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천하
벽휘동의 예상과 달리 금의위와 무인들은 마교의 무인들을 상대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무림문파들의 무인은 협공이나 대규모전투에 익숙하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금의위는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는데 특화되어 상대의 수가 더 많으니 암기와 도구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목표분담을 제대로 못해 같은 자에게 몇명의 암기가 쏟아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진형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단번에 무너지지 않고 버텨냈다. 당문의 독혈대는 당무영과 여섯명이 사도로 향했고 남은 스물여섯명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적아가 뒤섞인 상황에서 독을 사용할 수 없기에 그저 암기를 날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바람의 방향이 일정하면 독을 사용할수도 있으나 큰 호수가 있는 근처라 바람의 방향도 자주 바뀌었다. 그렇게 버티고 있을 때 기마부대가 도착했다. 금의위와 무인들은 기마부대가 마교의 무사들을 낙엽 쓸어담듯 쓸어버리는 것을 보고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들의 무공이 병사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장에서의 위력은 기마부대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기마부대의 등장에 마교가 징을 울리며 물러섰지만 벽휘동은 감히 뒤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망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진형을 짜서 후퇴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게 정식으로 편제된 군대가 아니라 반시진도 안되는 사이에 급조해낸 군대라는 것을 알았으면 벽휘동의 놀라움이 더 커졌을 것이다.
전투가 끝나자 한선후의 팔 하나를 잘라냈지만 결국 주살하지 못했다는 소식에 벽휘동은 머리가 아파왔다. 한선후의 제거, 마인의 확보, 마교의 멸문 세가지 목표중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마인의 확보는 귀주에서 성공하기를 기다려야 하고 마교의 멸문은 특무조의 작업이 효과를 보기를 기다려야 한다. 벽휘동은 우선 보고를 조금 미루기로 했다.
뒤로 후퇴한 사장로는 군대를 제대로 편제를 하고 지휘체계를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기마부대를 구성하여 상대의 급습에 대비했다. 평야가 아닌 마을안에서 기마부대의 위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천명이나 되는 기마부대의 기습을 막아내기에는 대부분 마을이 너무 작다. 정찰을 열심히 하여 상대 기마부대의 위치를 계속 살피며 기병을 수비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배치가 끝난 후 대부분 장로들은 사도로 돌아갔다. 사장로는 가문에 돌아간 후 자신의 방에서 침입흔적을 발견했다. 곧바로 수하들에게 분부하여 밀실들을 살펴보라고 한 뒤 천마신공의 비급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가짜로 만든 비급이 도둑맞았고 진짜 비급은 그대로 있었다.
밀실에서도 침입흔적을 발견했다는 말에 사장로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다 사현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그림자가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저녁때에 가문의 정보담당자가 한선후가 팔 하나 잘린채 도망에 성공했다는 말을 전하자 기분이 바닥을 쳤다.
"당장 비둘기를 날려라. 제삼안 마인천하 계획을 실행한다."
사장로는 머리를 써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계획의 실행중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교주의 도주, 사현군의 죽음, 장원에 침입하여 자신의 방과 밀실을 뒤진 일 등 사장로가 모르는 일들이 수두룩히 발생했다. 이럴때는 자신 역시 상대가 예상하지 못할 일을 벌여야 한다.
이튿날 날이 밝자 당문에 몸통에 비해 다리가 유난히 긴 새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새의 다리에 묶인 죽통은 그대로 당가주에게 전해졌고 새에게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싱싱한 고기가 포상으로 주어졌다.
당가주가 죽통을 열고 비급을 꺼내자 곁에서 지켜보던 장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독과 약 그리고 의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는 당문이기에 익히면 마인이 된다는 천마신공도 제대로 익혀낼 자신이 있다. 가주가 천마신공을 펼치자 모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제길, 가짜요."
당가주는 몇장만 보고는 비급이 가짜임을 확신했다. 어수룩한 자라면 그럴듯한 운기경로에 속았을 수도 있지만 의술에 조예가 깊은 당문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 장로들도 비급을 읽어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영이 그 아이는 밖에서 자라서 영특하기는 한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덜 영글었어. 다른 아이였으면 몇장 읽어보고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턴데."
