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천살의 앞에 선 자는 해남파 장문인인 오천이었다. 해남에 있었다면 이 비무를 놓쳤을 것이나 다행히도 보타암에 방문했다가 비무소식을 들었다. 한눈에 천살과 자신의 격차를 알아챈 오천은 원래 구경만 하려고 했다. 해남파가 정식으로 무림맹에 가입되지도 않았기에 눈요기만 실컷 하려는 생각으로 자리했다.
남궁천과의 대결은 수준이 너무 높아서 오천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의 삼검은 천살이 서문고검을 배려하여 알아보기 쉽게 시전했기에 오천도 거기에 담긴 현묘함을 쉽게 느꼈다. 남해삼십육검을 대성을 눈앞에 두고 거의 십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던 오천이었기에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천살은 오천의 남해삼십육검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천살도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그저 흥미로운 검법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보니 남해삼십육검은 수준높고 완성된 대단한 검법이다.
오천이 남해삼십육검의 초식을 하나하나 바꿔가며 펼쳤지만 천살은 시종일관 비익쌍비의 한 초식으로 수비했다. 비익쌍비의 두갈래 검에 각각 음과 양을 실었다. 삼십육개 초식을 한번 다 시전한 오천은 검을 거두고 이마를 찌푸린채 고민에 잠겼다.
천살의 검에 담긴 음양은 오천의 검에 담긴 음양과 달랐다. 오천도 그것을 눈치 챘지만 무엇이 다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천살은 지나가는듯한 말투로 가볍게 말했다.
"태극을 이루려는 음양과 태극에서 나온 음양의 차이오."
천살의 말에 오천은 피를 울컥 토했다. 모든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남겨두었는데 천살의 말에 담겨있는 거대한 깨달음의 충격에 그만 내상을 입은 것이다. 오천의 검에 담긴 음양은 태극을 이루려는 음양을 오천이 억지로 구분한 것이고 천살의 검에 담긴 음양은 태극속에서 뽑아낸 음양이다.
같은 무공경지에 같은 내공수위일 경우 오천의 음양이 위력이 더 강하다. 하지만 수준은 당연히 천살의 것이 더 높다. 단순히 무공의 위력만 추구하면 현재의 상태가 더 강하겠지만 더 높은 경지로 향하려면 위력을 줄이더라도 천살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경지가 깊어질수록 위력이 점점 더 강해져 현재의 위력을 훨씬 초과할게 뻔하다.
"불기불득 불파불립이구나."
불기불득은 비우지 않으면 다시 채우지 못한다는 뜻이고 불파불립은 기존 틀을 깨지 못하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천은 큰 내상을 입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킨 후 자세를 바로 하고 천살에게 포권을 했다.
"천대협께서 덕으로 원한을 갚으니 이 오천 부끄러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해남파가 비록 변방의 소문파이지만 오늘 입은 은혜를 갚을 날이 오면 칼산이든 불바다든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겠습니다."
키가 천살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옷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연무장을 걸어나가는 오천의 기세는 집채만한 바위도 삼켜버릴 파도처럼 위맹했다. 몸은 비록 내상을 입었지만 새로 얻은 깨달음으로 오천의 마음은 더없이 단단해졌다.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무당이 한번 칠성진으로 천소협을 상대해 보고 싶소."
일곱명의 무당장로가 천살의 앞에 나섰다. 무당에서 비무할 당시 천살이 칠성진을 상대하다 패배를 인정했다. 고수에게는 이런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때 천살이 어떤 마음으로 패배를 인정했는지 몰라도 다시 칠성진을 상대하면 조금이라도 위축이 될 것이라는게 무당파 장로들의 생각이다.
봉문한 뒤 이들 일곱은 칠성진의 연마를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기에 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상 무공이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 천살에게 설욕하는 방법은 칠성진밖에 없다는 생각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당을 떠나기전 송운자에게서 항복을 받아냈기에 천살과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일원을 얻기전의 천살이라면 칠성진의 현묘한 변화에 대응을 못하고 휘둘렸을 것이다. 무당의 일반제자들이 운용한 칠성진도 힘으로 부술수 있었지만 파해는 불가능했던 천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천살은 예전의 천살에 비교하면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리고 용에게 여의주가 물린 식이다.
