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영웅
산에서 밤을 보낸뒤 날이 밝자마자 천살과 당무영은 출발했던 부대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천살이 함정을 손쉽게 발견하는 모습에 당무영은 감탄했다.
"어제도 그렇지만 천형은 어떻게 함정을 그렇게 쉽게 찾아내시오?"
"눈에 부자연스러움이 보이면 보통은 함정이오. 당형도 주의를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소."
말이 쉽지 울퉁불퉁한 산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발밑에 주의력이 집중된다. 천살은 빛이 부족한 공동에서 살면서 습관이 되어 쉽게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 간단히 따라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본진하고 삼십리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전방주둔지에 도착하니 무림맹과 명화교가 정면대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명화교의 열세였다. 무림맹이 몰래 증원한 삼천 가까이 되는 병력이 일시에 전장에 투입되는 바람에 명화교는 수적열세에 처해있다.
명화교에도 무림맹의 간자가 적지 않게 들어와 있지만 무림맹 역시 명화교의 첩자들이 득실거린다. 명화교도 지속적으로 외부로부터 무인과 병사를 충원해야 하고 무림맹 역시 마찬가지다.
삼천의 무인과 병사들의 증원과 같은 큰일은 이미 명화교에 알려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림맹은 이번에 비밀을 잘 지켜서 삼천의 증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오철의 독단으로 정찰조가 깊숙히 들어오는 바람에 본진에서 한참 떨어져서 숨어있던 삼천의 병력을 들킨 것이다.
덕분에 무림맹은 거사일을 억지로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현재 명화교의 세력권으로 인정된 곳들을 무림맹에서 찬탈하면 황실에서 그곳들을 무림맹의 세력권으로 암묵해 주겠다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변방이라 빈곤한 지역이지만 비단의길 이라고 명명된 교역로에서 상인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세금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무림맹이라는 돈 잡아먹는 괴물을 유지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지금 황실이 내민 미끼를 무림맹이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나는 천형의 뜻에 따르겠소."
"당형은 여기에 몸을 숨기고 있으시오. 내가 뒤로부터 급습하여 시간을 끌겠소. 아마 지금쯤 증원군이 이미 출발했을 것이오."
"천형, 너무 무모하오. 천형은 정말 목숨이 아홉개라도 되는 것이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죽지 않을 자신이 있소."
암기를 사용하는 당무영은 대규모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천살의 말대로 높은 나무로 올라가 몸을 숨긴 당무영은 천살이 홀로 무림맹의 후미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지켜봤다.
"마교가 후미를 급습한다. 마교의 함정에 빠졌다."
천살은 음혈을 쉬지 않고 휘두르며 입도 쉬지 않았다. 뒤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마교의 함정이라는 외침이 퍼지자 정면으로 향해 후미의 상황을 알수 없는 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잡견맹이 계책에 빠져들었다. 이미 포위하였으니 잡견들의 가죽을 발라버려라."
명화교의 지휘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수적으로 우세하지만 갓 투입된 삼천은 전장경험이 없는 새내기들이다. 전투경험이 없는 자가 대다수일 뿐 아니라 이런 대규모전투는 처음이라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후미는 이미 제압했다. 동요하지 말고 정면의 적을 무찔러라."
무림맹의 지휘자가 급히 군심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천살이 후미에서 계속 날뛰니 설득력이 떨어졌다. 천살은 마기가 점점 치밀어 오르자 마지막으로 크게 외쳤다.
"지휘부가 습격 당하고 있다. 빨리 군사를 돌려 지휘부를 구해라."
눈이 붉게 물들자 천살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힘도 엄청 강해져서 상대의 병장기를 부수고도 힘이 전혀 줄지 않았다. 후미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의 간격이 짧아지자 전방의 병사들의 동요가 점점 커졌다.
"잡견맹의 지휘부가 도망간다. 잡견들의 멱을 전부 따버려라."
명화교의 병사들과 칼을 맞대고 있던 몇몇 무림맹의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힐끗 돌려 지휘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저승사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게 되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흙탕물을 제대로 흐려놓았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 날붙이가 살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알리는 처절한 마지막 비명, 갑자기 효자가 되어 부모를 찾는 소리, 상대의 피를 갈구하며 내지르는 악에 받친 기합소리, 온갖 소리로 가득찬 지옥도에서 천살은 평온함을 느꼈다.
불구덩이와 칼산에서 헤매다가 어미의 품을 찾은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이 편하게 이완되고 산해진미를 포식한 듯 마음이 흡족해졌다. 음혈에 의해 베어진 육신에서 뿜어져나오는 피는 향긋한 냄새를 풍겼으며 비명소리는 천뢰(天籟 - 하늘의 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천살마기는 담중혈을 차지하고 있는 천살의 의념을 살살 꼬드겼다. 눈 한번 감으면 지금보다 더한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고 꿀바른 혀로 속삭였다. 코를 자극하는 향긋한 피냄새와 귀를 즐겁게 하는 비명소리들이 천살의 의지를 갉아먹었다.
'피는 비리고 비명소리는 역겹다. 이 전장은 몇몇 인간의 욕심에 의해 무관한 자들이 피를 흘리는 추악한 곳이다. 이곳은 인세의 지옥이지 천국이 아니다.'
