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락운산
무형지독이 덮쳐오자 신화공은 곧바로 움직였다. 불사공도 신화공의 도움을 받으며 무형지독에 대항해 나갔다. 무형지독이 너무나 강해서 신화공은 급하게 기운을 보충했다. 자연지경을 이룬 덕분에 신화공은 빠르게 소모된 기운을 회복했지만 급히 모은 기운은 신화공에 비해 정심함이 부족했다.
천살마기는 묵묵히 무형지독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혼돈이 앞에 나타났고 지난번과는 달리 그 혼돈속에는 자신도 있다. 현재 천살마기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이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신화공이 기운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지만 모인 기운의 수준이 매우 낮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신화공이 전부 소모될 것이다. 그렇게 천살이 죽어버리면 천살마기는 흩어졌다가 다시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무형지독에 포함된 자신과 동일한 기운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천살마기 자신의 기운이 크게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독기운은 칠변절독과 성질이 비슷하지만 독성이 훨씬 강하다. 신화공이 이기면 신화공을 소멸시키고 천살의 육체를 장악할 수 있고 신화공이 지면 천살이 이대로 죽어버린다.
물론 신화공이 진 후 천살마기가 전력으로 천살을 보호한다는 선택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천살마기도 크게 소모된다. 그사이 천살이 신화공의 공력을 회복해 버리면 영원히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천살마기의 고려범위에 들지 않았다.
천살마기의 영성은 '창조적 사고'의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천살이 만들어낸 성라운포의 초식을 더욱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성라운포의 초식을 만들어낼 능력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생명체에 깃들었던 경험으로 많은것을 배웠지만 그 배운것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알아내는 능력이 부족하다.
생명체에 깃든 천살마기가 진정한 혼돈을 만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영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예전에 마주친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이 본능에 새겨져서 본능이 어떻게 하라고 알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본능도 영성도 명확한 답이 없기에 천살마기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신화공과 무형지독의 충돌로 천살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놓이자 천살 특유의 끈질김이 빛을 발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천살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은 답을 알고 있는데 그 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말들과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회상하면서 답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생각은 쭉 이어지다 두번째로 복마전으로 떨어진 이후에서 멈췄다. 언젠가 답을 찾아낸 것 같은데 간질간질하며 떠오르지 않았다. 천살은 다급한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차분히 복마동에 두번째로 떨어진 후의 일들을 차근차근 짚어보았다.
'불파불립, 불파불립!'
답을 찾은 천살의 몸은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횡련일기공이 깨져서 혈도들이 쓸모없어졌다. 천살은 계속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미 파(破) 했으니 새로 립(立) 해야 하지 다시 복(復 - 돌아가다)하려는 생각은 어리석었다.
천살의 하단전을 중심으로 혈도들이 하나하나 희미해졌다. 그렇게 전신의 혈도들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존재한 적 없다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경락이 사라지고 맥이 사라지고 결국에는 세개의 단전을 제외한 모든 혈도들이 사라졌다.
보통 무림에서 말하는 무혈지신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천살은 이게 끝이 아님을 알고 있다. 천살의 하단전도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혈도가 사라지자 자연지경에서 무혈지신으로 경지가 오른 천살은 강대한 내공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지경은 체내의 내공이 소모되면 혈도를 여는 것으로 순식간에 내공을 회복하는 경지이다. 지금의 무혈지신은 내외의 구분이 아예 사라져서 체외의 기운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경지이다. 그렇다고 체내에 내공이 없는 것은 아니고 체내에도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기운보다 밀도가 수십배는 높은 기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온갖 잡다한 기운들이 조화롭게 모여서 천살의 의지에 따라 고분고분 움직였다.
모든 기운을 마음대로 쓸 수 있기에 내공의 정제는 의미가 없다. 내공을 정제하는 것은 사용하는 중에 소모를 줄이고 위력을 늘이기 위한 노력이다. 여러가지 기운을 섞어서 사용해도 서로 충돌이 없고 혈도도 사라졌기에 그저 내키는대로 가져다 사용하면 된다.
