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혈궤제
서창훈과 천살, 정확히는 천살마기의 대결은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깨달음을 뭉텅이로 안겨주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 뭔지 짐작도 못하는 자들도 많다. 자질에 비해 수련이나 경험이 부족한 자들이다.
하지만 가끔씩 천재라는 족속들이 존재한다. 남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숨쉬듯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칭찬에 부끄러워하는 천재들이 있다. 이들은 부족한 수련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한번도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창훈과 천살의 대결을 바라보며 수많은 것이 보이고 그로 인해 희열이 느껴지자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나도 천재인가 보구나.'
둘의 대결이 진행될 수록 사람들은 서창훈의 검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는 서창훈의 검을 피하는 천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다리를 먼저 움직이는지 허리를 먼저 움직이는지, 피하기 어려운 공격은 어떤 움직임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는지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서창훈의 검이 화산으로 변했을 때는 그도 서창훈의 검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천살이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둘의 대결이 진행됨에 따라 사람들은 서창훈의 검에 눈길을 완전히 사로잡혔다. 오직 그만 둘의 대결을 지켜보며 승패를 가늠했다. 서창훈의 검과 천살의 몸짓에는 그가 수용하기 힘든 거대한 깨달음들이 담겨있었다. 욕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깨달음을 더 가까이 더 확실히 느끼고 싶었다.
자신이 둘의 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서창훈의 모든 정신은 검에 집중되어 있었고 천살의 주의력 역시 전부 서창훈의 검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두 고수가 통제하던 영역에 실금이 생겼다. 천재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실금으로 발을 들였다.
갑자기 환각이 펼쳐졌다. 천살이 서창훈의 검에 심장이 관통되어 죽어가는 환각이다. 이는 정신이 미혹되어 보이는 환각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곧 발생하게 될 상황을 예지한 것이다. 그때 천살이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를 지켜라.'
자신을 지키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거두지 않은 채 서창훈과 대련을 시작했다. 그 명령은 아직도 유효하다. 고삼은 어느샌가 손에 들려있던 유성추를 서창훈에게 던지는 동시에 자신의 몸도 서창훈의 검을 향해 던졌다.
검에 관통당한 왼쪽 가슴은 감각이 없다. 거대한 충격에 의해 내부가 짓이겨졌다. 횡련일기공과 횡련태보를 익히며 안과 밖 전부 튼튼하게 단련된 몸이 아니었으면 아마 상체가 터져버렸을 것이다.
횡련태보를 익히던 때가 기억났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관절의 단련이다. 탄성이 강한 회초리로 팔꿈치와 무릎, 손목 발목과 손가락 발가락을 가격한다. 특히 십지연심(十指連心)이라고 손가락을 가격당할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강하게 단련된 두손으로 가슴에 꽂힌 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자신의 몸안에서 빠져나가려는 검을 두손과 몸으로 거세게 붙잡았다.
그 순간 천살의 손에서 은하수가 터져나왔다. 호군천때와는 다르게 별무리들은 전력을 다해 서창훈을 향해 덮쳐갔다. 고삼이 목숨으로 만들어낸 기회를 놓칠 정도로 천살마기는 무능하지 않다. 천살이었다면 감정에 허우적거리며 놓쳤을 수도 있는 찰나의 기회를 천살마기는 정확하게 잡았다.
성라운포는 수준높은 초식이다. 천살의 수준으로는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익히기도 힘든 초식이다. 호군천과의 대결에서 한번 사용한 것은 천운이 깃들었다고 해야 한다. 천살이 이 초식을 다시 사용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천살마기의 손에서 펼쳐지는 성라운포를 똑똑히 지켜보며 천살은 그 시간을 아주 많이 앞당길 수 있었다.
천살마기로 성라운포를 사용하자 음양의 충돌이 사라졌다.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흐름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신화공으로 성라운포를 사용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천살마기의 운기경로는 천살의 것보다 훨씬 간결했다. 여러 초식을 응익검의 깨달음에 우격다짐으로 버무린게 아니라 충돌없이 잘 융화된 모습을 보였다.
