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쟁호투
조전은 철검을 들고 천살과 마주섰다. 보통 비무는 죽검이나 그냥 나무 몽둥이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철검을 들었다는 것은 천살을 적대하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남은 백인대 부대원들도 차가운 눈으로 천살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살은 음혈을 뽑아들었다. 만련을 거친 음혈은 표면에 물결무늬와 물고기비늘무늬의 중간쯤 되는 형태의 문양이 조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 눈에 띈다고 노야장의 제자인 장훈이 특별히 처리하여 문양을 가렸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길이가 조금 더 긴 일반검으로 보였다.
조전은 철검으로 천살의 이마를 노렸다. 뒤로 피하면 보법을 이용해 가까이 들러붙을 작정이다. 조전의 철검이 일반 검보다 짧고 검끝이 살짝 휘어져 근접전에 유리한 까닭이다. 도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양쪽에 다 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목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조전은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조전의 예상대로 천살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마를 노린 내려치기는 좌우로 잘못 피할 경우 목이나 가슴이 베일 위험이 있다. 병장기를 맞부딪히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는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천살이 한걸음 뒤로 물러선 것은 조전의 공격을 피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검의 길이가 차이가 나고 팔길이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검을 조전의 목앞에 세우려면 뒤로 한걸음 크게 물러나야 한다. 단지 상대를 죽이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한수 재주는 있군. 내가 그대를 너무 얕잡아 본것 같소. 다시 한번 부탁드리오."
말투는 정중하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엉겁결에 검을 내밀어 우연히 승리를 하지 않았냐고 눈으로 도발하고 있었다. 확실히 천살의 검은 느릿하게 움직였고 조전이 급히 공격하다가 목을 검에 가져다 댔다. 구경하는 자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천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혈을 회수했다. 조전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좌우로 움직이며 천살의 허점을 유도하려 했다. 천살은 조전의 움직임에 따라 눈길만 돌릴뿐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애송이가 분명하다. 덩치가 크고 힘만 셌지 싸울줄은 전혀 모른다.'
조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천살이 전혀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라고 판단했다. 갑자기 왼쪽으로 움직여야 할 시점에 오른쪽으로 급히 움직인 후 천살의 사각으로 검을 찔러갔다. 아까 이마를 노린것은 후수를 두고 유인하는 초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실초이다.
조전은 또 한번 자신의 목에 닿은 음혈을 아연실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조전은 똑똑히 보았다. 천살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였고 자신은 그 검을 향해 목을 가져다댔다. 심지어 천살의 검은 조전이 전진하는 속도에 맞춰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무공검법은 고급검법이다. 비록 내공을 능숙하게 다루는 고수앞에서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지만 그안에 깃든 검의와 검리들은 진짜다. 천살이 우직하게 수련하던 무공검법은 실전을 통해 그 경지가 빠르게 높아졌다.
천살은 음혈을 검집에 넣은 후 맨손으로 조전을 패기 시작했다. 조전이 반항하려 했지만 비처럼 온몸에 쏟아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철검을 놓치고 몸을 웅크렸다. 퍽퍽 하는 타격음이 크게 울렸지만 조전의 마지막 자존심인지 신음소리를 한마디도 내지 않았다.
몇대 패고 그만둘려니 했는데 천살이 멈출 기색이 없자 구경하던 몇몇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도 곧바로 천살의 매질을 당해야 했다. 혼자서 여섯을 패는데도 천살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잘못했소. 용서를 바라오."
조전이 뭉개진 발음으로 용서를 구하고 나서야 천살은 손을 멈췄다. 구경하는 나머지 부대원들에게 여섯을 의원에게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보내던 적대적인 눈빛과는 달리 부대원들은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천형,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소?"
당무영은 이마를 찌푸리고 천살에게 질문했다. 전쟁터에서 서로 등을 맡겨야 하는 사이인데 이렇게 패버리면 골이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팼는데도 계속 반항하면 다음 전쟁터에서 몰래 베어버려야겠소. 자불교 부지과 교불엄 사지타라는 말을 아시오?"
당무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자식을 가르치지 않은것은 부모의 잘못이고 가르침이 엄하지 않은것은 사부가 게으른 탓이라는 말 아니오?"
"그렇소. 부하가 반항하여 일을 그르치면 그 책임은 내가 지게 되어있소.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때문에 나한테 피해가 오는것을 싫어하오. 이후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면 용서해줄 것이고 아니면 제거해 버리겠소."
무림맹은 총단을 개봉에 두었다. 매달 한번씩 열리는 정기총회에서 형산파의 장로 장원산이 입에 거품을 물고 성토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 들어간 재화가 얼마이고 손해본 인명피해가 얼마인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지 않소. 왜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오? 도대체 이곳이 무림맹인지 무당맹인지 모르겠소."
무림맹주 송백자는 작은 기침소리로 불편한 마음을 표했다. 무림맹의 요직들은 대문파들이 나눠가졌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군소문파들에게 나눠준 자리는 대부분 무당파와 사이가 좋거나 무당의 속가제자들이 많이 있는 문파들이 차지했다.