현재 천살의 지휘에 복종하는 내공의 절대적양은 천살마기를 초월했다. 비록 수준이 천살마기에 못 미치지만 신화공이 천살의 편이다. 이대로라면 천살과 신화공의 협공으로 소멸될 위기를 맞은 천살마기는 기존 선택이 사라지고 새로운 선택이 하나 생겼다.
신화공과 불사공 그리고 천살의 내공의 협공으로 위축되었던 무형지독은 갑자기 강한 힘을 얻었다. 천살마기가 무형지독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강한 핵이 생긴 혼돈은 주변의 기운들을 강제로 끌어모아 자신의 덩치를 불려나갔다. 열세에 처했던 무형지독이 갑자기 판세를 뒤집고 신화공과 천살의 내공을 압도했다.
무형지독이 강해지자 신화공은 뒤로 한발 물러섰다. 천살의 내공이 마르지 않는다지만 기운의 질적차이 때문에 무형지독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불사공이 마르지 않는 내공으로 빠른 복구를 하지 않았다면 천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길고도 답답한 시간이 흘렀다. 싸우는 법을 모르던 무형지독이 힘을 분산해서 여러곳을 동시에 공격하는 법을 터득했다. 모든 힘을 집중해 한곳만 공격할 때는 막아내지 못해도 불사공 덕분에 빠르게 회복하여 별 타격이 없었는데 지금은 여러곳이 동시에 공격 당하니 불사공에 의한 회복이 점점 느려졌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무형지독이 승리할 것이 뻔하다. 그때 조용히 힘을 모으던 신화공이 움직였다. 신화공 역시 '창조적 사고'가 부족한 영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성물과 접촉한 적이 없기에 매우 기본적인 본능만 가지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막무가내로 무형지독에게 덤벼들다가 소멸되어야 하지만 성물이 사라질 때 마지막으로 전해온 '사명'이 있기에 신화공은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
신화공은 자신을 억지로 압축한 뒤 혼돈속에 뛰어들었다. 혼돈속에 질서가 뛰어들자 혼돈은 강대한 기운으로 질서를 난도질했다. 신화공은 반격을 꿈꾸지도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만 집중했다.
신화공이 혼돈속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기운을 잡아두자 천살은 반격을 시작했다. 천살의 몸속의 기운들은 매화만천, 비익쌍비, 태악삼청봉, 응비만리, 칠성연주, 성라운포 등 초식을 사용하며 무형지독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그전까지는 공격을 막아내는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지금은 내공으로 몸속에서 초식을 펼칠 여유까지 생겨났다.
비록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고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천살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육체가 아닌 순수한 내공으로 몸속에서 초식을 펼쳐냈다. 자신을 가두던 모든 속박이 사라진 것 같은 자유로움이 천살에게 커다란 환희를 가져다 주었다.
모든것이 준비되자 본능이 억지로 눌러놓고 있던 태극혜검의 깨달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천살마성을 품고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단련된 본능은 태극혜검의 깨달음이 독이라는 것을 알고 억지로 눌러버렸다. 다행히 천살이 여러모로 부족한 상태에서 태극혜검을 접했기에 그 깨달음이 강하지 않아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을 수 있었다.
그간 신기할 정도로 태극혜검에 대해 한번도 떠올린적 없었던 천살의 뇌리에 태극혜검의 글귀들이 떠올랐다. 지금 무형지독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천살의 얼굴은 분명 붉어졌을 것이다.
태극혜검에는 태극밖에 없다고 했는데 이제야 혜검이 보인 것이다. 그 혜검은 실제 검이 아니라 번뇌를 없애고 심마를 자르는 마음의 검이었다. 송운자는 경지가 부족한 관계로 혜검을 버리고 태극만 취하자 다시 무공을 회복했다. 하지만 천살의 의도치 않은 간섭 덕분에 평생 그 경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혜검은 천살의 번뇌를 자르고 미망을 없앴다. 천살의 초식들의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필요한 부분을 보듬으며 응익검과 성라운포를 완성으로 이끌었다. 머릿속이 점점 또렷해지자 천살의 눈앞에는 주마등이 흘렀다.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 돌이켜본 천살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힘없던 옛날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힘을 얻은 후에도 그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했다. 복수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가리고 있던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 치졸함과 이기심이 느껴져서 다 잊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기억들은 더욱 또렷해지며 천살의 정신을 정련하고 담금질했다.
