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청옥결
무림인들은 비검술(飛劍術)이라고 한다. 도교문파들은 이기어검(以氣御劍)이라 부르고 불교문파들은 물심일원(物心一元)이라 한다. 무당파에는 유룡검이라는 검법이 있는데 극성으로 익히면 깨달음 없이도 이기어검이 가능하다. 무당파에 대한 경쟁심리 때문에 서창훈은 어검술을 만들었고 천살에 대한 살심과 실력과시 때문에 어검술을 꺼내들었다.
서창훈의 어검술은 내공뿐 아니라 선천지기도 소모한다. 소모된 선천지기가 보충되는 속도는 처음 쌓을때보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내공처럼 며칠만에 회복되는게 아니다. 그래서 서창훈은 어검술의 초식을 세개만 만들었다.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 추운 겨울에도 굴하지 않는 솔(松), 대나무(竹), 매화(梅)가 있다. 무당을 견주어 소나무를 상징하는 상청불로(常靑不老)라는 초식을 만들었다. 이름은 상청불로지만 소나무의 잎들을 전부 베어버리는 초식이다.
천살의 옆구리를 스치며 서창훈의 검은 하나의 상처를 더 만들었다. 천살의 상처에서는 피가 보이지 않아 보는 사람에게 섬찟한 느낌을 주었다. 천살의 등뒤에서 검은 누군가 검끝을 잡고 있는듯 검끝이 멈추고 손잡이가 움직이며 순식간에 검끝이 천살의 등을 겨눴다.
천살마기는 몸을 돌리지 않고 반수(反手)로 음혈을 검에 부딪혀갔다. 손에서 검을 놓았다지만 빈손이라고 서창훈을 등질수는 없다. 검은 천살의 전후좌우를 기웃거리고 가끔은 하늘에서 내리 꽂히며 정수리를 노리기도 했다. 육체의 제한을 벗어난 검은 천살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움직임들을 보였고 천살의 늦어진 대응으로 몸에 상처자국이 빠르게 늘었다.
하지만 요해와 사혈들은 철저히 지켰고 천살마기 덕분에 피를 흘리지 않았기에 버틸 수 있다. 그리고 단전의 내공이 텅 비어버리고 혈도의 기운들도 바닥 직전이자 횡련일기공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흡기공보다 더 큰 자극에 혈도들이 피부를 통해 주변의 기운들을 빠른 속도로 끌어들였다. 천살이 의도적으로 운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는 횡련일기공이 대성을 넘어 극성을 엿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횡련일기공의 수련을 단계대로 차례로 익히지 않았기에 기연으로 대성하였으나 극성으로 가는 길에 거대한 벽이 막아서고 있었는데 호군천과 서창훈과의 대결이 또 하나의 기연이 되어 그 벽을 허물어버렸다.
성라운포의 초식 때문에 혈도들이 타격을 입었고 미처 회복도 제대로 못하고 서창훈이라는 강적과 맞서게 되었다. 한편으로 치료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계속 운기를 하며 혈도에 손상을 주었다. 덕분에 횡련일기공의 경지가 빠르게 올라간 것이다.
상청불로는 서창훈이 무당의 무공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초식이다. 기와 험으로 무당을 이길 수 없자 화산의 검파는 변과 환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상청불로도 변과 환에 기반을 둔 초식으로 유(柔)와 인(靭)에 기반을 둔 무당의 무공에 강세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천살에게는 큰 효용이 없었다.
서창훈은 곧바로 소림을 상대로 상정하고 만든 대나무를 상징하는 군자오연(君子傲然)의 초식으로 바꾸었다. 속이 빈 대나무의 허(虛)와 그럼에도 충분히 단단한 대나무의 실(實)에 기반을 둔 군자오연은 강맹하고 직선적인 소림의 무공을 겨냥한 초식이다.
검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강하게 찔러오는 검에 전혀 힘이 실리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 가볍게 회전하며 베어오는 검에는 목숨도 위협할 수 있는 거력이 섞여있었다. 방향전환이 자유롭고 천살의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상청불로와는 달리 군자오연은 검의 회전이 잦고 먼곳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강맹하게 찔러오는 검들은 대부분 허이고 경계되지 않는 작은 움직임들이 살초인 경우가 많았다.
