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관수련
상봉의 기쁨을 나눈 뒤 천살은 곧바로 탈출하자는 당무영과 고삼의 요구를 거절했다. 복마전은 감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천살을 보호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천살이기에 밖에 나가면 여러가지 위험에 봉착할 것이다. 생사의 관두에서 몸속의 천살마기가 움직여줄지 미지수이기에 무공을 회복해야 한다.
당무영은 천살이 내공을 잃은 뒤 수련을 하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고삼은 모든게 자신의 탓 같아서 천살이 하자는대로 했다. 천살을 구출하려고 했던 두 사람은 예정과는 달리 폐관수련을 하게 되었다.
당무영은 미리 준비한 침으로 자신의 단전을 봉했다. 내공을 마음대로 멈출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살을 치료하려고 준비했던 침인데 당무영 자신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살의 멀쩡한 모습을 보니 금창약과 내상약도 당무영과 고삼이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내공이 사라지자 암기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명현공을 사용할 때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내공이 없는 탓에 명현공을 사용해도 고삼과 천살에게 항상 들켰다. 천살이 내공없이 명현공을 펼쳤는데 찾아내기 힘들자 당무영은 수련목표를 정했다. 명현공과 암기술을 내공을 사용할때와 같은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천살은 비록 내공이 사라졌지만 고삼이 운기할 때 내공이 움직이는 경로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횡련일기공이 깨져서 혈도들에 내공이 쌓이지 않는 것뿐이지 경지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고삼의 운공을 보고 한참 고민하던 천살이 입을 열었다.
"이 운기법의 초반은 음양음양 이렇게 바뀌어. 음에 속하는 혈도와 양에 속하는 혈도를 번갈아 가며 내공의 양을 키우지. 하지만 그뒤로는 음음음음으로 음의 혈도만 지나는구나. 이렇게 되면 음양의 균형이 사라져서 내공이 많아지면 무언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운기경로를 이렇게 바꾸어 보거라."
운기경로를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불사공을 가진 천살이기에 마음대로 이것저것 해볼 수 있다. 때문에 주화입마나 내상 이런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아예 없기에 고삼에게 운기경로를 바꿔보라고 권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절차로 고삼의 경지를 밟은 자라면 당연히 천살의 말에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고삼은 천살이 시키는대로 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고 또 천살의 말에 고분고분하다. 그래서 일말의 의심과 머뭇거림이 없이 천살이 지시한 경로대로 운기경로를 바꾸었다.
한동안 운기를 하고 눈을 뜬 고삼이 입을 열었다.
"예전 운기경로가 더 많은 기운이 모였지만 소양공으로 변하는 양이 적었는데 지금은 모이는 기운은 적지만 소양공으로 바뀌는 기운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의 운기경로가 최선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이거다 싶은 느낌이 올 때면 운기경로를 바꾸어서 해보거라."
"저는 소양공을 익혔으니 반대로 마무리를 양양양양으로 하면 어떨까요?"
고삼은 그렇게 천살의 격려속에 준비해온 내상약을 탕진하며 천양신공(天陽神功)을 만들어냈다. 당무영의 침술 덕분에 내상약의 소모를 줄여서 내상약이 다 떨어지기전에 소양공과 결합하여 새로운 심법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무공이나 심법을 만들어내는 자는 무학의 대종사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라는 강호의 경언(警言 - 경고의말)을 고삼이 몸소 증명했다.
한편 천살은 고삼의 도움으로 횡련태보와 횡련일기공을 수련했다. 아프기만 하고 내공이 모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천살은 예전에 십년정도 아무 효과도 없는 동자공을 익힌 경험이 있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을 품지 않고 차근차근 수련을 해나갔다.
사장로는 최근 들어온 정보 때문에 이마에 주름이 잔뜩 늘었다. 하오문에서 고삼으로 추정되는 자가 동료와 함께 등봉현에서 목격 되었고 소림으로 향해 가는것을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추었다는 정보를 보내왔다. 고삼이 천살과 함께 당장이라도 사도에 나타날 것 같아서 낮잠을 자다가도 악몽으로 깨어났다.
