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단영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우리 팽가가 무림맹을 위해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고작 개봉 외곽지역의 객잔 하나로 만족하라는 말이오?"
팽월이 버럭 화를 내자 남궁천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팽가의 노고는 우리 전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소. 특히 팽가나 유가 그리고 언가의 수염을 기르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잘 알지."
황실의 직속기관은 이십여개가 있는데 현재 권력을 잡은 것이 금의위와 동창이다. 금의위와 동창은 서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는다. 둘의 영역이 서로 겹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강한 둘이 손잡고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남궁천은 무림맹 가입이 다른 문파들보다 오년정도 늦고 금의위와 동창의 도움을 받은 세 가문을 은근슬쩍 비웃었다.
말문이 막힌 팽월은 속으로 벽휘동을 원망했다. 마지막에 팽가나 유가 그리고 언가의 무인으로 위장한 자들이 마인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어 세 가문이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사정을 아는 자들이야 금의위나 동창의 짓임을 알지만 영문을 모르는 자들은 세 가문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장원은 남궁가에서 은자 천냥으로 가져가겠소."
무림맹이 위치한 현재 장원은 수백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의 장원이다. 대략 은자 천이백냥정도 가격으로 추정되는데 남궁가에서 은자 천냥을 내놓고 가지겠다고 하니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남궁가가 무림맹에 가진 지분이 절대 은자 이백냥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큰 가문들이 땅이나 건물을 그대로 받거나 은자 얼마씩 내고 분배받았다. 그리고 남은 은자들은 무림맹에 가입한 문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분배가 다 끝나자 대부분 가문들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남궁가가 크게 양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더 많은 은자를 챙겼기 때문이다.
"이 장원은 남궁가가 천대협에게 선물로 드리겠소. 추후 강호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힘을 보태실 분이라 노고에 감사드리는 의미로 운영비도 남궁가에서 부담하겠소."
회의장 한켠에 앉아서 여러가지 잡생각을 하던 천살은 남궁천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은자 천냥이상의 가치를 가진 장원을 공짜로 주고 유지비까지 부담하겠다는 말에 크게 놀란 것이다. 이정도 크기의 장원이면 유지비가 은자 이백냥정도는 할 것 같았다.
지닌바 무력이 비해 배포가 무척이나 작은 천살이기에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거절하는 것은 남궁천과 원수지자는 말이다. 천살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대답할 말을 생각해냈다.
"남궁대협의 마음은 감사하나 너무 큰 선물이라 부담이 되니 소유는 계속 남궁가의 것으로 하고 이 천살이 잠시 빌려서 거주하는 것으로 하는게 좋겠소."
"천대협 너무 겸양하지 마시오. 혹시 장원이 마음에 안들면 내가 따로 더 큰것으로 하나 알아보겠소."
남궁천의 말에 천살은 자신과 남궁천의 눈높이가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 안경부에 가서 보았던 남궁가의 장원은 현재 이 장원의 열배 이상의 크기이다. 장원 뒤편에 자리한 산도 남궁가의 소유라고 들었다. 당문의 장원은 크기만 따지면 남궁가보다 더 크다. 다만 건물의 수는 남궁가가 훨씬 많았다.
"한번 더 거절하면 이 천살이 남궁대협을 얕보는 것으로 비춰질까 감히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겠소. 주신 선물 감사히 받겠소."
남궁천의 배포가 큰 것이 아니라 천살 자신의 배포가 작았던 것이다. 천냥정도의 장원은 가볍게 생각할 정도로 배포를 키워야 한다. 자신은 예전에 시골에서 흙을 뚜져 지렁이를 잡으면서 놀던 코흘리개가 아니다. 힘을 갖췄으면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제길, 무림맹이 사라졌지만 당분간 남궁가가 무림맹 행세를 하겠구나.'
남궁가와 가까운 세력들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남궁가와 적대하거나 소원했던 세력들은 얼굴이 찡그러졌다. 천살은 수십명의 마음의 변화를 느끼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분배가 끝나자 은자나 집문서 혹은 땅문서를 챙겨서 하나둘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궁천이 떠날 때 천살이 직접 대문까지 배웅을 했다. 장원을 공짜로 받은데 대한 작은 보답이다. 천살과 작별하고 마차에 오른 남궁천은 개봉을 벗어나 넓은 평야로 나오자 이번일을 책임진 조카에게 질문했다.