아까는 검이 천살을 에워싸고 쉴새없이 공격했다면 지금은 천살을 과녁으로 생각하고 화살처럼 쏘아져갔다. 정신은 아까가 더 없었지만 막기 어려운 것은 지금이 더 심하다. 천살마기는 불사공과 신화공에게 천살의 몸을 빨리 고쳐내라고 으르렁거렸다. 혈도에서 혈도로 기운을 옮기는 것으로 천살의 몸을 통제하고 있는데 혈도들이 손상을 입어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창훈의 검이 천살의 허벅지에 반뼘이상 박히자 화산제자들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사십에 가까운 인질들이 상대의 손에 잡혀있어 환호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를 낸 것이다. 천살마기는 음혈에 진력을 실어 서창훈의 검을 부숴버리려 했다. 하지만 서창훈은 더 깊게 찔러들어가는 대신 검을 뽑아냈다.
'생포는 어려울 것 같으니 죽여야겠구나. 우화등선은 포기하고 남은 시간동안 화산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해야겠다. 삼풍선배, 내가 졌소. 하지만 화산은 무당을 이길 것이오.'
천살의 몸상태가 완전했다면 천살마기의 통제를 받는 천살이 서창훈을 이길 가능성도 존재한다. 천살의 최대 약점인 초식의 정교함과 경험의 부족은 천살마기에게는 해당이 없다. 육체적으로는 천살이 서창훈보다 더 나은 상태이다. 중단전을 열지 못한것 빼고는 육신이나 혈도의 깨끗함이나 천살이 더 낫다. 그리고 천살의 육신은 젊고 싱싱하다.
천살마기가 중단전을 점거하면 천살도 중단전을 완성한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천살마기가 서창훈을 이길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서창훈은 천살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것을 알고 결국 생포로부터 살상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이 목표의 변경때문에 서창훈은 우화등선의 길이 아예 막혀버리고 화산에는 큰 환란이 닥칠 것이다.
가장 좋은 선택은 천살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다. 화산이 삼년이든 오년이든 봉문을 선포하고 명화교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하지만 서창훈의 선택목록안에 이 선택이 들어있지 않았다. 천하가 환란에 빠져 수천만의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 화산과 서창훈의 명예가 더 중요한 것이다.
'어떤 천재지변이 화산을 덮쳐도 지켜낼 자신이 있다. 천살마성이여, 영광으로 알거라. 너에게 진정한 화산을 보여주마.'
세한삼우의 마지막 초식, 매화를 상징하는 빙청옥결(氷靑玉潔)의 초식이 펼쳐졌다. 조유천은 서창훈의 어검술이 갑자기 변하자 눈을 크게 떴다. 아련하고 아릿한 느낌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서창훈의 검이 화산이 되었다.
오악뿐 아니라 중원의 수많은 산을 다 둘러봐도 화산처럼 산세가 험한 산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화산의 풍경은 상리를 벗어나 사람들에게 기이한 느낌을 준다. 화산파의 무공은 화산을 닮아 기와 험을 바탕으로 했고 강호에서는 화산의 협객들을 열혈남아라 칭송했다.
그런 화산의 무공이 갑자기 변과 환을 중시하며 도련님들의 무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검파의 장로들은 무식하고 품위가 없는 검술 때문에 제자들이 모이지 않는다며 변화를 시도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흉험한 초식들을 사용하기에 젊은 나이에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래서 자질이 훌륭한 자들이 화산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부터 화산의 검술들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검파의 무공들은 화산의 무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변화했고 제자들은 여전히 흉험한 권파의 무공보다 검파의 무공을 선호했다. 그렇게 권파의 세력이 점점 위축되고 검파의 세력은 장대해졌다.
그러다 권파가 무력으로 검파를 진압하려다 실패하고 되려 화산에서 쫓겨났다. 권파가 사라진 화산은 더이상 화산이 아니라고 조유천은 생각했다. 그런데 검파의 대표적 인물인 서창훈의 손에서 진정한 화산을 보게 되자 여러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끓어 올랐다.
빙청옥결은 매화를 찬양하는 수많은 문구중 하나이다. 기와 험에 기반을 둔 빙청옥결은 서창훈의 바람이다. 무당을 상대하다 무공의 부족함을 느끼고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지에 이르고 보니 무공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다. 결국 화산의 제자들이 무당의 제자들보다 부족했기에 무당에게 진 것이지 무공의 우열때문은 아닌 것이다.
화산이 최고가 된 후 다시 화산의 원래 무공으로 바꿀 예정이다. 그리고 화산의 무공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빙청옥결을 지켜나가기 바라는 마음에 초식명을 지었다. 조유천은 서창훈의 검에 힘겹게 맞서는 천살을 보며 모순에 빠졌다. 천살이 서창훈을 이겼으면 좋겠지만 화산이 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강했다.