서창훈은 선천기공 덕분에 심한 내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호군천과 마찬가지로 팔다리의 근육들이 파열되고 힘줄들이 끊어졌다. 젊은 나이라면 몇년간 외상을 회복하고 재기를 꿈꿀수 있으나 늙은 나이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그리고 눈앞의 마교의 무리들도 화산을 그냥두지 않을 것 같다.
"대단하구나, 무슨 초식이더냐. 몇개의 유성을 보았다."
두번째로 성라운포를 사용하자 천살의 몸은 또 한번의 타격을 받았다. 첫번째처럼 강한 반동을 받은건 아니지만 너덜너덜해진 육신은 훨씬 작아진 반동도 이겨내지 못했다. 완전한 몸으로 두번째 성라운포를 사용했다면 몸의 내구력과 혈도의 튼튼함으로 버텨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상이 낫지 않은 상황에서 한번 더 사용하는 바람에 몸이 엉망이 되었다.
천살마기도 성라운포를 사용하며 많은 기운을 소모했다. 신화공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주도권을 천살에게 넘기고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기운을 늘리는건 힘들지만 회복은 빠르다. 천살마기가 웅크리고 회복에 전념하자 천살이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강한 통증이 느껴지자 정신이 반쯤 날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서창훈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통증에 겨우 적응한 천살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성라운포입니다. 하늘이 내린 이름이지요."
호군천은 천살의 초식을 보고 유성화우라는 말을 내뱉었다. 천살이 펼쳐낸 별들 중에 상대를 가격하는데 성공한 별은 유성으로 보인다. 호군천은 유성화우를 보았는데 서창훈은 몇개의 유성만 보았다. 다만 천살마기가 펼친 성라운포의 위력이 훨씬 강하기에 몇개만 적중당한 서창훈이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천살이 호군천에게 펼쳤던 성라운포라면 서창훈은 큰 피해 없이 막아냈을 것이다.
"하늘의 뜻은 짐작하기 어렵구나. 내 잘못은 죽음으로 속죄할테니 그 화를 화산에 풀지 말아다오."
힘겹게 말을 마친 서창훈은 내력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들어라. 오늘은 화산의 검파와 권파가 수십년전에 맺은 은원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 검파가 패배했다. 화산의 또 다른 태상장로인 조유천이 승리자이니 검파의 제자들은 조유천과 권파의 처분에 따르거라."
숨을 힘겹게 들이쉰 서창훈은 조유천에게 말을 건넸다.
"조장로, 내 마음속에 있는 화산을 보았을 것이오. 검파의 모든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화산이 있소. 이제 검파 권파 가리지 말고 같은 식구들끼리 피를 흘리지 말았으면 하오. 오늘 나의 피와 살이 거름이 되어 화산이 다시 하나가 되었으면 하오."
말을 마친 서창훈은 내공으로 심맥을 끊고 자결했다. 지금은 서창훈 자신이 죽는것이 화산에 도움이 된다. 죽을때가 되니 평생 해왔던 독선과 아집과 잘못들이 눈에 밟혔다. 자신이 화산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일이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죽으면서도 서글픈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숨을 백번쯤 쉬기 전에 서창훈이 천살을 죽이고 인질로 잡힌 화산의 제자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것을 화산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반전이 일어나 서창훈의 목숨이 끊어졌다. 일대일 대결에 비겁하게 끼어들었다고 고삼을 욕할수도 없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상대의 비열한 수단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승자만의 권리이다.
평생의 원수인 서창훈이 죽었지만 조유천은 기쁘지 않았다. 검파를 누르고 승리자가 되었지만 희열이 없다. 천살의 검에 의해 화산 최고의 검이 패했다는 사실만이 조유천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일을 그르칠 정도로 감상적이 아니다. 오랫동안 갈아왔던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차례이다.
"나는 전대 장문인의 사부인 조유천이라고 한다. 이십여년전 검파에 의해 권파의 대부분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검파의 제자들도 목숨을 잃었다. 검파는 화산제자들의 피로 장문인의 자리를 앗아간 것이다. 그러니 오늘 그 혈채를 받아내고 화산을 바로세우겠다. 위장문(僞掌門 - 거짓장문) 호군천은 나와서 내 칼을 받아라."