천살은 힘으로 칠성진을 파훼한게 아니라 칠성진의 변화를 꿰뚫고 기술로 파해했다. 가벼운 두개의 찌르기와 하나의 베기에 무당의 장로들은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비익쌍비나 칠성연주처럼 하나의 찌르기와 베기에 여러개의 공격을 실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두개의 찌르기와 베기일 뿐인데 칠성진의 핵과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정확히 찌르고 벤 것이다.
무당의 장로들이 변형된 칠성진으로 다시 덤볐지만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 천살이 칠성진을 한번 견식했기에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변형된 진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하지만 송운자가 항복을 선언한 칠성진은 천살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오. 오기전에 대사형께서 천살마성이 사라졌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묻고싶소."
송운자는 천살마성이 사라졌다고 이들에게 알려주면서 무림맹으로 가는것을 말렸다. 천살마성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라면 무당이 참견할 명분이 있지만 천살이라는 한 인간이 하는 일에는 무당이 끼어들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송운자의 말에 고집을 꺾지 않고 무림맹으로 향했다.
"사라진게 아니고 일원이 되었소."
천살의 말에 일곱 장로는 천살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방금전까지 장로씩이나 되는 자신들이 진법까지 펼쳐서 천살을 상대했지만 가볍게 패하자 송운자의 말을 듣지 않고 여기에 온 것을 후회했다. 무당의 체면을 자신들이 다 깎았다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살의 일원을 이루었다는 말에 그런 자괴감이 사라져버렸다.
"천시주께서 일원을 이룬것은 큰 공덕이오. 천하의 창생들을 대신해 이 부족한 늙은이들이 인사를 올리겠소."
일곱명의 무당장로들이 진법으로도 천살을 어찌할 수 없자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싸늘해졌다. 거기에 몇몇은 천살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행태라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일원을 이루었다는게 무슨 말인지 몰라도 대단한 경지임에 틀림이 없다. 벽휘동은 머릿속에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한 준비를 꺼내놓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혼자 외로운 싸움을 했다.
"곧 이각이오. 더이상 나설 사람이 없으면 비무를 마무리하겠소."
천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벽휘동의 마지막 인내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모든 일이 개판으로 되었을 때 한선후가 사라지고 당문이 갑자기 마교를 적대하면서 형세가 벽휘동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덕분에 지휘사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몇년안에 지휘사의 자리를 밑에서 치고올라오는 자들에게 빼앗길게 불보듯 뻔하다.
벽휘동이 눈짓으로 지시하자 벽휘동의 심복이 손가락 두마디만큼 긴 피리를 꺼내 불었다. 사람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이지만 귓등에 세침을 꽂은 금의위의 사람들은 세침의 흔들림을 통해 신호를 받았다. 당문처럼 여러가지 뜻을 전달할 수 있는게 아니라 미리 약속된 단순한 정보만 전달할 수 있지만 무공고수가 적은 금의위에게는 매우 훌륭하고 은밀한 방식이다.
팽가나 유가 혹은 언가의 무인으로 위장한 금의위들이 앞으로 나섰다. 서로가 서로의 혈도들에 꽂힌 침을 뽑아내자 평범한 무인으로 보이던 이들이 맹수와 같은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런자들의 숫자가 백이 넘어가자 남궁천의 얼굴에도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저정도를 다 제거하려면 남궁천이라도 내공이 바닥날 것 같기 때문이다. 몇년래 황실에서 무림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졌다고 느꼈는데 믿는바가 있었던 것이다.
마교에서 보았던 마인들보다 위력은 부족하지만 이성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이들이 더욱 위험한 존재다. 마교의 마인들은 무기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초식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저 강한 힘과 내공을 가진 일반인과 다름이 없었다. 평소에는 초식도 사용하지만 싸우다가 눈이 뒤집히는 순간 초식이고 뭐고 없이 본능적인 움직임을 취하는 것이다. 이성을 잃으면 작전수행이 불가능한 마인들보다 전략적인 사고와 전술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이들이 더욱 위협적인 것은 분명하다.