천살은 끊임없이 되뇌이며 천살마기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명주의 향기처럼, 꽃의 내음처럼, 잘 삶은 고기의 향처럼 코를 자극하던 피냄새가 옅어지더니 비린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비명소리가 악다구니로 변했다. 부드러운 말투로 속삭이던 천살마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내가 이겼다.'
천살의 선포에 천살마기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천살은 손발의 감각이 돌아옴을 느꼈다. 어제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던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천살마기를 물리치고 본인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자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졌고 병장기에 실린 힘도 훨씬 부족했다. 천살마기가 주도권을 가져간 후 단 한번도 적중당하지 않았던 몸이 여러가지 병장기들에 의해 생채기와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몸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음미하며 천살은 천살마기에게 외쳤다.
'지금이 바로 천국이다. 내 의지가 자유로운 곳이 바로 천국이란 말이다.'
"같은 편이오."
챙 하는 소리 뒤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살은 정신을 차렸다. 천살마기에게서 억지로 주도권을 빼앗아 냈으나 정작 본인은 전장의 광기에 취했다. 천살마기를 물리쳤다는 안도감에 정신이 약해진 틈을 타 전장의 광기가 침습해 들어온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림맹의 병사들은 이미 꽁지를 보이고 있었다.
음혈을 잡은 오른손이 덜덜 떨려왔다. 손잡이가 핏물에 절어 미끄러워지자 검을 잡는데 큰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평소보다 강한 힘으로 검을 잡고 휘둘렀으니 오른손이 한계에 달했다. 잘 펴지지 않는 손가락을 억지로 편 후 검을 닦아서 검집에 넣었다.
천살과 검을 마주쳤던 자는 존경의 눈길로 천살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몸에 칼자국만 수십개인데 천살의 눈은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면 빈혈로 힘이 빠질만도 한데 여전히 두눈은 굳센 의지로 가득했다.
"우리의 영웅을 데려다 치료를 해주거라."
안내하는 무사의 뒤를 따라가니 의원으로 보이는 자가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천살의 상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정도면 살기 힘드오. 좋은 술이나 먹이고 미련없이 보내시오."
천살은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의원이 고개를 저을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살 수 있는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조용한 막사 하나 내주시오. 직접 치료를 하겠소."
의원을 노려보던 무사는 천살의 말에 허리를 숙였다. 이대로 무림맹의 손에 죽나 하고 있던 때에 전황을 반전시킨 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홀로 무림맹의 후미를 습격하고 무림맹의 군사들을 동요시켜 전세를 반대편으로 기울게 했다. 오늘 전장에 나선 수천명의 병사들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휘관이 사용하는 막사인 듯 크고 널찍했다. 태청금단을 하나 삼킨 후 복마공을 운용했다. 피를 많이 흘려 약해진 지금 천살마기가 자꾸 공격해왔다. 복마공은 천살마기를 누를 뿐 아니라 치료효과가 탁월했다. 불사공과 결합하여 순식간에 온몸의 상처를 치료했다.
일각도 안되는 시간이 지난 후 천살이 멀쩡한 상태로 나오자 막사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는 천살에게 더욱 공경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을 애타게 찾고있던 당무영과 재회를 한 후 둘은 무사를 따라 지휘관에게 불려갔다.
"천살과 당무영은 적의 이상을 정찰하여 알림으로 명화신교의 수천 교도의 목숨을 구했다. 그 공을 인정해 성화군에 편입한다. 특히 천살은 적의 후미를 급습하여 교란시켜 전황을 반전시킨 공을 인정해 성화군의 백인장으로 임명한다."
성화군은 정규편성이 이천명이지만 실제로는 천삼백명정도이다. 가장 많이 그리고 빠르게 죽어나가는 군대로 위험하고 불리한 전장에도 많이 투입된다. 하지만 명화교도들이 가장 선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성화군에 소속된 자들은 천신의 주시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둘은 부관의 인솔하에 성화군으로 향했다. 성화군은 최정방이 아닌 본진에 위치한다. 그곳에서 부채살처럼 펴진 전방의 병력들을 골고루 지원하는 것이다. 천살은 최근 백인장이 죽은 백인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말이 백인대이지 삼십명정도밖에 없었다. 스무개의 백인대 중에서 백명 정원을 채운 백인대가 몇개 없다. 천살의 십칠백인대도 원래는 육십명이었는데 백인장이 죽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거쳐서 삼십명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보통 백인장은 본래 소속된 병사들중에서 뽑는것이 관례이다. 천살처럼 불쑥 나타나 백인장의 자리를 꿰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직 천살의 배경을 몰라 반발하는 자는 없지만 천살을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만은 않았다.
부대원들의 눈빛을 느낀 천살은 내친김에 당무영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천살이 자리에 없거나 죽었을 경우 당무영에게 지휘권이 양도된다. 백인장에 이어 부장의 자리도 새로 온 외인이 차지하자 부대원들의 불만이 더 커졌다.
천살의 부상이 다 나았지만 지휘부는 천살의 부대에게 휴식을 명했다. 천살은 당무영의 무공이 말 그대로 형편없자 무공검법의 적구무의를 가르쳤다. 주로 회피동작 위주인 적구무의는 암기술을 사용하는 당무영과 매우 적합했다. 천살의 공격을 회피하며 당무영이 적구무의를 익히고 있는데 원래 부관이었던 조전이라는 자가 말을 걸어왔다.
"백인장, 비무 한번 어떠시오?"
- 작가의말
“백인장, 비누 한번 어떠시오?”
“동자공 수련 중이네. 아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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