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선출
모용궁현은 이렇게 난감한 적이 처음이다. 모용가의 위세도 먹히지 않고 무공으로 간단하게 제압하는 것도 힘들다. 실력을 다 드러내고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모인다.
모용남매가 어느 객잔에서 밥 먹었다더라는 소문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모용남매가 어떤 객잔에서 누구랑 싸웠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너도나도 관심을 가질 것이고 은밀하게 만나려던 자와의 관계가 탄로날 수도 있다.
송백자가 첫번째 무림맹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화산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사이가 안 좋은 두 문파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는 지 모르지만 화산을 지지하기로 약속했던 문파들 중 절반정도가 화산과 함께 무당을 지지했다. 남은 절반의 일부는 무림맹에 참여하지 않고 일부는 소림으로 일부는 중립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몇달전 화산이 무림맹 탈퇴를 선언하고 봉문을 하는 바람에 화산을 따라 무당을 지지하던 문파들이 흔들리고 있다. 맹주자리를 직접 노리지 않더라도 강한 세력을 이룬다고 손해볼 일은 없다. 거대한 자금이 흐르고 수많은 이권이 오가는 무림맹이기에 요직을 차지하면 가문이나 문파에 큰 보탬이 된다.
모용궁현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구해준 것은 점소이였다.
"다른 방의 손님이 돌아와서 방을 물렸습니다."
개봉에서 일을 다 보았는지 방을 물린 손님이 생긴 것이다. 개봉성내에 금의위와 동창들이 잔뜩 깔렸기 때문에 성안의 객잔에 묵으려는 손님이 별로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금의위와 동창이 수색을 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개봉에 도착하기 몇달전부터 설치고 다녔고 주체가 개봉에 와서 법사에 참여하는 지금에는 더욱 날뛰고 있다.
"강호의 물은 돌고 돈다고 하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모용궁현은 협박 비슷한 말을 건네고 점소이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둘은 나무로 된 창문을 열고 푸른천을 내걸었다. 약속한 자가 그 천을 보면 창문으로 들어올 것이다. 사실 모용세가 입장에서는 조심할 일이 아니지만 만나려는 자가 조심성이 많아 어쩔수 없이 이런짓을 하는 것이다.
저녁을 배부르게 먹은 후 천살과 고삼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 천살이 침대에 눕고 고삼은 바닥에 자리를 깔았다. 고삼은 소양공과 횡련일기공의 수련을 엇갈아가며 반복했다. 사실 고삼의 경지에서 몽둥이로 온몸을 자극하는 외공의 수련은 크게 효과가 없다. 지금 하는 소양공과 횡련일기공의 수련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루에 한번 혹은 두번씩만 수련하는데는 다 도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벽에 부딪혔을 때 아무 효과도 없이 꾸준히 해오던 수련들이 빛을 발할 것이다. 천살도 내공이 전혀 모이지 않는 동자공을 꾸준히 연마했다. 결국 그 덕분에 혼원공을 익히고 내공을 빠르게 모을 수 있었다.
옷자락이 바람을 빠르게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천살은 내공을 움직였다. 천살의 내공의 경지가 너무 높아 모용형매도 천살의 경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수로 생각했다. 고삼 역시 초식수련이 부족해 움직임이 어설프기에 그저 좋은 영약 먹고 운좋게 내공을 모은 애송이 정도로 취급했다. 거기에 은밀한 만남을 원한것은 상대방이지 모용남매가 아니기에 모용궁현은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장장로께서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해주시니 이 모용궁현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모용용봉의 위명이 이 허명만 얻은 장모보다 훨씬 쟁쟁한데 이리도 겸손하시니 모용가의 앞날이 밝아보이오."
모용형매를 만나러 온 것은 형산파의 장원산이었다. 천살은 아까 모용궁현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강호의 물은 돌고 돈다는 그 협박섞인 작별인사 말이다. 과연 강호의 물은 돌고 돌아 여기에서 장원산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장로님도 바쁘신 분이니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 하겠습니다. 소림과 맹우관계라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저희한테 연락주신 겁니까? 다음대 맹주로 가장 유력한게 소림이라 알고 있습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장원산의 대답이 들렸다.
