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정검법
"맹주, 난 이만 서문가로 돌아가겠네. 오늘 천소협이 봐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맹주가 나를 위해 관을 짜야 했을 것일세."
천살과 일대일 대결을 마치고 돌아온 서문고검은 원각에게 작별을 고하고 훌쩍 떠났다. 서문고검이 예전부터 천살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제하더라도 자신의 검으로는 천살에게 큰 피해를 주기 어려움을 서문고검은 잘 알고 있다. 천살처럼 호신지기가 완성된 무인에게 완성된 쾌검이 아니면 타격을 주기 힘들다.
완성된 쾌검이라면 호신지기를 뚫고 상대의 몸을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고검의 쾌검은 완성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속도는 쾌라는 검의에 어울리지만 그 쾌검에는 힘이 실리지 않아 위력이 없다. 단순 빠르기만 해서는 천하제일검을 노릴 수 없다. 모든 쾌검을 익히는 자들의 최후의 고민이 바로 위력이다.
서문고검이 떠난 이튿날 남궁천이 천살과 대결했다. 남궁천의 칠정검법은 일곱가지 검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 일곱가지를 하나로 합쳐서 절정(絶情)검법으로 만들면 능히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지만 남궁천은 아직까지 그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남궁천은 우선 상(翔)의 검의로 천살과 대결했다. 상은 매와 같은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빙빙 도는 모습을 뜻한다. 남궁천의 검은 면면부절하게 천살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연환검의 극의라고 할 수 있는 남궁천의 검은 단독으로 하나의 검법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무공검법의 소우만천도 연환검의 검의를 담고 있다. 다만 내공을 사용한 움직임을 배제했기에 검의 연환에 제한을 받는다. 천살은 남궁천의 상을 상대하면서 연환검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공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라면 남궁천의 연환검을 상대하다가 내력이 끊겨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잠시후 남궁천은 예(銳)로 바꾸었다. 예는 쾌검이지만 서문고검의 쾌와는 달랐다. 서문고검은 내공의 힘을 최소한으로 해서 쾌를 만들어냈지만 남궁천의 예는 내공의 힘을 빌어 빠른 속도를 내고 있었다. 검에 내공을 주입해서 속도를 빠르게 했기에 위력도 강했지만 변화가 불가능하다. 서문초신의 쾌검이 수발이 자유로운데 비해 위력은 강하지만 경지는 낮다고 해야 한다.
천살은 튼튼한 몸과 불사공을 믿고 똑같이 쾌검으로 남궁천과 맞불을 놓았다. 천살의 쾌검은 서문고검의 쾌검과 닮아 있었다. 아직은 경지가 부족해 서문고검처럼 쾌검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서문고검의 쾌검보다 위력이 강해 상대하기 쉬운 쾌검은 아니다.
재미를 보지 못하자 남궁천은 곧바로 영(靈)으로 바꾸었다. 영은 변검의 극의를 보여주었다. 화산의 검이 환으로 변을 보조하는 것이라면 영은 순수한 변검이다. 목을 향해 찔러오던 검이 허벅지를 노리자 천살도 조금은 놀랐다. 이러한 변화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기에 천살의 대응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상과 예와는 달리 영은 천살의 몸에 몇개의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검에 실린 힘이 부족하여 극에 달한 횡련일기공의 호신지기를 뚫지 못했다. 천살이 점점 검의 변화에 적응해가자 남궁천은 격(激)을 건너뛰고 맹(猛)으로 천살을 상대했다.
격은 검에 진력을 섞어 상대의 병장기를 파괴하거나 상대의 손아귀 힘을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예전에 천살에게 사용한 적이 있다. 결과 천살이 진력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자신의 쇄검술의 위력을 강화했다. 거기에 진력을 상대하는 방법도 어느정도 알아냈기에 남궁천은 격을 생략했다.
맹은 중검의 일종이다. 중검은 강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과 강한 기세로 상대를 위축시키는 방식으로 나뉜다. 맹은 그중에 후자로 검에 외기가 실리면서 강한 기세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스치기만 해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기에 검을 피하는 동작이 커진다. 큰 동작으로 피하기 때문에 반격의 기회를 잡기 힘들어 일방적으로 수비에 임해야 한다.