"최근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천살을 제거하는 것이다. 한선후도 천살을 두려워하고 무림맹도 천살을 두려워하고 황실과 금의위도 천살을 두려워한다. 천살이 사라지면 우리가 서로서로 균형을 맞춰 예전처럼 적당히 서로 견제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사장로는 천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천살을 제거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은연중에 정답에 접근했다. 호랑이는 사람을 해칠 생각이 없지만 사람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 때문에 늘 전전긍긍한다. 호랑이를 창살에 가두어도 언제 창살을 부수고 나올까 늘 걱정하는 것이다.
천살 덕분에 겁을 먹은 주체가 무림에 적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 마음을 잘 헤아린 벽휘동이 무림을 탄압할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목표가 된 것이 천살과 한편이 될 수도 있는 마교인 것이다. 천살이 사라진다면 무림을 향한 칼날이 마교에서 소림이나 무당으로 바뀔수도 있다.
"하지만 천살을 어떻게 제거할 생각이십니까?"
"명군 그 아이가 했던 말을 잊었느냐? 당문의 무형지독을 얻어서 천살에게 투독(投毒)을 하면 된다. 우선 말재주가 좋은 자들을 파견해 당문의 무형지독에 대한 정보를 캐내거라. 위치와 사용법에 대해 최대한 알아내도록 해라.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당헌영은 독의당(毒醫堂)의 당주이다. 하독하는 자들과 해독하는 자들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독과 의술에 대한 연구가 지지부진하자 당가주는 과감하게 둘을 하나로 합쳤다. 당헌영은 독이나 의술 둘다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지만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귀기 좋아하기에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 그리고 독이나 의술 한쪽에 높은 성취를 가진 자가 당주가 되면 반대쪽에서 불만이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기에 아예 별볼일 없는 당헌영이 당주가 되었다.
당문에서도 무슨 독인지 모를 절독에 중독된 자가 당문을 찾았다. 처음보는 독이어서 독과 의술이 당문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들이 나서서 해독을 완성했다. 중독자의 가족은 당문에 은자 오백냥으로 사례를 했을 뿐 아니라 해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술을 대접하겠다고 거듭 청했다.
성의를 무시하지 못해 당헌영이 대표로 이들과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치료비로 은자 오백냥씩 쾌척하는 자들과 친해져서 나쁠것이 없다. 거기에 당헌영은 원래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자이다.
"해독에는 당문이 천하제일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오늘 제대로 느꼈습니다. 중원에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전부 속수무책으로 물러섰는데 당문은 하루도 안걸려서 해독을 끝냈습니다. 제가 돌아가면 꼭 당문의 위명이 중원 전체에 퍼지도록 널리 알리겠습니다."
당헌영은 무공에 대한 자질이 높지 않다. 내공수위도 낮은데 술을 좋아해서 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다보니 얼큰하게 취했다. 그때 중독된 환자의 여동생이라는 여자가 또 술을 권해왔다.
"당대협 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제 가형이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소녀 평생 당대협의 은덕을 잊지 않고 결초보은 하도록 하겠습니다."
펑퍼짐한 옷도 여인의 큰 엉덩이와 가슴을 가리지 못했다. 초반에는 자제했지만 술에 취한 당헌영은 대놓고 가슴과 엉덩이를 훑어보았다. 여인은 전혀 기분나쁜 기색이 없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당헌영에게 술을 권했다.
"당대협은 당문에서 어느정도 되는 분이신가요? 헌앙한 모습을 보고 저는 당문의 가주께서 직접 나오셨나 하고 놀랐답니다."
당헌영은 여인이 자신의 비위를 맞춰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수 없다.
"가주님이 나보다 백배는 더 멋지신 분이지. 나로 말할것 같으면 당문의 독의당 당주로 당문의 모든 독과 영약의 제조와 보관 그리고 사용을 관리하는 사람이야. 내가 안된다고 하면 가주가 와도 안되는거야."
