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천마환생
천마는 피를 달라고 징징대는 음혈을 바위에 꽂아넣었다. 며칠 조용한가 싶었더니 또 투정을 부리고 있다.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을 불태우고 경사에 쳐들어가 황제에게 황위를 양도하게 했다. 황제가 된 후 남정북벌을 하면서 명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숙부인 천칠의 일가를 찾은 뒤 숙모를 처형하고 사촌동생을 황태자로 삼았다. 동생이 장성하자 황위를 물려주고 중원을 훌쩍 떠났다. 이름이 요상한 나라에 갔는데 외세의 침략에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도와주고 음혈에게 피를 좀 먹여줬더니 드라큘라 어쩌고 하는 이상한 이름으로 천마를 불렀다.
그 나라를 떠나 이리저리 마음가는대로 돌아다니다 섬나라로 향했다. 크기가 꽤 커서 처음에는 섬인것도 몰랐다. 징징대는 음혈을 바위에 꽂아넣고 풍광을 구경하다 돌아오니 수많은 사람들이 바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음혈의 손잡이를 잡고 낑낑거리던 건장한 사내는 얼굴을 붉히고 물러섰다.
천마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음혈을 바위에서 뽑아냈다. 사람들이 분분히 무릎을 꿇고 뭐라 외쳤다. 천마는 이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경험상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것임을 알고는 거절했다.
"아서라, 이미 혈기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때 이 무리를 적대하는 자들로 보이는 수백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 덮쳐왔다. 첫 화살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자 천마는 음혈을 휘둘렀다. 천마신검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며 수백의 인간들이 주검이 되었다. 주인을 잃은 말들은 제자리에서 서성거리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천마는 귀찮음이 싫어서 경공을 사용해 훌쩍 사라졌다. 그때 한 젊은 사내가 검을 뽑아들더니 외쳤다.
"나는 바위에서 신검을 뽑아낸 아서라다. 내가 방금 수백의 적을 처단하는 것을 모두가 보았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그 사내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기사와 병사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천마는 천하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마음에 담았다. 천마의 마음에 세상이 담기는 순간, 음혈이 울음을 토해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긴 천마는 처음으로 음혈의 울음소리를 이해했다. 수많은 피를 마신 음혈은 이미 승천의 요건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공동제작자인 천마의 심두혈이 필요하다. 천마는 이미 마음에 세상을 담았기에 삶과 죽음이 같음을 이해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천마가 음혈을 왼쪽 가슴에 꽂아넣자 음혈은 환희와 비통에 찬 울음소리를 냈다. 곧 음혈이 환한 빛으로 화해 하늘로 올라가서 신검이 되었다. 불사공이 천마의 심장을 복구하려 했지만 천마는 제지시켰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다 봤으니 죽어야 볼 수 있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저승사자는 떽떽거리다가 천마한테 몇대 얻어맞고 곧바로 나긋나긋해졌다. 염라전에 천마를 안내한 뒤 저승사자는 뒤도 안 보고 도망쳤다. 천마의 일생 행적이 적힌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열명의 염라대왕이 동시에 혀를 찼다.
"전장에서 수만이나 되는 목숨을 취하고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의 목숨을 도탄에 빠지게 했구나. 네 죄를 인정하느냐?"
"나는 천마요."
"하늘이 허락한 황제를 핍박해서 천자의 자리를 찬탈했구나. 이는 천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네 죄를 인정하느냐?"
"나는 천마요."
"소림, 무당, 화산을 공격하여 무공서적과 전각들을 불태웠구나. 소중한 유무형 문화재를 파손하고 문명을 퇴보시킨 죄를 인정하느냐?"
"나는 천마요."
"길을 건널때 파란불에 건넌적이 한번도 없구나. 네 죄를 인정하느냐?"
"나는 천마요."
"쓰레기 무단투하 이천사십육회, 노상방뇨 칠백오십회, 음주기마 칠십육회 등등 잡다한 죄들을 인정하느냐?"
"나는 천마요."
십염라가 구염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놈이 억지를 부리거나 모른다고 딱 잡아뗐으면 증거물로 입을 다물게 했을턴데 조리있게 조목조목 반박하니 할말이 없구려. 변호사인줄."
대염라 역시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천마가 힘을 믿고 억지를 부리면 모르겠지만 도리를 따지며 반박해오니 대처하기가 훨씬 힘들었다. 그때 지옥을 관장하는 아수라들의 왕이 전갈을 보내왔다.
'지옥에서는 천마를 안받음. 죽어도 안받음. 그리 알고 알아서 하셈.'
곧이어 옥황상제의 서신도 도착했다. 수십만자로 장황하게 늘어썼지만 핵심은 간단했다.
'천마 보내면 너 죽음.'
"천마에게 환생패키지를 사용하면 어떻겠소?"
꾀가 많은 사염라가 말을 꺼내자 대염라는 무릎을 탁 쳤다. 비록 천마가 환생의 요건을 만족하지 않지만 상관이 없다.