선우복명은 고삼의 가슴에 꽂힌 검을 내력으로 부러뜨렸다. 언젠가 서창훈이 천살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내던 방식과 똑같았다. 내력으로 몸속에서 부러진 검을 앞뒤로 뽑아내어 검을 뽑으며 추가로 발생할 수 있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고삼의 입에 성화단 한알을 넣어준 선우복명은 천살에게 말했다.
"우심인(右心人)이오. 잘 치료하면 살아날 수도 있소."
고삼은 심장이 오른쪽에 나있는 우심인이었다. 우심인들은 양강계열의 무공을 수련하는데 적합하다. 고삼이 횡련태보나 횡련일기공같은 외공에 재능을 보이는 것이 우심인인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제야 천살도 고삼이 우심인인것이 생각났다. 수련을 할 때 기운의 흐름이 특이해서 확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천살마성을 타고난 천살은 심장이 오른쪽에 달린것쯤은 크게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선우복명의 말에 생각난 것이다.
"화산의 장문제자였던 조자운이라고 합니다. 태상장로님께 말씀드립니다. 화산파의 문규에서는 장문인이 중태에 빠져 문파의 사무를 처리할 수 없는 경우 장문제자가 장문인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장문인이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장문인을 교체할 수 있다 라고 명시했습니다."
"현재 화산파의 장문인은 호군천이 아닌 조자운입니다. 만약 검파로부터 혈채를 받아가시려면 제 목을 베십시오."
조자운이 나서자 화산의 제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수가 안되는 걸 알지만 마교의 무리들과 끝까지 싸우려는 생각을 품은 자들도 있고 호군천 하나의 목숨으로 끝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조자운이 쓸데없이 나서서 조유천의 화를 둗운다고 원망하는 자들마저 있었다.
"그래, 화산의 제자라면 이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널 살려주고 싶다만 검파의 손에 죽어간 내 제자가 눈을 감으려면 누군가의 피로 위로해야 할 것 같구나. 전대장문인이 너희 검파의 손에 죽은 죗값을 뒤늦게 치른다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눈 감거라."
조자운은 조유천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얼굴에는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지만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 못했다. 유일한 강호행이 천살을 생포하러 마교와의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에 몇번 참가하고 담대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죽기 싫다고 외면할 생각은 없다. 고아인 자신을 주워다 키워준 사부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패배자로 비굴하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오늘 패한것은 서창훈이지만 그건 화산이 패한것과 마찬가지다. 화산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던 천살이 쫓겨나가게 된 것도 자신이 최초의 발단이었다.
오늘 천살의 무위를 확인하니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화산이 얼마나 강한 무인을 보유했을지 알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유치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벌인 일이 화산에게 커다란 상처로 되돌아왔다. 모든것이 조자운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발단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조자운이 조유천의 앞에 무릎을 꿇자 조유천은 짧은 칼을 휘둘러 조자운의 목을 베어내려갔다. 그때 회색 인영이 번뜩이더니 왼팔로 조유천의 도를 막아냈다. 왼팔을 자른 도는 그치지 않고 회색 인영의 왼쪽 가슴도 크게 베어냈다. 회색인영은 고개를 저으며 오른손 손가락에 피를 묻혀 바닥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蟻穴潰堤, 든든한 제방뚝이 작은 개미굴에 무너진다고 하죠. 작은 불꽃이 들판을 불로 뒤덮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화료원은 앞에서 써먹었기에 개미굴로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어제 출중한 연출 운운한 것은 자화자찬이 아니로 예고였습니다. 예고 홈런처럼 오늘 출중한 연출을 하겠다는 예고입니다. 사실 이번편을 빠르게 쓰려고 했는데 지난글을 퇴고하며 소름이 돋아서 가라앉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얼굴만 주셨다고 하늘을 늘 원망했는데 미안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굳이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숨기려고 했으면 마지막 문장을 다음편으로 미루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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