야심이 가득하던 화산이 갑자기 무당을 지지할 때 장원산은 화산을 따라 무당으로 기울지 않고 소림으로 갈아탔다. 화산을 지지하던 당문과 청성 아미 그리고 점창은 아예 무림맹에서 빠져버렸다. 종남은 화산과 거의 원수지간이라 역시 무림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화산은 강호에 알려지지도 않은 장로 한명을 보내놓고 무림맹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문파의 힘을 기울여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이다. 원래는 화산과 소림 가운데 하나가 무림맹주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어이없게도 무당이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요직에 자기 사람들을 밀어넣었다.
이번 일은 소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각 문파에서 무사와 재화를 지원받아 진행한 일이다. 사실 장원산도 무당의 계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성공했을 때 형산파에 돌아오는 이득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이없이 실패해서 재화도 날리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보자 비분강개하여 무당을 성토하는데 앞장선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여 무당파에서는 서녕위의 전선으로 장로 세명과 무당오자(武當五子)를 보내겠소."
무당오자는 무당 장문과 같은 배분의 다섯 고수로 원래는 무당칠검이었다. 그중 한명이 장문인이 되고 한명은 마교장로인 초화규에게 패한 후 강호를 은퇴했다. 그래서 남은 다섯을 무당오자라고 칭한다.
"화산에서는 장문제자 조자운과 함께 매화검수 삼십명을 보내겠소."
"남궁가에서는 철혈검단을 보내겠소. 인솔자는 남궁천이오."
남궁천은 남궁가를 대표하는 무인이다. 철혈검단은 무력이 높은 무인들이 아니지만 군대식 훈련을 받아서 명화교와의 싸움에 가장 적합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림에서는 서른여섯명의 철나한을 파견하도록 하겠소."
장원산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요즘 장문인이 자신을 견제하기 시작했기에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다.
"형산파도 성의를 표하도록 하겠소."
회의가 끝나자 장원산은 소림사의 대표로 나온 원청을 찾았다.
"원청대사, 이거 참 너무 섭섭하오. 이런 중대한 일을 미리 귀띔해주지 않고 말이오."
"천하의 흥망성쇠가 걸린 일이오. 형산파에게 알리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어서요."
"나만 알고 있을테니 제발 말해주시오. 나 혼자 눈뜬 장님이 되니 참으로 갑갑하구려."
"장장로를 믿고 말씀드리겠소. 현재 마교에 천살마성이 있소. 그대로 두면 큰 후환을 끼칠것 같아 천살마성을 생포해 오려는 것이 목적이오."
청해호의 사도에서 한창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명화교 교주인 한선후와 장로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갓 입수한 정보가 적힌 종이조각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당오자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남궁천까지. 화산의 매화검수나 소림의 철나한도 만만한 자들은 아니고. 골치가 아프군 그래."
한선후의 말이 끝나자 사도장로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알맞게 증원을 해야 할 것 같소. 교주께서 파견인원에 우리를 꼭 끼워주셨으면 하오."
한선후는 사도장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에 대한 사도무천의 증오심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도장로의 일파가 교에서 차지한 비중도 꽤 크기에 자신의 계획을 상세히 알려주지 않았다면 사도장로는 이미 일파의 힘을 가지고 화산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천살마성이라. 여기에 대해 아는것들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시오."
"이건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소. 저쪽에서 이번일의 실패로 명분만들기를 하는 것일수도 있으니 말이오."
정보를 책임진 청장로는 신중한 성격이다. 그는 확실한 정보도 항상 의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청장로의 말을 사도장로가 받았다.
"그나저나 서창훈 그자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오? 장문제자에 매화검수 삼십이라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데 말이오."
"천살마성의 정보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서창훈이 움직이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 움직일 것이기에 아무래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소."
청장로의 대답에 한선후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천살마성이 무당오자나 남궁천을 움직일 정도는 되지만 서창훈이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해도 되겠소?"
"서창훈이 움직이면 우리도 중시할까 일부러 움직이지 않는 것일수도 있소."
청장로의 추측은 사실이다. 명화교에서 천살마성의 중요성을 눈치챌까봐 서장로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무당오자 등의 파견도 삼천의 병력을 증원하고도 실패한데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명화교에 의해 진실된 의도가 파악당했다.
"천살마성으로 의심되는 자는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미끼로 삼아 무림맹의 병력들을 소진시키는게 어떻겠소?"
청장로의 말에 사도장로가 무릎을 쳤다.
"좋은 생각이오. 미끼가 튼튼한지 확인해보고 약하면 영약이라도 몇개 쥐어주지."
한선후가 한술 더 떴다.
"확실한 미끼로 만들기 위해 내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도 고민해 보겠소."
회의가 마무리되는 눈치이자 청장로가 회의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그럼 서녕위에 증원나가는 인원은 사도장로와 교주의 이제자 장우민, 사제자 강사성, 오제자 초영란으로 하겠소. 천살마성을 살피는 일은 사도장로께서 담당하시오. 이의가 없다면 이만 회의를 마치겠소."
무림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는 서녕위에서 용쟁호투를 예고하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살은 토혈공을 수련하고 피를 토하고 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선홍빛의 피는 서녕위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 했다.
- 작가의말
또 한번 추천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힘도 받지만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집니다. 글에 더 많이 신경써서 추천하신 분들이 욕먹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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