"이번 일 손익은 어떠했냐?"
"몰래 빼돌린 건물이 세개가 됩니다. 무당 시절 송백자가 무림맹의 돈으로 몰래 사놓은 건물이라서 공식적으로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장부를 조작해서 은자 팔백냥을 챙겼습니다. 장원의 소유권을 얻느라 은자 천냥을 소모해서 이득도 손실도 없습니다."
남궁천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조카를 바라보았다.
"장부를 만지고 은자와 문서들을 만지더니 손익계산을 할 때 주판을 튕길줄밖에 모르는구나. 천살과의 교분을 천하에 알렸는데 그게 얼마나 큰 이득인지 모른다는 말이냐? 표국에게 남궁가의 창천기를 걸어주는 댓가로 일년에 은자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것 같으냐?"
"큰 표국은 삼백냥이 문제 없습니다. 작은 표국도 오십냥은 받을 수 있습니다."
"장강을 오가는 상선들에 창천기를 걸어주면 얼마씩 받을 수 있을것 같으냐?"
"창천기에 남궁가 무인 몇명으로 은자 삼십냥에서 백냥까지 가능합니다."
"너는 머리도 좋고 오성도 높은데 무공이 제자리걸음을 하는것은 너무 명확하게 따지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확신하는 순간 그것이 벽이 되어 네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천년전에 노자가 도가도 비상도의 도리를 깨우쳤는데 네놈은 왜 이모양이냐?"
다음대 가주로 생각하고 있는 조카가 큰 그릇을 가지고도 자신을 작게 가두는 것을 보고 답답한 나머지 잔소리를 했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자질을 보여 가문에 가두고 애지중지 하다보니 사고의 폭이 매우 좁다. 차라리 몇년전에 시집보낸 딸이 훨씬 야망도 크고 생각이 자유로웠다.
커다란 장원에 천살과 고삼 두명만 남았다. 남궁천이 며칠안에 총관과 하인하녀들을 보내준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둘이서 이 연무장만 네개나 되는 장원을 독차지할 수 있다. 고삼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혹시 흘리고 간 은자가 있지 않은지 뒤적거렸다.
저녁때가 되자 가까운 객잔으로 가서 음식을 시켜먹었다. 객잔에서는 비무와 무림맹의 해산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칼을 찬 무인들이 많아서 불편했는데 다 사라져서 좋다는 자들도 있었고 그 자리에 천하의 대마두가 들어갔으니 오히려 더 나쁜게 아니냐는 반대의견도 있었다.
객잔에서 장원으로 돌아가서 천살과 고삼은 술단지를 뜯었다. 은자는 하나도 흘리지 않았지만 지하에 빚어놓은 술을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무겁고 운반이 어려운 술을 아무도 욕심내지 않은 것이다. 천살과 고삼은 단지째 마셔도 취하지 않지만 술을 마시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밝은 달빛에 커다란 장원에서 단지째 술을 마시자 천살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어릴적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고 힘을 가진 후에도 이러한 삶을 상상해본적이 없다. 가슴속에 호기가 치밀어오른 천살은 장원에 꾸며진 가산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집채크기의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있었다. 사십여리밖의 산에서 캐내서 수백명의 무인이 동원되어 옮겨온 바위이다. 성문을 지날 때 수십명의 고수들이 힘을 합쳐 경공으로 성문위를 뛰어넘어 큰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던 바위이다.
天降魔星 천강마성
獨步武林 독보무림
孤身單影 고신단영
君臨天下 군림천하
하늘이 마성을 내리니 무림을 홀로 걷는다. 몸 하나 그림자 하나로 군림천하 하리라.
글을 천천히 음미하던 고삼은 항의했다.
"대형, 이 고삼이 평생 대형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고신단영은 다른걸로 바꾸시죠."
"너도 조금 늦은 나이지만 장가를 가고 독립해야지."
천살의 말에 고삼은 장가를 가지 않고 대형과 평생 살고싶다고 말하려 했지만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고삼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형, 이제부터 제 이름은 고천양입니다."