천살도 검에 실린 힘이 강맹해 보이자 회피를 선택했다. 다만 천살은 강한 내력과 튼튼한 몸을 믿고 피하는 동작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천살이 간간이 하는 반격은 남궁천의 공격의 맥을 끊어버렸다. 끊이지 않는 강맹한 공격으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야 하는데 자꾸 맥이 끊기자 남궁천은 급(急)으로 바꾸었다.
급은 쾌와 다른 검의다. 쾌는 빠르기만 하면 되지만 급은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숨쉴틈을 주지 않는다. 쾌는 일정한 박자가 있지만 급은 쾌보다 반박자정도 빠르게 공격을 시전한다. 가장 적합한 시점에 공격을 하는게 아니라 그 시점보다 조금 빠르게 공격을 진행해서 상대의 박자를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이 검의는 검법을 사용하는 자의 박자감이 매우 훌륭해야 한다. 비록 박자를 제대로 따르지 않지만 정확한 박자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칠정검법의 대성이 힘든 것은 급을 제대로 익혀내는 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급을 제외한 남은 여섯개를 대성해봤자 칠정검법의 위력이 절반도 나오지 않는다.
남궁천의 검은 소나기처럼 천살의 몸을 향해 쏟아졌다. 원래 공격이 들어와야 할 시점보다 조금 더 빠르게 들어오는 공격들이기에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듯 해서 수비하는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남궁천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규칙을 가진 공격이지만 수비하는 천살은 그 공격의 규칙을 알 수 없기에 긴장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수비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의 공격은 천살의 몸에 주기적으로 적중되었지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나름 많은 힘이 실린 공격이지만 천살의 호신지기를 넘어 육체에 피해를 주기 힘들었고 가끔 육체에 피해를 주는 공격이 나오지만 불사공에 의해 바로바로 회복되었기에 큰 소용이 없었다.
남궁천은 마지막 검의인 패(覇)를 꺼내들었다. 내력을 발산하여 주변의 일정 영역을 제압함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검술로 칠정검법이 절정검법으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쥔 검의이다. 패의 상태에서 남궁천은 예와 급의 검의에 따라 천살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더 빠르고 더 강한 공격들이 천살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패의 상태에서 여섯가지 검의를 전부 사용할 수 있다면 절정검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남궁천은 기껏해야 두가지 검의를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천살과 목숨을 건 대결을 하면 위급한 도중에 실마리를 얻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천살의 수비력이 너무 강해 천살마기도 끌어내지 못했다.
패의 상태에서 예와 급으로 빠른 공격을 하자 천살도 대응하기 힘들었다. 수비만으로 힘들다는 것을 자각한 천살은 슬슬 응익검의 초식들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은 응비만리(鷹飛萬里)였다. 매는 땅에 한번도 내려앉지 않고 만리를 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천살의 응익검은 한번도 거두어지지 않고 남궁천의 목과 심장 등 요해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했다.
남궁천은 너죽고 나죽자 식의 천살의 대응에 순간 판단이 늦어져서 공격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천살은 남궁천의 공격이 주춤해지자 곧바로 비익쌍비(比翼雙飛)의 초식을 사용했다. 태악삼청봉에서 영감을 얻은 이 초식은 찌르기 한번에 두개의 목표를 동시에 노린다. 하나만 막으면 되는게 아니라 둘다 막아야 한다. 후예사일과 비슷하지만 베기가 아닌 찌르기 초식인 것이다.
남궁천은 비익쌍비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지만 공격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게 되었다. 태악삼청봉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쉽게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살은 곧바로 칠성연주의 초식을 사용했다. 응익검중에서 가장 강한 초식이라고 할 수 있는 칠성연주가 남궁천에게 어느정도 먹히는지 궁금했다.
남궁천의 검과 천살의 검은 일곱번의 부딪힘을 끝으로 멈추었다. 남궁천은 격동된 마음을 힘들게 가라앉혔다. 자신은 몇년간 아무런 진보도 이루어내지 못했는데 천살은 경천동지의 변화를 이루어냈다. 특히 마지막 공격에는 변과 환 그리고 쾌의 검의가 적절하게 섞여있고 중검의 묘리도 조금 섞여 있었다.
'칠정검법의 일곱 검의를 극의로 섞을 필요가 없었구나. 조금씩 가져다 섞기만 해도 큰 위력을 보일 수 있는데 지금까지 내 오만이 내 눈을 가렸구나.'