태극혜검의 태극은 천살의 상단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하단전과 중단전이 지워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국 중단전까지 사라지자 천살마기는 천살의 상단전으로 침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상단전에 자리잡은 태극이 천살마기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에서 신화공이 버티고 있고 밖에는 천살의 공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무엇인가 변화가 없이 이대로 흐르면 천살마기의 소멸로 결말짓게 된다. 생존이 위협받자 천살마기의 본능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천살의 공격을 무시하고 천살마기는 신화공을 덮쳐갔다. 한선후의 천살마기가 신화공의 공력을 삼키던 것처럼 신화공을 삼켜버리려 한 것이다.
양은 천살마기가 더 많지만 한선후의 경우와 달리 둘은 동격의 기운이다. 격이 같을뿐 아니라 신화공은 혼돈에 뛰어들기전에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압축했다. 비록 더 높은 격으로 올라서지 못했지만 천살마기에게 쉽게 먹히지 않았다.
천살마기가 모든 힘을 신화공에 집중시키자 혼돈의 기운은 천살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특히 성라운포와 같은 초식들을 이용해 작은 힘으로 큰 위력을 내기 때문에 내공의 격이 혼돈의 기운보다 조금 낮은 문제점이 보완되어 빠른 속도로 혼돈의 기운을 소멸시켰다.
긴 시간이 흐르자 혼돈의 기운이 전부 천살에 의해 소멸되고 신화공을 감싸고 용을 쓰는 천살마기만 남게 되었다. 천살의 기운들은 천살마기와 격이 너무 차이가 나서 신화공의 도움이 없다면 천살마기를 소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신화공은 천살마기에게 포위되어 밖의 상황을 모르기에 천살을 도울수 없었다.
그때 상단전의 태극이 회전을 시작했다. 혜검이 다가와서 천살마기의 넘쳐나는 부분들을 잘라버렸다. 혜검이 천살마기를 쿡 찌르고 들어가서 신화공에 닿았다. 혜검의 뜻을 받아들인 신화공은 천살마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넘치는 것을 버리고 부족한 것을 보충받은 천살마기는 서서히 변화해갔다. 단순히 강한 힘을 가진 기운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기운으로 바뀌어갔다.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경이로운 감정으로 느끼고 있는 천살마기에게 천살이 말을 걸었다.
'처음으로 인사하는 것 같구나. 난 천살이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 근데 난 누구지?'
천살마기의 말에 천살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너는 자신을 모르는구나. 다행히 나는 알아. 넌 일원(一元)이야.'
진명(眞名)을 얻은 일원은 천살의 몸속에서 천지개벽의 변화를 일으켰다가 다시 무로 되돌렸다. 일원이 천살의 몸속에 자리를 잡자 몸속의 내공들이 전부 사라졌다. 격이 너무 높은 기운이 자라하자 알아서 피해버린 것이다.
모든 과정이 끝나자 천살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내가 이겼다!"
운명을 이겨낸 자의 포효가 복마전 전체를 울렸다. 복마전이 천살의 환호성에 흔들렸다. 절세신응 우득우익이라 씌여있는 옆에 이끼들이 후두둑 떨어지며 새로운 여덟글자가 눈에 띄었다.
소림미승 약규불심.
- 작가의말
星落雲散, 별이 떨어지고 구름이 흩어지다. 여기서 별은 천살마성이고 구름은 무형지독을 말합니다.
창조기연의 시작은 초화규가 신화공을 들고 복마전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소제목이 수중망월, 달이 들어갔습니다. 두번째 기연은 발운견일, 그렇습니다, 해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발운견일에서 제가 창조기연은 A/S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다들 제가 자화자찬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겸손한 글쇠의 예고였을 뿐입니다. 오늘 성락운산, 별이 들어간 소제목으로 창조기연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일월성신, 우리 말로 해, 달, 별의 기연이 끝내 완성되었습니다. 다행히 올해 안으로 기연 삼박자를 완성했습니다. 추후 사씨가문의 정보담당자 사이다(史耳多 - 귀가 많다)의 빈번한 등장이 예상됩니다. 이제부터 천살은 꽃길만 걸을 것입니다. 다만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해서 작은 걱정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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