"모용공자는 모용세가의 소가주라 들었소. 하지만 현 모용가의 가주는 모용공자의 부친이 아니라 백부인데 자신의 자식을 제치고 모용공자에게 가주위를 넘길 작정이라 하더군. 나는 모용공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과감히 소가주 자리에 앉힌 모용가주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소."
"우리 형산파도 마찬가지요. 형산삼걸이라고 세명의 제자를 한데 묶어서 추켜세우지만 사실 장현성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장문인의 아들과 조카라서 허명만 얻은 것이오. 형산삼걸의 위명은 장현성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차를 마시는지 후루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형산에서 무공이 가장 강했지만 장문인이 되지 못했소. 형산파는 문파라고 하지만 세가와 다름없이 장문인의 혈족들이 계속 장문인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소. 하지만 수십년전만 해도 형산보다 못했던 무당파가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보시오. 그래서 나는 능력이 있는자가 장문인의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소림은 나와의 약조를 어기고 나와 장현성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소. 그리고 내가 형산을 떠나 무림맹에 있는 동안 장문인과 그 혈족들이 문파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 하더니 이번에 장현성마저 무림맹으로 파견보냈소."
장원산은 화가 났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공이 어느정도 경지에 오르면 숨이 깊어지기에 어지간히 화가 나서는 숨이 거칠어지지 않는다.
"무력으로 제압하려면 나와 현성이 둘이면 충분하오. 하지만 그 과정에 많은 형산파 제자들이 죽거나 다칠 것이오. 그래서 나한테 무력을 빌려줄 수 있는 문파나 세가를 찾고 있소. 내 말에 따르는 중소문파들이 꽤 되니 무엇을 하더라도 작지 않은 힘이 될 것이오."
장원산의 말에는 허세가 들어있다. 비록 장원산이 형산파 제일고수이고 장현성이 젊은 세대에서 최고수라고 하지만 기습을 통한 각개격파가 아니면 남은 모두를 이기기 힘들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하면 밑천을 털리는 것이니 무력지원이 그렇게까지 절실한게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허세를 부린 것이다.
"비천신룡의 위명이야 멀리 떨어진 모용가에서도 귀에 익도록 들었습니다. 장현성 역시 일전에 한번 만나보았는데 나이에 비해 기도가 정연하여 능히 문파를 일으킬 인재상이었습니다. 나쁜 일도 아니고 형산파를 위하는 일이니 저희 모용세가에서 도움을 드린다 해도 딱히 흠이 될 건 없어보입니다. 다만 어느정도 무력이 필요한지가 관건입니다."
모용세가에서 너무 강한 무력을 보내면 도움이 아니라 간섭으로 바뀐다. 형산파의 무력수준이야 장원산이 가장 잘 알테니 어느정도 도움이 필요한지는 장원산이 정해야 한다. 모용세가 입장에서야 도움을 팍팍 주어 장원산이 부담을 느끼도록 하고 싶지만 장원산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 규모를 정하는 것은 장원산에게 일임했다.
"형산파의 일은 급한것이 아니니 맹주선출이 끝난 다음에 정해도 무방하오. 모용세가에서 이 장모를 도울 의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만남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오. 그나저나 모용세가에서는 맹주선출에 나설 작정이시오?"
모용가는 선비족의 후예이다. 무림맹주의 자리에 직접 나가기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한족의 피가 많이 섞였지만 모용세가는 여전히 외인인 것이다. 장원산의 질문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한 모용궁현은 은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로님만 알고 계십시오. 남궁가와 손을 잡았습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장원산은 곧 모용궁현에게 포권을 했다.
"축하드리오. 혼례때 이 장모를 꼭 불러주시기 바라오."
