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초출
신화동을 벗어난 천살과 고삼은 서안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공력이 갑자기 강해진 덕분에 고삼이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바뀐 내력에 적응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경공을 사용하는 것이다. 기운이 전신에서 움직이고 쉬임없이 움직이기에 초식수련보다 훨씬 적응이 빠르다.
내력의 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고삼의 공력은 훨씬 강해졌다. 내공의 성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삼은 자신만 소양공을 이루고 천살은 신화동을 방문한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양공의 강한 힘을 느끼며 마음속 깊이 천살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천살마기와 신화공과 불사공을 품고 혼원동자공을 극성으로 익힌 천살은 타심통을 이루지 못했기에 고삼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웃다가 배가 터져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천살은 적당히 달렸다 싶자 노숙을 결정했다.
"고삼, 이제부터는 나를 대형이라고 불러라. 강호에서 누군가 물어보면 초출이라 하고 이름을 물으면 그저 고모(高某)라고 답하거라."
"네, 대형, 분부를 명심하겠습니다."
천살은 알몸을 한 고삼의 전신을 나뭇가지로 두드렸다. 횡련태보와 횡련일기공의 수련을 하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빠르게 폭발적인 성장을 보일 수 있는 내공과는 달리 외공은 하루하루의 수련이 쌓여서 어느 순간에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수련을 허투루 건너뛸 수 없다.
외공의 수련이 끝나자 곧바로 소양공의 수련에 임했다. 외공의 수련으로 몸이 충분히 풀리고 혈도의 기운들이 자극을 받았을 때 소양공을 수련하면 효과가 더 좋았다. 단전에 묵직하게 쌓이는 내공은 고삼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혈도에 내공이 쌓일 때는 확연한 느낌이 들지 않지만 단전의 내공은 쉽게 헤아릴 수 있어 성과가 바로바로 느껴진다.
천살과는 달리 고삼은 소양공과 횡련일기공을 동시에 수련할 수 없다. 소양공의 수련이 끝나자 편한 자세로 횡련일기공의 운기를 다시 했다. 단전이 뱉어낸 일부 기운들과 몸속에 흩어진 기운들이 혈도에서 혈도로 움직이다가 적당한 혈도에 깃들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단전에 내공이 빠르게 쌓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체가 올 것이지만 낙심하지 말고 매일매일 수련을 꾸준히 하면 언젠가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형의 격려 감사드립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형의 말씀을 믿고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고삼에게 대형이라 부르라 했는데 고일을 잃은 고삼은 천살을 진짜 대형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당무영과의 우정과 마찬가지로 대형이라 부르는 고삼이 싫지는 않았다.
서안에 도착한 뒤 개봉으로 향하는 배를 구했다. 화산과 가까운 곳에 오자 고삼은 불안해 했지만 천살은 태연자약했다. 자신을 알아볼 사람도 없고 알아보더라도 자신에게 해코지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신화공의 내력이 움직일 때 성라운포를 몇번 사용해 보았다. 덕분에 초식에 더욱 익숙해져서 혼원동자공의 내력으로도 한번정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사용하고 나면 작지 않은 내상을 입겠지만 말이다.
서안에서 대장간을 지나갈 때 고삼은 대장간에 걸린 검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천살은 피식 웃으며 고삼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면 당무영한테 검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라. 당무영의 야장 기술이 대단하다고 하더구나. 저런 대장간에 걸어놓은 보기만 좋은 검보다 훨씬 좋은 검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내게 좋은 철도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감사드립니다. 대형의 은혜를 이번 생에 다 갚을 수 없을 듯 하니 다음생에 소나 말로 태어나서라도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삼의 말에 실린 진심이 천살을 기쁘게 했다. 수하들 중에 고일은 죽었고 왕쌍말과 연화훈은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처음으로 의지했던 서창훈에게 실망하고 서창훈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반항심으로, 복수심으로, 여러가지 감정으로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상대의 진심만큼 천살의 마음에 위로가 되는것이 없었다.
문득 유씨 삼형제가 궁금해진 천살은 고삼을 객잔에 두고 홀로 유가장으로 향했다. 성라운포를 사용하며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고 덕분에 명현공의 경지가 높아졌다. 무가도 아닌 유가장에 몰래 침투하는 것은 손쉬웠다. 유씨 삼형제는 팔다리가 불구가 되어 침대신세를 지고 있었다.