며칠이 지나자 남궁천이 약속대로 총관과 하인하녀들을 보내왔다. 자신이 없어도 장원이 제대로 돌아가겠다 생각되자 천살은 고천양을 데리고 화산으로 향하는 발길을 떼었다. 고천양이 경공의 경지가 높고 내공도 심후하기 때문에 둘은 배를 타는것보다 경공으로 달리는 것을 선택했다.
"대형, 피냄새가 납니다."
개봉을 떠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고천양이 피냄새를 맡았다. 천살은 마음 먹은대로 화산으로 향하고 있지만 복잡한 심경을 어찌할 수가 없어 집중력이 떨어졌기에 고천양이 먼저 발견한 것이다. 둘이 경공으로 움직여보니 산적 십수명이 행인 세명을 상대하는데 이미 한명이 칼에 맞아 쓰러졌고 두명이 힘들게 저항하고 있었다.
고천양은 경공으로 달려가 산적들에게 주먹 하나씩 먹였다. 새로 갖춘 옷이기에 몸으로 때우지 않고 고천양은 공격을 하나하나 피하며 산적들을 제압했다. 산적들에게 힘겹게 대항하던 두명의 장한은 고삼에게 감사인사를 올린 후 급히 쓰러진 젊은 청년을 흔들었다.
"도련님, 도련님, 빨리 깨시오. 이대로 눈 감으면 우리가 나으리와 마님의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것이오."
천살이 가까이 다가가보니 청년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이 청년은 혹시 우겸이 아니오?"
예전에 개울에서 천살을 발견하고 건져낸 소년 우겸이다.
"맞습니다. 과거시험 보려고 경사로 가다가 산적들을 만났습니다. 은자 몇개 쥐어주고 통과하려고 했는데 도련님이 고집을 부리셔서 그만 산적들과 다투게 되었습니다."
천살은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뚜렷하던 어린 우겸이 생각났다. 분명 산적들에게 노략질은 나쁜것이니 칼을 버리고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를 했을 것이다. 자신들을 놀린다고 생각한 산적들은 칼부림을 했을 것이고 말이다.
천살은 내공으로 우겸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하지만 상처가 전부 치료되었지만 우겸은 깨어나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고천양이 우겸을 들쳐업고 의원을 찾았다. 의원은 우겸의 눈도 뒤집어보고 침으로 몇개의 혈도도 찔러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에 충격이 가서 지금 깨어나려 하지 않소. 며칠만 기다리면 알아서 깨어날 것이오."
그말에 두명의 장한은 발을 동동 굴렀다.
"며칠이나 지체하면 과거시험을 놓칠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당장 깨우는 방법이 없나요?"
"이 무식한 놈들. 머리가 다친 걸 회복하느라 잠을 자는데 억지로 깨웠다가 바보라도 되면 네놈들이 책임질거냐?"
의원의 호통에 두 장한은 대답을 못했다. 천살은 우겸을 객잔에 데려다 눕힌 후 두 장한에게 말했다.
"우겸은 내가 책임지고 과거시험전에 경사까지 데리고 갈테니 걱정 마시오. 그리고 나으리와 마님에게는 예전에 목숨을 구원받은 천모라고 하면 잘 알 것이니 두분은 이대로 돌아가시오."
이 둘은 우씨 일가를 따라 벽운산장으로 가지 않고 원래 장원에 남아 있었기에 천살의 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덩치가 큰 천씨성을 가진 사람을 우겸이 구했던 일은 여러번 들어서 알고 있다. 거기에 고천양의 무공도 보았기에 큰 의심 없이 곧바로 장원으로 돌아갔다.
우장주는 우겸이 정신을 잃었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했다. 천살의 생김새를 전해듣고 예전의 그 순박한 소년임을 확신한 우장주는 천살이 자신의 외동아들을 과거시험전에 경사까지 데려다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아들 일이라면 안절부절 못해야 할 부인까지 태연한 기색이자 우장주는 참 희한한 일이라고 혀를 찼다.
- 작가의말
孤身單影, 사실 정확한 사용법은 孤身只影 고신지영 입니다. 다만 단이 더 익숙한 분들이 대부분이기에 단을 사용했습니다. 이번화의 내용을 한줄요약하면 고천양이 솔로부대 탈출을 암암리에 결심하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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