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유어
청현자는 이가 갈렸다. 천살마성이 소속된 부대가 명을 받고 출진했다는 첩자의 정보에 청표자와 청명자 셋이서 급히 출발했다. 천살마성이 본진에 있고 언제 어디로 출진할지 몰라 세명의 장로와 무당오자는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이각뒤에 다른 문파들에게도 알린다고 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아예 안 알려주면 추후에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다른 문파들에게는 조금 늦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이각이라면 길다면 길 수 있지만 짧다면 한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장로들과 두명의 무당오자의 합류를 기다리지 못하고 셋이서만 출발했다.
천살마성의 무공은 그저 그랬다. 전장에서 단련되었는지 검법이 매우 실전적이지만 내공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경공 하나만은 제대로 배운 티가 나서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천살마성의 부대는 서른명정도로 크게 성가시진 않았다. 천살마성이 본격적으로 경공을 사용하며 도망가기 시작하자 자신의 부하들과 자연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청현자는 천살마성에게 부하들을 위하는 마음 따위는 없을 것이니 머리가 멍청한 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부하들 몇을 희생시키면 더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경공이 가장 느린 청명자가 천살마성을 뒤쫓고 청현자와 청표자는 앞질러가서 철살마성의 퇴로를 제한하기로 했다. 그러자 천살마성은 도망가는 속도를 늦추고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쥐가 이빨을 드러냈다.
청명자는 천살마성이 거의 따라집힐듯 말듯하자 무리하여 속도를 냈다. 손닿을 거리가 되자 청명자는 손을 내밀어 천살마성의 혈도를 짚으려 했다. 하지만 천살마성의 몸이 갑자기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더니 검으로 청명자를 찔렀다.
청명자는 뜻밖의 반격에 손발을 허둥지둥하더니 용케 심장은 피해내고 어깨에 칼을 맞았다. 천살마성은 곧바로 청명자의 허벅지에 한칼을 먹인 후 미련도 없이 방향을 잡고 도망갔다.
'청표자, 청명자를 보호해서 돌아가시오. 천살마성은 나 혼자 쫓아보겠소.'
'청명자는 내가 잘 보호하겠소. 여의치 않으면 그냥 돌아오시오.'
청표자는 허벅지에 칼을 맞고 거동이 불편한 청명자를 부축해서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청현자 홀로 천살마성을 쫓았는데 잡힐듯 말듯하며 잘도 도망갔다. 가끔씩 돌아서며 베어오는 검에는 회전의 힘까지 실려 정면대결을 할 때와는 위력이 천양지차였다.
몇년치 적공이 쌓인 천살에게 무공검법보다는 응익검이 더 적합하다. 하지만 검에 내공을 싣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기에 응익검도 제대로 된 위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교토박응으로 도망가다가 회신법으로 반격을 가하는 것은 사도무천의 지도를 받았기에 내공을 운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정면대결때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천살마성을 쫓다보니 청현자는 자신이 포위된 것을 깨달았다. 눈으로 대충 가늠해보니 몇몇은 실력이 자신보다 낮은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청현자는 등에 칼자국 십여개를 달고 히죽거리는 천살마성을 한번 노려봤다.
'마교의 종자들은 정말로 악독하구나. 자신을 미끼로 삼다니, 이래서 마교와 상대할 때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라고 했구나.'
무당오자는 젊은 시절 무당칠검이라 불리며 강호를 마음껏 주유했다. 무당파의 후광을 등에 업은 이들은 억울한 자들을 도우며 협행을 하여 무당칠검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강호경험이 풍부하다고는 하나 비열한 수작이나 악독한 술수를 별로 겪어보지 못했다. 무당의 직전 제자라는 신분으로만 어디에 가나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서녕위로 온 세명의 장로는 이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세 장로들이 강호를 주유할때는 장삼풍의 위명이 널리 퍼지기 전이고 무당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도교문파였다. 무당오자와는 달리 세 장로들은 제대로 된 강호를 겪었던 것이다.
"오호, 무당오자중의 한명이라. 처음부터 대어를 낚았구만 그래."
천살마성의 곁에 서서 입을 연 자를 바라본 청현자는 오늘 흉이 많은 날임을 직감했다. 다른 자들은 대략적인 경지가 보이는데 천살마성의 옆에 태연하게 서있는 노인은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었다.
'마교라고 매도하기만 했지 수십년전에 소림도 불태운 자들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구나.'
모든 화는 교만에서 온 것이다. 뒤늦게야 깨달은 청현자는 후회막급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여기에서 무당의 장로들이나 다른 문파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천살은 사도장로의 수하들이 번갈아가며 청현자와 대결하는 장면을 집중하여 지켜봤다. 무공검법의 입장에서는 힘을 제대로 싣기 어려운 찌르기이지만 내공의 도움을 받으니 더 없이 위력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집중하여 본다고 내공의 운기경로까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천살은 대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도장로의 수하들은 대부분 적수공권이었다. 가끔은 검과 도를 쓰는 자들이 몇몇 있었다. 주먹을 쓰는 수하들의 권법은 매우 흉험하고 위험했다. 흉험하다는 것은 권법의 위력이 대단하고 초식들도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살초이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는 것은 공격에 너무 집중하여 반격에 취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명치를 노리고 오는 강맹한 권법을 청현자는 환허보(還虛步)로 손쉽게 피해냈다. 곧바로 검으로 상대의 목을 찔렀으나 다른자가 주먹으로 검면을 때려 득수하지 못했다. 공격에 실패한 자는 심각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고 대신 청현자의 공격을 막아준 자가 다시 청현자와의 대결에 임했다.