앞선 두 초식은 무당과 소림을 겨냥한 것이라 서창훈의 의도가 들어갔다. 뭔가 목적을 가진 초식은 법도의 제한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빙청옥결은 순수하게 화산을 담으려는 무공이다. 특별한 목적이 없이 화산을 보여주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살상을 목적으로 한 두 초식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횡련일기공 덕분에 혈도들이 어느정도 기운을 회복했다. 단전도 혈도들의 양보로 조금의 기운을 회복하여 한숨을 돌렸다. 횡련일기공이 중요한 때에 벽을 깨고 극성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면 천살은 이미 검하고혼(劍下孤魂 - 검에 죽은 외로운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천살의 양 다리가 반이상 검에 베어져 움직이기 불편했다. 불사공이 회복시키고는 있지만 회복해야 할 곳들은 너무 많고 기운은 너무 부족하다. 왼팔도 너무 많은 상처로 인해 움직이기 불편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천살마기이기 때문에 통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근육의 파열이 심해서 정교한 움직임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머리와 몸통 그리고 오른팔은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세번째로 변화한 서창훈의 초식은 산사태가 덮치는 듯 하여 천살마기도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었다.
천살마기는 무공의 경지 따위는 모른다. 그저 기운의 강약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천살마기는 교주가 남궁천보다 몇배는 더 강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교주가 품은 기운이 그만큼 강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장담하기 힘들다. 무공의 경지는 남궁천이 더 높기 때문이다.
서창훈의 기운은 남궁천보다도 못했다. 하지만 상대해보니 남궁천보다 훨씬 강하다. 천살마기는 교주를 능가하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창훈을 상대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천살이 더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신화공으로 강해지는 것은 안된다. 신화공은 천살마기와 동급의 기운이다. 선천기공 정도면 어찌 해볼만한데 신화공이 강해지면 천살마기도 장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천살이 살아남아야 가능하다. 현재 어검술의 초식은 기존 두 초식과 다르다. 환과 변으로 속이려는 시도도 없고 허와 실로 이득을 취하려는 움직임도 없다. 그저 서창훈의 깨달음과 내력을 담아 알고도 못 피하고 막아도 막은게 아닌 강한 공격을 해오고 있다. 무식할 정도로 말이다.
초식이 화려하지 않았다. 검의 움직임에 현묘함도 없었다. 하지만 검에는 서창훈의 마음이 담겨 있었고 서창훈은 화산을 생각하는 마음을 검에 담았다. 어검술과 심검의 사이에 있는 초식이다.
그러한 검이 천살의 오른쪽 옆구리를 스쳐지나가자 살이 한움큼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오른팔도 검에 베이여 초식의 정묘함이 많이 떨어졌다. 천살의 검이 또 한번 서창훈의 검과 어긋나며 오른쪽 어깨도 검에 적중되었다. 몸을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으면 목이 찔렸을수도 있다.
서창훈은 빙청옥결을 사용하며 모든 정신을 검에 집중했다. 누군가가 서창훈을 기습하려 한다면 검이 알아서 막아내고 응징할 것이다. 서창훈의 마음이 담긴 빙청옥결의 초식은 심검으로 향하는 길을 살짝 보여주었다. 검에 담긴 마음이 필살을 자신하자 서창훈은 모든 힘을 다해 검을 천살의 심장을 향해 날렸다.
검이 육신을 꿰뚫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검의 호수가 아니었으면 아마 가슴을 꿰뚫고 검이 반대편으로 날아갔을 수도 있다. 횡련일기공을 익힌 단단한 육체라 검이 가슴을 꿰뚫지 못했다. 강인한 두손이 가슴에 박힌 서창훈의 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심장위치에 박혔지만 즉사하지 않은 것이다.
- 작가의말
빙청옥결은 보통 여자에게 씁니다. 육체접촉을 한 남자 =< 1, 상대한 남자가 1보다 작거나 같은 여자를 빙청옥결이라고 칭합니다. 수치가 0이면 육신도 빙청옥결, 수치가 1이면 마음이 빙청옥결 입니다.
마교교주가 열여덟이면 천살마성을 죽여도 된다고 했는데 서창훈이 왜 자꾸 머뭇거리나 의아해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어차피 본문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을 것이기에 작가의말로 미리 말씀드립니다. 불사공을 익혀 수명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천살마성을 죽일 수 있는 나이도 더 많아졌습니다. 마교교주는 천살과 비슷하게 깨달음보다는 기연과 내공의 양과 질로 강한 무인입니다. 그래서 천살을 죽여도 되는지 안되는지 보고 알수는 없습니다. 서창훈은 욕심많은 늙은이지만 경지가 높기에 천살을 보는 순간 아직 죽일때가 되지 않았구나 알고 있습니다.
뒤에서 가볍게 다루기는 합니다만 수만명의 독자중에 의문을 가질 분이 한두분은 계실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다음편은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이번편은 개인적으로 아주 몹시 매우 마음에 듭니다. 음미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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