"그 아이 성격상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을거요. 이게 다 당신들이 자꾸 눈치를 줘서 그런게 아니요? 방계라 해도 다른 성이 아니고 엄연히 당씨이건만."
장로들이 또 말다툼을 시작하자 당가주는 비급을 다시 건네받아 태워버렸다. 비급을 남겨두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일을 그르친다. 가주의 위치는 당문을 강하게 만드는 위치가 아니라 당문을 아무 문제없이 다음 가주에게 넘겨야 하는 자리이다. 어릴때부터 함께 자라서 허물이 없는 숙부와 백부들의 다툼을 지켜보며 당가주는 천마신공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때 귀주에서는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무림추살대를 마주한 혈선들은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무림추살대가 이런저런 생소한 도구와 암기들로 이들을 괴롭혔으나 웬만한 상처를 입어도 피를 흐르지 않기 때문에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잘리는 부상이 아니라면 혈선들의 무력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독에 대한 저항력도 무척이나 강해서 웬만한 독은 알아서 해독된다. 무림추살대가 열세를 인정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자 일곱 혈선 역시 제각각 흩어져서 추격했다. 선연과 선득을 제외한 다섯은 피를 본 후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어서 말리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선연과 선득도 빠르게 추적자들을 제거하고 몸을 숨길 생각으로 무림추살대를 뒤쫓았다. 무림추살대의 도망치는 속도가 쫓는 선득의 속도보다 느렸기 때문에 중간중간 멈춰서 한바탕 싸운 후 다시 도망갔다. 그럴 때마다 목숨 한두개씩 버려야 했지만 무림추살대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마교 놈들이 독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선득은 동료의 목숨 한두개를 버리고도 전혀 동요없는 추적자들에게 감탄했다. 그렇게 뒤쫓다 갑자기 기운이 이상했다. 앞에 뭔가 불길한 기운이 맴도는듯한 감각이 강하게 느껴졌다. 선득은 조금 무리해서 속도를 높여 가장 뒤에 있는 자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자가 훨훨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지니 땅바닥이 훅 하고 가라앉았다. 깊이가 두장은 넘는 함정이 거기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다른 함정이 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선득은 신형을 돌려 처음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보니 선연 역시 돌아와 있었다. 다른 사형제들이 궁금해진 둘은 함께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급히 움직이며 확인해보니 셋은 함정에 빠진 후 그물에 의해 포박되었고 한명은 올가미에 걸려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함정에 빠졌지만 용케 탈출해 나왔는데 이성을 잃고 발광하다 결국에는 다리 하나가 잘린 후 생포되었다.
상대가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을 확인한 선득과 선연은 사제들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 도망치는 중간중간 병사와 무인들이 있었으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건드리지 않고 은밀히 움직였다. 하지만 밤새 도망쳤으나 상대가 계속 쫓아오자 선연은 결심을 내렸다.
"이걸 잘 가지고 있어라.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마."
선연은 품속에서 천마신공의 비급을 꺼낸 후 둘로 찢었다. 천마신공이라고 적혀있는 표지가 달려있는 부분을 선득에게 건네고 남은 뒷부분은 자신이 가졌다. 기름종이로 비급을 잘 감싼 후 선득은 선연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사형도 꼭 보중하시오. 누구라도 한명이 살아남는다면 사형제들의 복수를 꼭 합시다."