표면상으로는 일대일이지만 청현자의 입장에서는 옆에서 호시탐탐하는 자를 무시하고 한명의 상대에게만 집중할 수 없었다. 불공평한 대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안무치한 마교의 적당들에게 따져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며 화를 꾹꾹 눌렀다.
수하들에게 고수와의 실전을 경험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청현자를 조롱하는 의미가 더 컸다. 무당칠검은 젊은 시절 무당파의 명성을 업고 일곱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악한 자들을 벌했다. 하지만 그 악한 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무공도 익히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예외없이 악행에 비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귀를 쫑긋 하더니 사도무천은 아쉽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잡견맹의 충견들이 가까이 왔다는구나. 그만 무대를 마쳐야겠다."
구원군이 근처에 왔다는 말에 청현자는 더욱 힘을 냈다. 반각에서 일각만 버티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대결도중 맞은 세곳이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무당의 태청금단 한알이면 하루이틀사이에 깨끗이 나을 것이다. 그때 청현자의 명치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사도무천이 경천동지의 일권을 적중시킨 것이다. 청현자는 오른손의 검을 움직여 자신의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사도무천을 베고 싶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몰려오는 어둠을 느끼며 청현자는 미처 눈을 감지 못했다.
사도무천이 눈짓을 하자 도를 든 제자 한명이 청현자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다. 천살은 사도무천의 분부에 따라 청현자의 몸에 검자국 몇개를 냈다. 하나하나가 깊숙히 박혀 검에 의해 죽은 것으로 오해할만도 했다.
돌아가자마자 사도무천은 청현자의 머리를 소금에 절인 후 사자를 통해 무림맹에게 전달하라고 분부했다. 천살의 입장에서는 그럴거면 굳이 왜 수급을 베어왔는지 의문이었지만 사도무천은 상대를 분노케 하여 판단력을 떨어뜨리려는 목적이었다.
"사도장로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아까 마지막 권법이 왠지 눈익습니다."
"천대장은 오늘의 최대공로자이니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시게."
"제가 예전에 태악삼청봉이라는 검초에 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있었습니다. 장로님의 권법이 그와 비슷한 듯 하여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무천이 눈짓을 하자 몇몇 수하를 제외하고 모두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남은 수하들은 아까 청현자와의 싸움에 나서지 않은 얼핏 보기에도 나이가 들어보이는 자들이었다. 사도무천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대장은 어쩌다 태악삼청봉에 찔리게 되었소?"
천살은 조금 각색해서 이야기했다. 고아인 자신이 화산에 거두어졌는데 속가제자들이 핍박을 했고 반항하는 자신을 장문제자인 조자운이 검으로 찔렀다는 식으로 꾸몄다. 천살의 말을 듣자 사도무천은 크게 한탄했다.
"극악무도한 검파가 득세를 하니 화산의 정기가 점점 사라지는구나. 천대장도 남이 아니고 굳이 비밀이라 할 것도 없으니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지."
사도무천은 화산의 권파에 속해 있었다. 서창훈의 사형인 사도무천은 강호에 자주 나가지 않고 화산에서 수련에만 몰두하는 서창훈과는 달리 강호에 위명을 떨쳤다. 사도무천의 영향력 덕분에 권파의 제자가 처음으로 장문인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대 장문인도 권파의 제자로 하려고 하는데 서창훈을 비롯한 검파에서 반발을 하였다. 사도무천은 본인의 무력을 믿고 힘으로 제압하려 했는데 서창훈에게 간단히 제압당했다. 그후 화산의 비급들을 훔쳐 명화교에 투신한 것이다.
"화산의 무공은 기(奇)와 험(險)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검파의 멍청이들이 점점 화산의 본분을 잃고 안이한 검법만 익히려 하고 있더군. 화산의 정신을 이은것은 우리 권파밖에 없다네."
화산은 산들중에서 산세가 험하고 형태가 기이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화산의 무공들도 화산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화산파가 점점 장대해지면서 위험하고 살기가 가득찬 초식들이 문파의 체면을 깎는다며 점점 보기좋은 동작들로 대체되었다. 사도무천은 화산의 무공들이 그 본질을 잃어가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태악삼청봉은 내 사부가 만들어낸 권법이네. 그 위력이 대단한지 검파의 파렴치한 것들이 검법으로 바꾼 모양이군. 하지만 검법으로는 그 반의 위력도 제대로 내지 못할 것일세."
천살은 사도무천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서창훈이 마차안에서 천살에게 보여주었던 태악삼청봉의 위력은 사도무천의 것보다 더 강해보였다. 비록 맨손으로 시전했지만 분명 검법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저는 화산에 원한이 없지만 서장로와 조자운에게는 꼭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제 미천한 재주라도 눈에 차신다면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난 우리 천대장을 교주의 제자로 추천할 작정이네. 그리고 다음대 교주가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네. 그러니 제자로 받을수는 없고 간단한 무공 하나 가르쳐주도록 하지. 대신 천대장은 내 복수를 전력으로 도와주어야 할 것이네."
- 작가의말
肥餌誘魚, 살찐 미끼가 고기를 유인한다.
지난 편에 발이 저린 댓글이 몇개 달렸더군요. 허벅지를 꼬집으면 참아낼 수 있을겁니다. 아는 형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청명자가 왜 저리 쉽게 당하냐 하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다음편에 그 이유가 나갑니다. 매편마다 댓글이 너무 많이 달려서 댓글 하나라도 줄이기 위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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