가주가 독이나 영약을 잘못 사용하려고 하면 당헌영이 제지할 수 있다. 하지만 용도가 정당하다면 당헌영은 가주가 명하면 곱게 가져다 바쳐야 하는 신세이다. 하지만 당헌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을 꾸몄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가주의 귀에 들어가도 딱히 문제될 것이 없는 말이다.
"첫인상부터 비범해 보였는데 독의당 당주님이셨군요. 소녀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벌주로 석잔 마시겠습니다."
여인이 벌주라며 술을 마시려 하자 당헌영은 황급히 제지했다.
"혼자 먹는 술은 참으로 쓸쓸하오. 이 당모가 소저를 벗해 석잔술을 마시겠소."
그 뒤로도 이사람 저사람 술을 권해왔고 당헌영은 고주망태가 되어버렸다.
"당주님, 그런데 가형이 중독된 독은 무슨 독인지 당문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나요?"
여인의 말은 당헌영의 자존심을 긁었다. 비록 놀기 좋아하고 게을러서 개인의 성취는 평범하지만 당헌영이 당문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보다 대단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독이 있고 똑같은 독도 건조한 곳에서 습한 곳으로 옮겨놓으면 그 성질이 변하오. 그래서 당문이라고 세상의 모든 독을 아는것은 아니오. 그리고 소저의 가형이 중독된 독은 별볼일 없는 독이라 우리 당문이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은 것이오."
"어머, 그러셨군요. 그럼 당문에는 대단한 독들이 매우 많겠네요?"
"최근 많이 알려진 독이라면 칠변절독이 있겠소. 무당파의 대장로인 송백자가 그 독을 한잔 마시고 죽을뻔했소. 급히 해독제를 먹었는데도 독기운에 의해 내상을 입고 몇달이나 치료를 했다오."
"그리고 화골단장이라는 독이 있는데 실제로 뼈를 녹이고 장을 끊는 그런 독이 아니오. 다만 이 독에 중독되면 산채로 뼈가 녹아내리고 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하오. 당문과 깊은 원한을 가진 자들을 처단하는데만 쓰는거요."
"말만 들어도 매우 무시무시해 보이는군요. 그럼 칠변절독과 화골단장 중 어느 독이 당문 최고의 독인가요?"
당헌영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칠변절독이나 화골단장정도 되는 독은 당문에 십수가지 있소. 각각 장단점이 있기에 어느 독이 최강이라고 할 수는 없소. 굳이 최강을 뽑으라면 당연히 독왕께서 남긴 무형지독이오."
"무형지독이라니 처음 들어보는군요. 무형지독은 아무런 형태도 없는건가요? 그럼 가루나 액상(液狀 - 액체상태)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독인가요?"
당헌영은 여인이 슬슬 몸을 붙여오자 몸과 마음이 달아올랐다. 거기에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왼손을 슬그머니 여인의 허벅지로 올려놓은 당헌영은 여인의 말에 대답했다.
"무형지독은 술단지안에 보관해두고 있소. 어떤 모양이고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오. 다만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오. 그래서 무형지독이라 부르는 것이오."
아침에 깨어난 당헌영은 낯선 장소에 흠칫했다. 아픈 머리를 억지로 굴려보니 어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났다. 탁자위에 곱게 접힌 서신이 있어 펼쳐보니 여인의 수려한 글씨체로 작별인사가 담겨 있었다.
'소녀 대협에게 보답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혹여 다음생에 인연이 된다면 다시 대협과 붉은실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당헌영은 그제야 어젯밤 여인과 광란의 밤을 보냈던 것이 기억났다. 방사를 하는 도중에 여인이 무언가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신이 일일이 대답했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탁자위에는 은자 오십냥이 들어있는 돈주머니가 있었다. 당헌영은 돈주머니를 들고 여인들이 좋아하는 노리개를 파는 점포로 발길을 향했다. 은비녀따위로는 마누라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기에 부디 좋은 물건이 점포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기원했다.
- 작가의말
사장로의 수하들이 무형지독을 훔쳐낼 예정입니다. 곧 주인공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치겠군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천살이 무형지독에 의해 죽어버리면 당무영과 고삼 중 누가 주인공으로 적합할까요?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