금의위는 평소에는 침으로 천마신공을 억제하고 필요할 때 침을 뽑아 천마신공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뇌호혈을 비롯한 머리쪽 혈도들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했다. 강함을 추구하는 무인이라면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위험하더라도 몸으로 부딪히며 무공을 수련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황실에 충성하는 금의위이기에 천마신공을 익혀낸 후 조금만 위험증세가 보이면 곧바로 침으로 천마신공을 봉하고 회복을 했다. 다시 수련해도 괜찮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다시 침을 뽑고 수련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광기에 빠지면 그뒤로부터 쉽게 빠지지만 이들은 한번도 빠진적이 없었기에 안정적인 기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금의위는 먹잇감을 덮치는 굶주린 맹수처럼 천살을 향해 덮쳐갔다. 하지만 고삼의 눈에는 불을 향해 몸을 던지는 불나방 같았다. 사도에서 훨씬 강한 기세를 뿜는 마인들이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천살은 검을 든 손은 가만히 놔두고 왼손만으로 덤벼오는 자들을 상대했다. 천살의 주변에 다가가는 족족 왼손에 명문혈을 맞고 튕겨나가거나 던져지거나 했다. 천살과 한번이라도 접촉이 있었던 자들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벽휘동은 천마신공을 익힌 금의위의 정예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가자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곰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호랑이를 늑대떼로 어찌해보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개인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에 몇년동안 많은 재물과 시간을 투자해서 육성한 금의위의 정예가 하루만에 끝장났다.
백명이 넘는 금의위의 무인들이 눈을 멀뚱멀뚱 뜬채 바닥에 누워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 천마신공을 부드럽게 깨뜨렸기에 큰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혈도를 점혈당한 것처럼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곧 이각이 다 되어가오. 더는 도전할 사람이 없다면 비무의 결과를 선포하겠소."
천살이 다시한번 외쳤지만 이제는 더이상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백명이 넘는 자들이 동시에 덤볐지만 왼손 하나만으로 상대하는 장면은 앞서 남궁천이나 오천 그리고 무당의 장로들과 대결하던 모습들보다 더욱 확실하게 다가왔다.
"그럼 오늘 비무는 본인의 승리로 끝났고 무림맹은 지금 당장 해산에 들어가시오. 삼일의 시간을 주겠소."
남궁천은 다급히 천살의 말을 받았다.
"천대협은 남아서 무림맹의 해산을 감독해 주시기 바라오. 거처는 장원에 빈방이 많으니 걱정 안하셔도 되오."
천살은 황실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려면 자신이 여기에 남아있는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남궁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살이 순조롭게 비무를 승리로 이끌고 무림맹의 해산을 이루어내자 고삼은 기쁜 마음으로 천살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고삼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모용가의 모용부설입니다. 소협의 성함을 알고 싶네요."
"나는"
갑자기 고삼이라는 이름이 창피해졌다. 자신의 이름이 촌스러우면 대형의 명성에도 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도 딱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천양이라고 하오."
천살의 도움으로 자신이 어망간에 만들어낸 심법의 이름이다. 고삼의 대답에 모용부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천양소협이군요. 이름을 기억해 둘게요."
- 작가의말
혹시 고삼 지금 이름 따인건가요? 이 상황 되게 이해가 안되네요.
두편전 댓글에 애꾸의 말이 금의위의 수작이냐고 하는 의견이 있더군요. 반성합니다.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지나쳤습니다. 금의위 + 무림맹이 천살에게 안 좋은 소문을 냅니다. 남궁천 + 동맹세력은 천살에게 좋은 소문을 냅니다. 마교를 해체시키고 마교장로들 죽이고 이런거는 남궁천쪽에서 낸 겁니다. 사람들은 두가지 소문을 듣고 자신들의 흥미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는거죠. 그중 재능있는 자들이 완전한 스토리라인을 완성한 것입니다. 애꾸의 버전 빼고도 다른 버전들이 존재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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