 작아 공격적으로 나선 천사성의 공격목표가 되어 남은 둘의 짐이 되고 있었다. 유백의 눈짓에 유숙은 천사성의 뒤로 돌아가 등뒤에서 서성거렸다.
유숙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천사성은 유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백은 천사성의 붉게 충혈된 두눈이 걸렸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유백과 유중이 앞에서 천사성의 시선을 끌고 있는 동안 유숙은 양옥불전의 초식으로 천사성의 등을 공격했다.
강한 공격에 당한 천사성은 몸을 급히 돌려 유숙을 공격했다. 그러자 곧 유중이 옥석구분의 초식으로 천사성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유숙은 내공이 아직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옥석구분의 위력이 미미하고 양옥불전이 오히려 더 위력이 있었다.
강한 공격을 연속으로 당한 천사성은 몸이 경직되었다. 한순간 누구를 공격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유백이 옥석구분의 초식으로 천사성의 등을 때렸다. 완전한 무방비상태에서 회심의 일격에 얻어맞은 천사성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선혈을 토해냈다.
'때려, 계속 때리란 말이다.'
조자운의 전음이 들려오자 유백은 두 동생에게 눈짓을 하고는 달려가 발로 천사성의 배를 걷어찼다. 유중과 유숙도 조자운이 지켜본다는 생각에 발길질에 힘을 실었다. 발길질에는 사정이 없지만 삼형제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다.
서안의 유가장은 상인가문이다. 송나라때 흥성했던 상업은 원나라에 이르러 천한 직업이라 완전히 탄압받았다. 명나라가 다시 들어서며 물자유통의 필요를 느낀 주원장이 상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유가장은 그 기회를 잡아 일약 서안의 대가문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십년도 안되는 사이에 너무 빠르게 부상하여 그 뿌리가 얕다. 거기에 상행을 돕던 안천표국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급히 화산의 끈을 잡았다. 덕분에 화산파의 속가제자가 차린 화룡표국의 도움으로 몇년동안에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자체로 지킬 힘이 없는 유가장은 세 아들을 전부 화산의 제자로 보냈다. 하지만 셋다 자질이 부족하여 속가제자에 머물렀다. 그래서 유씨 삼형제가 필사적으로 조자운이라는 동앗줄을 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자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땅에 엎드려있던 천사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거리는 소리는 지옥의 깊은 곳에서 올라온 것처럼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유백은 급히 손짓으로 동생들을 물리고 조자운이 숨어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엎드려있던 천사성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뒷발질로 등뒤의 유숙을 공격했다. 분명 둘사이는 반장이 훌쩍 넘는 거리가 있었지만 천사성의 발길질은 정확하게 유숙의 배를 가격했다. 이장이나 날아간 후 땅에 떨어진 유숙은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를 머금고 기절했다.
유백과 유중이 반응할 사이도 없이 천사성의 주먹이 유중의 가슴을 가격했다. 호흡이 곤란해진 유중은 컥컥거리며 천천히 쓰러졌다. 쓰러지는 유중의 옆구리를 향해 천사성의 강한 후려차기가 떨어졌다. 발을 뒤로 머리위까지 올린 후 내려오며 옆구리를 차는 동작은 무공을 몇년만 수련하고는 나올 수 없는 호쾌하고 아름다운 동작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유백은 천사성의 발길질을 피했다. 하지만 곧이은 옥쇄와전의 초식에 반응이 늦어 피하지 못하고 두팔로 막았다. 하지만 천사성의 주먹은 유백의 두팔을 피해 오른쪽 어깨에 내리 꽂혔다.
요해도 아닌 곳에 맞았지만 숨이 턱 막혀왔다. 유백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보며 추하다는 생각을 할때 복부에 강한 통증이 오더니 몸이 뒤로 날아갔다. 곧 뒤통수를 어딘가에 부딪히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천사성은 곧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유중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유중이 혼절해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몸을 돌려 유숙을 걷어찼다. 유숙도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고 조자운이 숨어있는 곳을 향해 덮쳐갔다.
현재 조자운의 사형제들 중에서 패검(佩劍)을 허락받은 제자는 몇명 되지 않는다. 조자운은 이년전에 매화검의 모든 초식을 능숙하게 펼쳐내어 패검을 허락받았다. 절세의 보검은 아니지만 서안에서 유명한 장인이 정련한 검은 이미 조자운의 손에 익어 있었다.
아직 검을 자신의 팔처럼 사용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이년의 시간은 검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천사성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조자운은 검을 뽑아들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검이 천사성의 살갗을 베어도 피가 흘러나오지 않자 더럭 겁이 났다.
차라리 천사성이 자신의 검에 이리저리 베이고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성의 몸은 검에 찔리고 베여도 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고 그저 살갗이 갈라질 뿐이다. 불가해의 현상을 마주하자 조자운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고 몸이 굳어 검끝이 무뎌졌다.
그래도 십년에 가까운 수련이 헛되지 않아 당황한 가운데도 천사성의 공격을 잘 방어하고 피해냈다. 하지만 천사성의 기세는 점점 더 흉흉해지고 조자운의 검세는 점점 더 위축되었다.
조자운은 평소 맹수들을 만나도 검 한자루면 손쉽게 처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천사성을 상대해보니 가죽이 두터운 맹수를 상대로 자신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음을 알았다. 천사성의 주먹과 발길질이 몸을 몇번 스쳐지나가자 지난 이십여일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후회되기 시작했다. 잠자고 있는 맹수를 자신이 억지로 깨운 것이다. 천사성에 의해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운아, 뒤로 물러서거라."
반가운 목소리에 조자운은 다시 기운을 차렸다. 무공을 가르치는 오사숙 한운명이다. 강호에 나간적이 한번도 없어 별호조차 없고 본신의 무공도 평범하지만 눈썰미가 뛰어나 어린 제자들을 키우는 일에는 적격인 사람이다. 그리고 평범하다는 것은 같은 배분의 고수들과 비교했을때이고 조자운에게는 충분히 강한 고수이다.
"대사형, 어찌된 일이예요?"
"어제 네 말을 듣고 유씨 형제들을 찾아가니 천사성이 흉성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구나. 내 믿지 못해 셋과 함께 와보았더니 천사성이 이지를 잃고 저 셋을 공격해 기절시켰다."
호매령은 유씨 삼형제가 보이지 않자 한운명에게 어제 일을 알리고 함께 효자봉으로 향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눈이 벌겋게 충혈된 천사성이 조자운을 핍박하고 있었다. 유씨 삼형제를 조심스럽게 한켠으로 옮겨놓고 바라보니 천사성과 한운명이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 작가의말
주인공이 순조롭게 화산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배우는 것을 기대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주인공들은 항상 천신만고를 겪고 나서야 겨우 손톱만큼 강해집니다. 누구의 말 한마디 듣고 글귀 몇개 보고 깨달음을 얻어 강해지는 것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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