선득은 비급의 앞부분을 품속에 간직한 후 경공을 사용해 도망을 계속했다. 선득의 신형이 멀어지자 선연은 품속에서 향낭 하나를 꺼냈다. 바지춤을 내려 향낭을 오줌으로 적신 뒤 허리춤에 찼다. 물과 접촉해야 향을 내는 향낭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한참 이동한 선연은 지둔술(地遁術)을 이용해 땅속으로 숨어든 후 귀식공(龜息功)을 사용했다. 푸식푸식한 부식토들로 이루어진 땅이라 지둔술을 이용해 파고 들어간 흔적이 거의 없었다. 향낭을 이용해 냄새도 지웠기에 추적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밤에도 추적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은 매와 같은 맹금으로 하늘에서 추적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추적에 사용되는 맹금들은 밤눈이 어둡다. 그러니 개와 같은 동물로 냄새를 이용한 추적이 분명하다. 선연은 선득을 미끼로 사용하고 자신은 몸을 숨겨버렸다.
운기법이 있는 초반부를 선득에게 건네고 깨달음과 주의점들이 적혀있는 뒷부분은 자신이 챙겼다. 어차피 운기법은 익숙할대로 익숙하다. 하지만 깨달음과 주의점들은 암기한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글씨의 크기와 형태에도 깨달음들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에 원본이 중요한 것이다.
선연은 최초로 천마비급을 읽을 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덕분에 비급의 글씨들이 품은 흉흉한 기세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선득을 제외한 남은 다섯은 이미 비급의 기운에 매몰된 듯 했고 선득은 그나마 저항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비급의 글씨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도 천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운기경로를 적은 앞부분에서 일부 혈도의 명칭은 큰 글자로, 일부는 작은 글자로 씌여 있다. 그간 수련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글씨 크기가 클수록 그 혈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게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른 사제들보다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뒷부분의 깨달음 역시 글씨가 큰것이 있고 작은것이 있다. 글씨가 큰 것이 중요한 것이고 작은것은 덜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비급을 넘기지 않으면 선득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을것을 알기에 필요없는 앞부분을 찢어서 선득에게 건넸다. 선득이 열심히 도망가면서 추적자들을 멀리 끌고가주기를 바라며 선연은 잠에 빠져들었다. 몸에 위험이 닥치면 알아서 깨어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며 깨어나는 것이다.
벽휘동은 머리가 아파왔다. 전면전에서 마교의 실력을 확인한 뒤 더이상 전면전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군대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답신을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답신은 오지 않고 머리를 아프게 하는 정보만 전해져왔다.
'임조부에서 마인 한명 출현, 수십명의 병사와 백성을 학살한 후 도주.'
'민주위에 마인 한명 출현, 스물세명 사망 및 오십여명이 불구가 됨. 추적도중 흔적이 사라짐.'
'평량부 마인 한명 출현, 사십오명 사망, 추적도중 흔적이 사라져서 포기.'
'항주부에 천마신공 비급 출현, 금의위와 동창이 비급회수를 위해 출동.'
'남창부에 천마신공 비급 출현, 금의위에서 비급회수를 위해 출동.'
'형주부에서 천마신공 비급 출현, 서문세가 도움으로 비급 확보.'
'귀주에서 마인 오명 생포, 두명의 마인은 놓침. 다섯명의 마인들의 몸에 비급이 없음. 그중 두명은 이성을 잃고 광인이 되어버렸음.'
"당문의 장로 당현이오. 우리 독혈대 애들이 독쓰는 재주밖에 없는데 전투에 쓸모가 없소. 여기서 밥만 축내는 독혈대를 돌려보내고 암룡대(暗龍隊)를 보내도록 하겠소."
암룡대가 무공이 독혈대보다 더 강하지만 강호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독혈대이다. 천마신공의 비급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독혈대를 보냈는데 당가주가
욕심을 버렸기에 독혈대 대신 암룡대를 보내려는 것이다.
벽휘동은 며칠이나 미룬 보고를 더이상 미룰 엄두가 나지 않아 억지로 붓을 들고 보고서를 작성해 나갔다. 실패에 대한 변명을 하면 안된다. 단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유능함과 쓸모있음을 황제에게 전해지게 해야 한다.
- 작가의말
사장로가 위기에 처하자 도박판을 엎어버렸습니다. 사장로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자부하겠지만 그저 마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운좋게 먹이사슬의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일뿐입니다. 우물안 개구리는 아니고 우물한 황소개구리 정도의 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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