"이 모든게 장로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남궁가에서 무림맹주가 나와야 성사되는 혼인입니다. 이 모용궁현 머리 숙여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용세가가 남궁세가의 남궁천을 지지하는 대가로 모용궁현과 남궁청아의 혼인을 약조하였다. 남궁천이 무림맹주가 된다면 모용궁현과 남궁청아를 통해 두 가문이 처음으로 혈연을 맺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천이 무림맹주가 되지 못한다면 그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다.
모용형매와 장원산이 만나는 자리에 남궁가의 사람이 없는 것은 실패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남궁천이 무림맹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장원산을 모용의 세력으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정보를 얻어내는 능력과 중소문파들 사이에서 여론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모용세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의 성사여부와 무관하게 모용세가는 장로님을 매우 중요한 맹우로 생각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주저없이 말을 꺼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얘기가 끝나자 서로 소소한 정보들을 교환하며 친목을 다졌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장원산은 자신이 아는 정보들 중에 쓸모가 없는 것들을 풀어놓았다. 비록 이미 쓸모가 없는 정보라지만 모용세가에서 비어있는 조각들을 맞추어 상황파악을 더 정확히 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이다.
"마교에 천살마성이 깃든 아이가 있다고 하오. 천살마성이 나이를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천살마기가 세상에 퍼져서 천하가 환란에 빠진다고 하오. 몇년전에 화산에서 갑자기 장문제자와 매화검수를 파견한 일이 있었소. 그때 천살마성을 생포한 문파를 다음 무림맹주로 밀어주기로 약속을 했소."
모용궁현과 모용부설은 이십대초반의 나이이다. 천살마성처럼 설화와 같은 이야기에 흥미가 끌렸다.
"그때 남궁천이 무당의 두 장로와 무당오자의 세명과 함께 천살마성을 합공했는데 피륙에만 상처를 입히고 생포에는 실패했다고 하오. 후에 남궁천이 남궁세가에 돌아가서 하는 말이 천하에 내 검에 죽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 또 늘었구나 였다오."
어지간한 고수는 남궁천이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수 있다. 남궁천의 검에 죽을 자격이 있다는 말은 남궁천이 제압할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언젠가 남궁천이 자신의 검에 죽을 자격이 있는 자가 천하에 열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적이 있다. 그 말은 천살마성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천살마성이 현재 마교의 소교주가 되었다는 것이오. 이는 무림맹에서도 아는 사람이 열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오. 두분도 모용가주에게만 알리시고 아무한테나 알리지 말기 바라오."
명화교를 마교라 욕하고 배척하는 것은 정파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을 침공하여 불태운것과 명화교의 언행이 주원장의 미움을 산 것에 있다. 지금의 황제 주체는 반란으로 황위를 빼앗았기에 주원장의 뜻과는 달리 마교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 마교교주의 무위도 무시무시하다고 전해지는데 강한 무공을 가진자가 소교주가 되었다고 하니 모용형매는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건 정보라고 할 수 없는데, 화산의 서창훈이 자결한게 아니라 마교의 소교주의 손에 죽은 것이라는 말이 있소. 생각해보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런 소문이 왜 퍼졌는지 생각해 보시오."
이런 헛소문이 퍼질만큼 마교의 소교주라는 천살마성의 무공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모용형매는 장원산에게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듣고 만남의 목적도 달성하여 기분이 좋았다. 장원산 역시 자신의 가치를 모용세가에게 제대로 보였기에 서로 만족한 만남이었다.
옆방에서 둘의 대화를 엿들은 천살은 갑자기 이들의 계획을 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하지만 무림맹의 세력들이 어떻게 뭉쳤는지 등 정보가 부족하여 이내 포기했다. 문득 예전에 한번 상대했던 남궁천의 검이 생각났다. 지금 다시 한번 대결하면 더욱 많은것을 훔쳐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다.
- 작가의말
새벽에 코가 아파서 깨어났습니다. 코감기 걸렸더군요. 그래서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지금 감기가 거의 다 낫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외전을 쓰는 날인데 때에 맞춰 약을 먹었습니다. 하늘의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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