남궁천은 절세의 기재이다. 젊은 나이에 이미 남궁가에서 적수가 없었고 남들이 어려워하는 칠정검법도 쉽게 익혀냈다. 차차 강호에도 적수가 별로 없음을 알게 된 남궁천은 칠정검법을 대성하고 절정검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칠정검법의 대성까지는 순조로웠으나 절정검을 이루는데 큰 난관을 겪었다.
그것은 순전히 남궁천의 욕심 때문이었다. 극의에 이른 검의들을 서로 섞어 절세의 절정검을 익히고 싶었다. 하지만 극에 달한 검의들이 그렇게 쉽게 섞일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하나가 아니라 일곱의 검의가 극으로 섞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천의 자존심은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았다. 오늘 스물을 갓 넘은 천살과 대등한 대결을 벌이고 나서야 비로소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물살때의 남궁천이 지금의 천살과 대결을 한다면 열합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한 검법이오. 칠정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군. 무슨 검법인지 가르쳐주면 고맙겠소."
"응익검이라고 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검법입니다."
남궁천 자신은 칠정검이라는 검증된 검법을 배워서 고수가 되었다. 그런데 천살의 말을 들어보니 응익검이라는 검법을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듯 하다. 다시 한번 부끄러움을 느낀 남궁천은 천살에게 진심을 담아 포권을 했다.
"천소협이 마교를 떠나 정파의 품에 안길 생각이 있다면 이 남궁천을 찾아오시오. 내게 딸 하나 있는데 자랑 아니고 천하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뽑힐 미모를 자랑하오."
"이미 혼인을 한 몸이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남궁대협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돌아가니 때마침 해남파 문주 오천과 보타암의 혜절사태가 도착해 있었다.
"이 남궁천이 오늘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천소협도 마찬가지요. 작은 깨달음을 얻어 며칠안에 무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오. 다만 그래도 이길 엄두가 나지 않소."
남궁천의 말을 원각이 받았다.
"더 큰 문제가 있소. 송운자가 태극혜검의 깨달음을 수습하고 무공을 회복했소. 그리고 편지를 보내왔는데 남궁대협이 직접 확인하시오."
남궁천이 편지를 받아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천살마성의 수명이 크게 늘어나 아직 죽을때가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천살마성의 성라운포라는 초식이 송백자도 단번에 즉사시킬 정도로 강한 위력을 보이니 조심하라는 말도 적혀있었다.
"이것 참 무안하구만. 이 남궁천이 상대의 자비에 힘입어 목숨을 부지한 꼴이 된게 아니오."
남궁천도 송백자 정도의 고수를 즉사시킬 자신이 없었다. 송백자가 이십여명의 사형제와 사질들과 함께해서 조금 방심한 것도 있고 가장 큰 패착은 천살을 포위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 것이다. 물러나는 와중에 천살의 공격이 터져나오자 최선을 다한 대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황실에서 온 서신이오. 이미 화산에 확인이 끝났고 마교에도 확인한 내용이오."
황실에서 온 서신에는 천살이 동자공을 익혔음을 밝혔다. 비록 혼인을 했지만 합방을 한 적이 없고 지금도 동자신을 유지하고 있음을 마교에서도 확인시켜 주었다. 황실에서는 무림맹에 미인계로 천살의 동자신을 파괴할 것을 요구했다.
"송운자의 서신이 없었으면 황실의 서신은 무시했을 것이오. 하지만 죽이지 않고 생포를 하려면 미인계를 사용해야 할 수밖에 없을 듯 하오."
소림제자인 원각을 대신해 팽가의 최고수 팽월이 대신 말했다. 팽월의 무위를 가늠해보니 원각보다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송백자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남궁천은 문든 드는 생각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남궁가에서 솔선수범을 하겠소. 내가 서신을 써줄테니 내 딸 남궁청아를 불러오시오."
- 작가의말
초반에 주인공의 동자공 때문에 말들이 조금 있었습니다. 사실 여자들이 주동적으로 덤벼드는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한 큰그림입니다. 남자들의 로망이 뭡니까? 예쁜 여자가 내가 싫다는데 막 매달리는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동자공을 지키기 위한 천살의 고군분투와 동자공을 깨기 위해 몸을 던지는 미녀들의 쟁투가 곧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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