유가장에서 유씨 삼형제를 제외하고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바로 화산에서 호매령의 시녀로 지내던 연화였다. 시녀들에게 소부인으로 불리우는 연화는 직접 유백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연화는 호매령을 따라 서안에 왔다가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호매령을 제쳐도 조자운이 꼭 자신과 혼인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다 우연히 유백과 만나서 눈이 맞게 되었다.
사실 유백은 화산과의 접점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연화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다 연화가 조자운과 함께 자랐고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연애경험이 전혀 없는 연화는 유백의 적극성에 감동하여 유백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연화가 화산을 떠나기 며칠전 권파의 배신자인 변장로가 죽었다. 고인이 사용하던 물건을 태워주는 관습이 있기에 연화는 아노와 함께 변장로의 집을 정리했다. 거기에서 변장로의 일기를 발견했는데 글을 잘 모르는 연화는 무공서인줄 알고 몰래 숨겨서 유백에게 가져다 주었다.
유백은 그 일기를 가지고 이러저리 고민하고 가늠하다 결국 무당과 거래를 하였고 천살에게 맞아서 불구가 된 것이다. 천살이 다리 두개만 부러뜨렸기에 연화는 그후 아이 둘이나 낳고 유가장에서 소부인 대접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천살은 연화를 보자 호매령 생각이 나서 기분이 울적해졌다. 자신을 키워주던 숙모는 식칼로 배를 찔렀다. 처음으로 의지했던 서창훈은 다른 목적이 있었고 결국 천살에게 패하고 자결했다. 천살을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아노는 조부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처음 이성으로 호감을 가졌던 호매령의 부친은 천살과의 대결에서 사지를 쓸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어찌어찌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로 회복한다 해도 무인으로서는 이미 끝났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화령은 가짜였고 천살에게 해코지 했다. 음차양착(陰差陽錯)으로 다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사실 남보다 못하다.
사부인 교주와는 사제지간의 정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서로 이용하는 사이이다. 사형제였던 여섯 중 화운은 직접 죽였고 남은 몇몇의 죽음에도 천살이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 자신에게 절반의 진심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 조유천은 다리 하나 잃고 자신의 손자를 죽이고 행적을 감췄다.
선우복명은 조유천보다 훨씬 많은 진심을 보였다. 하지만 선우가문과 천살 사이에서 결정해야 한다면 어느쪽 손을 들어줄 지 뻔하다. 지금 천살을 지탱해 주는 것은 당무영과의 우정과 고삼의 진심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객잔으로 돌아간 천살은 수련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객잔을 떠났다. 하루정도 수련을 쉬려고 했는데 서안에 한시라도 더 있기 싫어졌다. 고삼 역시 수련을 쉬는것이 찝찝했던 터라 천살의 결정에 쌍수를 들고 찬성했다.
천살은 뱃전에서 아침에 먹은 것들을 확인하는 고삼을 보며 쿡쿡거렸다. 예전에 사도를 들락거리면서 고삼은 한번도 멀미를 한 적이 없다. 최근 내공을 수련하면서 감각이 예민해지고 기운이 급격히 늘어나 안정적이지 않기에 물살이 센 구간에서 갑자기 멀미가 온 것이다.
내공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다면 간단한 운기로 멀미를 멈출 수 있지만 고삼은 아직은 기감이나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외공으로부터 시작하였기에 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운기를 할 수 없다.
충분히 고생했다 생각한 천살은 심술을 거두고 고삼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가볍게 올렸다. 천살이 등을 두어번 토닥거리자 멀미가 바로 멎었다. 천살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흔들리는 배에서 운기로 멀미를 멈추기를 기대했는데 실망이구나."
"대형을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더욱더 정진하겠습니다."
농담이라는 것을 모르는 고삼은 흔들리는 배에서 운기하는 수련을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소양공 대신 간단하면서도 오래 익혀온 횡련일기공의 수련을 했다. 천살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고삼은 그뒤로부터 시간만 나면 내공수련에 집중하였다. 내력의 양에는 도움이 안되지만 집중력이나 기감의 발달 그리고 기운의 사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천살의 음혈은 장검이라 숨기기 쉽지 않다. 현재 개봉성안에는 주체가 다시 만든 금의위와 동창의 무사들이 득실거린다. 주원장이 폐단을 발견하고 없앴는데 황권이 든든하지 않은 주체가 대신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다시 살린 것이다.
