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기공
한운명은 무공이 강하지 않지만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화산에서 아주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화산의 수뇌부들은 한운명의 재능을 아낀 나머지 강호로 내보내지 않았다. 사형제들도 한운명의 도움을 받아 무공경지를 높인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 인망도 좋았다.
그래서 한운명은 화산파에서 천사성의 진실된 정체를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물론 호매령과 연화 조자운 그리고 유씨 삼형제에 아노까지 알고 있기에 대단한 비밀은 아닌것 같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천사성을 죽이면 그 화가 천하에 미친다지만 화산에 가장 큰 화가 미칠것이 뻔했다. 한운명은 귀신따위를 믿지 않는 성격이지만 서장로의 말이라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는다. 천사성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것을 알기에 출수에 조심하다보니 호매령이나 조자운이 보기에는 대등한 싸움 같았다.
"매령아, 본산에 가서 사숙들을 불러오너라. 상처없이 제압하려면 혼자서는 힘들것 같구나."
호매령은 경공을 시전해서 연화봉으로 뛰었다. 경공은 나이가 어린 호매령이 더 낫기에 한운명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다. 조자운은 유씨 삼형제를 지키며 천사성과 한운명의 싸움을 주시했다.
천사성은 몸의 중심을 바짝 낮추고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하지만 숨소리만 거칠고 실제로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몸놀림은 경쾌했고 주먹질과 발길질은 힘있었다. 아무런 초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 같지만 간간이 섞는 육합권의 동작들은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유씨 삼형제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천사성은 파옥권의 초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복잡한 파옥권의 초식이 한운명에게 소용이 없음을 감지한 것이다. 조자운은 천사성의 피에 담궜다 꺼낸것 같은 두눈을 바라보며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정시켰다.
흰자위가 온통 빨간 두눈에 비해 천사성의 두 눈동자는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이었다. 예전에 눈동자색이 어떠했는지 돌이켜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손에 난 땀을 옷에 닦은 뒤 검을 가볍게 잡았다.
천사성의 흉성을 끌어냈으니 원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하지만 만약 천사성이 다시 이성을 되찾고 유씨 삼형제가 한 일을 고자질하면 큰일난다. 유씨 삼형제가 정식으로 배운적이 없는 파옥권의 초식들을 사용했기에 그것을 캐물으면 조자운도 연루될 수밖에 없다.
지난 이십여일간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니 뭔가에 홀린것처럼 불합리한 부분들이 많았다. 호매령에 대한 감정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조자운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사성이 뭔가 사술을 부려 자신을 홀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천사성을 살려두면 언젠가 자신한테 해코지를 할 것 같았다. 오늘 원래 계획도 흉성을 드러낸 천사성을 처단하는 것이다. 밤이 길어지면 꿈이 많아지는 법이니 이참에 천사성을 처치해서 후환을 남기지 않는것이 훌륭한 선택이다.
조자운은 천사성을 암습할 기회를 노렸지만 천사성은 조자운의 속셈을 알기라도 하듯 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멀리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연화봉에서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는 듯 했다. 조자운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했다.
"사숙, 저도 한손 거들게요."
조자운은 소리를 지른 후 천사성을 공격했다. 조자운이 서있던 자리에는 아노가 대신했다. 아노는 복잡한 눈으로 서로 엉켰다 떨어지는 세사람을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서장로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랄뿐이다.
조자운은 공격을 하며 일부러 허점을 드러냈다. 천사성은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공격했다. 유인하려고 드러낸 허점이 아니라 실제로 공격을 받으면 죽을수도 있는 허점이기 때문이다. 한운명은 조자운이 잘 피하기를 바라며 급하게 천사성을 향해 삼권을 연속 내질렀다.
하지만 천사성은 지금까지 실력을 숨겨왔다는 듯이 한운명의 공격을 피하거나 몸으로 때우며 조자운에게 강한 일격을 날렸다. 조자운은 한운명이 자신을 구하지 못하자 한운명을 믿었던 자신을 질책했다. 한운명은 강호에 나가본 적이 없고 대련만 했기에 조자운이 원하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자운의 세상은 갑자기 느려졌다. 천사성의 주먹은 조자운의 심장부위를 향해 천천히 날아왔다. 유씨 삼형제에게 얻어맞으며 토한 피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천사성의 입가에 어린 작은 미소를 조자운은 놓치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천사성은 본능적으로 조자운이 자신에게 가장 적대적임을 안 것이다.
갑자기 회색의 신형이 조자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사성의 주먹은 조자운의 앞을 가로막은 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노를 가격한 천사성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노, 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것은 조자운이다. 수중에 가볍게 쥔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태악삼청봉(太岳三靑峰)을 시전했다. 태악삼청봉은 하나의 초식밖에 없어 초식이 곧 검법이다. 한번의 찌르기에 세가지 공격이 담겨있는 태악삼청봉은 화산에서도 한세대에 한둘이 익힐까 말까 하는 검법이다.