사라졌다가 다시 정식기관으로 편성된 금의위와 동창의 무사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배에서 사람들의 대화와 연도의 객잔에서 얻어들은 것들로 개봉성의 분위기를 짐작한 천살은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밖의 객잔에 짐을 풀었다. 마침 손님이 떠나며 방 하나가 자리나서 둘은 노숙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두분 형장께 부탁이 하나 있소."
천살은 음혈을 방에 두고 고삼과 함께 객잔 일층의 주점에서 식사를 했다. 덩치에 알맞게 많은 음식을 시킨 둘이 차를 마시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천살이 고개를 들어보니 일남일녀가 포권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지."
천살이 일어나서 포권을 하자 고삼도 엉겁결에 같이 일어섰다.
"우리 형매가 이 객잔에 미리 예약을 했는데 객잔의 실수로 빈방이 없다고 하오. 내 사례는 충분히 할테니 방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시는게 어떻소? 다른 손님들은 개봉성에 들어가 있어 내 형장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소."
"우리도 먼길을 왔소. 배에서 내려 겨우 방을 하나 잡았는데 내줄 수 없소. 더 큰 사례를 바라고 이러는거 아니니 다른 손님들한테 알아보시오."
천살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남자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여자가 급하게 천살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이 객잔에 방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소. 사례비는 넉넉히 드릴테니 두분께서 다른 객잔을 알아보시는게 어떠시오."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소. 거절하오."
여자의 얼굴에도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정을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거절을 한다. 이번 법사가 끝나면 무림맹의 맹주를 새로 선출한다.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대놓고 만나는 것을 상대가 좋아하지 않아 방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촌티가 풀풀 나는 두 사내가 양보할 생각이 없다.
"모용세가의 모용궁현이요. 더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사례금을 챙기고 방을 내놓으시오."
"천화장의 천모요.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데를 알아보시오."
모용가의 쌍둥이는 성격이 좋다고 말하기 힘들다. 지금까지도 체면을 생각해 충분히 참아왔다고 해야 한다. 모용궁현보다 성격이 더 더러운 모용부설이 손을 뻗었다. 고삼은 엉거주춤하게 서있다가 상대가 천살을 공격하는 듯 하자 천살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용부설은 청상은설의 공력을 약하게 손에 담았다. 음한계열의 내공 중 수위를 다투는 청상은설의 내력으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심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온몸이 소양공의 극양의 기운으로 충만한 고삼의 몸에 닿자 강한 반탄력을 느꼈다. 횡련일기공의 반탄력과 소양공의 기운이 극음의 기운을 만나 생긴 반탄력이다.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구나. 어느 가문의 누구냐?"
모용부설이 얼굴을 찡그리고 질문했다. 상대의 극양의 기운이 반탄력을 타고 손목을 넘어왔다. 웬만한 양강계열의 공력은 청상은설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는 가볍게 막아내고 반격까지 가했다. 횡련일기공의 도움 덕분에 더 강한 반탄력을 보였는데 모용부설은 순수한 내공의 반탄력으로 오해하고 고삼의 실력을 고평가한 것이다.
"천화장의 고모요. 그리고 강호초출이오."
- 작가의말
추천란에 ‘미.남의 작가분이 쓰시는...’ 이라고 올라와 있더군요. 흐뭇했습니다. 누군가 또 내 작품을 추천했구나.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향이 있는 꽃은 하느작거리지 않아도 나비와 벌이 알아서 찾아오는데.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 한번은 들어가 봐야지.
다른 분의 추천글이더군요. 그분이 예전에 쓴 글의 제목을 줄여서 미.남 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초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글쓰는 사람들 중에 얼굴이 내 절반정도 되는 사람 하나 없었을까. 왜 문피아에서 나와 이 글을 읽는 사람들만 잘생기고 이쁘다 생각했을까. 크게 반성하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변장로의 이름은 절자(節姿)입니다. 그리고 굳이 서안에 들린 건 다른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는 길을 두고 다른 길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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