원래 태악삼청봉의 찌르기는 검에 내기와 외기가 실려 세개의 공격이 동시에 들어간다. 하지만 조자운은 그 경지가 낮아 외기는 전혀 실리지 않았고 내기의 화후도 부족하다. 하지만 아노를 가격하고 일말의 정신을 차리는 바람에 무방비상태가 된 천사성을 공격하는데는 충분히 빠르고 강했다.
효자봉이 있는 남봉은 화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태악이 바로 남봉을 가르키는 것이다. 남봉은 삼지봉이라고 하여 밑둥은 하나지만 위로 가면서 세개의 봉우리로 나뉜다. 바로 효자봉과 송회봉 그리고 낙안봉이다.
천사성은 태악의 효자봉에서 태악삼청봉의 초식에 맞은 것이다. 재밌는 이야기 같지만 그 결과는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튼 덕분에 심장은 비꼈지만 검은 천사성의 왼쪽 가슴을 관통해 검첨이 등을 뚫고 나왔다.
이를 악문 조자운이 검을 비틀며 뽑아내려는데 웅혼한 장력이 가슴을 때렸다. 조자운은 검을 쥔 손에서 힘이 풀리며 몸이 뒤로 날아갔다. 살상의 목적이 아니기에 조자운은 내상조차 입지 않았다. 하지만 조자운의 마음속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조자운을 공격한 사람은 바로 서장로였다. 조자운이 가장 존경하는 무인이자 목표였다. 권각법에 재능이 있는 조자운은 서장로의 뒤를 잇기 위해 검법수련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서장로는 뒤로 날아가는 조자운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사성의 가슴과 등의 혈도들을 짚어 지혈을 시도했다.
마기의 침입을 받은 천사성의 혈도는 쉽게 짚어지지 않았다. 서장로는 세번째에 겨우 적당한 힘으로 천사성을 지혈시켰다. 지혈을 마치자 내공을 운용하여 조자운의 검을 천사성의 몸속에서 끊은 뒤 앞과 뒤로 뽑아냈다.
곧바로 품속에서 자령단을 꺼내 천사성에게 복용시킨 후 서장로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호법을 서라고 명했다. 조자운은 서장로에 의해 두동강이 난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네가 화산을 망칠뻔 했구나."
호군천의 말은 조자운에게 '네가 아닌 저 아이가 화산의 미래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군천은 천사성이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조자운의 목숨부터 끊어 화를 풀 생각이다. 그래서 조자운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호군천은 호매령으로부터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짧은 단편만으로도 대략의 상황은 짐작이 갔다. 어떤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아이들의 일이라 그 목적이 어이없고 단순할 것이다.
서장로의 머리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호군천은 저도 모르게 나직히 소리를 질렀다.
"장로님이 선천기공을"
조자운은 호군천의 말에 크게 놀랐다. 서장로는 장삼풍의 우화등선한 우화동에서 실마리를 찾아 몇년전부터 선천기공을 수련했다. 선천기공을 통해 몸속의 기운을 세상에 태어날때로 돌리면 삼단전이 합일되어 우화등선할 수 있다.
문제는 선천기공이 내공처럼 사용한 후 쉽게 회복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매일 모을수 있는 선천지기는 제한되어 있고 소모하고 나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서장로와 사부가 천사성을 화산의 미래로 점찍었다는 생각이 조자운의 머릿속에 굳어졌다.
"화산파의 대제자 조자운은 화산의 손님을 공격하여 빈사상태에 들게 하였으니 벌로 면벽수련 삼년을 명한다. 지금 당장 운대봉의 조사동에 가두거라."
"유씨 형제들은 화산의 문중에서 축출한다. 더이상 화산의 제자가 아니니 당장 화산의 땅에서 떠나보내라."
호군천의 명령에 몇몇 화산제자들이 움직였다. 둘은 조자운을 포박한 뒤 운대봉의 조사동으로 향했다. 셋은 유씨 형제들을 들쳐업고 화음현으로 향했다. 포박되어 떠나는 조자운의 귀로 호군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조사동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니 태상장로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유씨 형제들은 네가 직접 품어라. 여기에 엮인 사연은 내가 차후 너에게 말해줄 터이니 너는 삼년간 응사생사박(鷹蛇生死搏)의 수련에 열중하거라.'
천사성의 얼굴에 혈색이 천천히 돌아오자 호군천은 빠르게 조자운과 유씨 형제들을 처리했다. 천사성의 마기가 발작한 이상 화산에서 품을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 서장로의 성격을 잘 아는 호군천은 조자운을 조사동으로 보내 일단 화를 피하게 하였다.
서안의 유가장은 화산에 가장 많은 향전을 바치는 세력중 하나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태상장로의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기에 화산에서 축출한 것이다. 화산의 제자가 아니니 태상장로도 벌할 명분이 사라진다.
천사성은 아노를 가격했을 때 정신을 조금 차렸고 조자운의 검에 찔린 후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천살마성의 기운이 천사성의 생명을 구하는데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장로의 선천기공이 몸안에서 움직이는 경로를 완벽히 기억할 수 있었다.
- 작가의말
내공심법 훔치나요? 고작 검에 심장옆을 관통당하고?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