"천마씩이나 되는 자가 왜 트럭에 치인적도 없고 차원이동을 한 적도 없고 불치병에 걸린적도 없고 최고가 되지 못한 아쉬움도 없고 인류의 운명을 책임진적도 없을까? 왜 홀어머니와 여동생도 없는거냐고!"
혼자서 화를 한참 낸 대염라는 곧 천마에게 은근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자네 환생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자네가 본 세계와는 다른 세계들이 많은데 그 세계들을 구경하고 싶지 않은가?"
천마는 지옥이나 천국을 구경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다. 환생해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은것 같았다.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염라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네가 환생요건을 충족하지 않기 때문에 편법을 써야 한다. 비선실세인 순바늘에게 찾아가서 이 영패를 전하면 알아서 환생시켜줄 것이다."
순바늘을 찾아가서 영패를 건네자 순바늘은 천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했다.
"원하는 환생조건을 말해보아라."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었으면 좋겠다. 부모는 둘다 살아있었으면 좋겠고 동생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군."
순바늘은 요상한 기계를 손에 들고 천마가 원한 조건을 입력하고 검색을 시작했다.
"그게 아이패드라는 건가?"
"내꺼 아니다."
"신기한 물건이군. 한번 구경해봐도 되나?"
"내꺼 아니다."
"니꺼 아니라 치고 한번 구경해보자."
"내꺼 아니다."
천마가 귀찮게 구는게 싫었는지 순바늘은 환생프로그램을 작동했다. 천마는 거대한 인연의 끈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천마의 실력이라면 그 끈을 끊을수도 있지만 천마는 자신을 끈에게 맡겼다.
천마는 한강대교의 난간에 앉아 있었다. 오초의 시간이 흐르자 모든 정보을 알아냈다. 환생이라기보다는 영혼치환이 맞을 것이다. 오늘 죽을 운명인 천마(千馬)의 영혼과 천마(天魔)의 영혼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천마가 자살하기 오초전에 말이다.
화가 난 천마는 순바늘을 강제로 소환했다. 이승에 강제소환된 순바늘은 천마가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나는 환생을 원했는데 이건 영혼치환이 아니냐?"
"어차피 세상을 구경하려는 목적을 달성했지 말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그만이지 말입니다."
"네년은 비선실세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좀더 대단한 자의 몸에 들어가게 해줄수도 있지 않느냐?"
"실 가는데 바늘간다는 속담이 있지 말입니다. 실이 훅 가니 이 바늘도 훅 갔지 말입니다. 비선실세(秘線實勢 - 배후에 숨겨진 실제 권력자)가 아니라 비선실세(非線失勢 - 잡아야 할 끈이 아니고 세력을 잃다) 입니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가는거 아니냐? 순바늘 너 잊지않고 기억해 둘테다. 이 몸도 언젠가는 죽어서 저승에 다시 갈테니 말이다."
순바늘을 저승으로 다시 돌려보낸 후 천마는 오초간 고민했다. 성이 천씨이고 이름이 마인 소년은 이제 열여덟이다. 홀어머니와 쌍둥이 여동생을 둔 천마는 대형기획사의 연습생이다. 하지만 늘 표정이 음침한 천마는 오늘 기획사에서 연습생자격을 박탈당해 쫓겨났다.
"젠장할, 유복한 집안에 부모 다 살아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무슨 꼴이야."
난간에서 내려온 천마는 목적지를 정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핸드폰을 들고 천마를 찍고 있던 몇몇이 아쉬운 탄성을 내뱉었다. 인터넷으로 자살장면을 생중계하고 있는데 천마가 갑자기 난간에서 내리자 짜고 낚시하는 거냐고 욕설이 채팅창을 도배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심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형, 기획사 하나 만들어. 내가 형 부자 만들어줄게."
"너 기획사에서 쫓겨나더니 정신나간거야? 천마 너 정신 차리고 기술이나 배우라니까. 너같은 몸치는 노력해도 아이돌이 되기 힘들어. 노래나 죽이게 잘하면 모를까, 너처럼 어정쩡한 애들이 얼굴만 믿고 아이돌을 할수 있는 만만한 바닥이 아니야."
"기획사에서 쫓겨난지 두시간도 안되는데 소식을 알고 있는걸 보면 마음이 없는건 아닌것 같구나. 내가 친하게 지내던 애들을 불러올테니 삼인조 아이돌그룹 하나 만들자."
서창훈은 머리가 아파왔다. 대학교까지 농구선수를 했지만 늘 비슷한 이름의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기획사에 들어가 매니저일을 배웠다. 하지만 매니저일의 스트레스는 농구선수보다 수십배는 더했다.
사람이 좋은 덕분에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지만 회식때 술을 과하게 마시고 실수를 하는 바람에 쫓겨났다. 작은 기획사에서 로드매니저를 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술때문에 항상 오래하지 못했다. 성실하고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일자리걱정은 없지만 비전도 없었다.
"어, 자운아, 형이야. 지금 창훈이형네 집이니까 너도 빨리 오려무나."
"초신이니? 천마 형이야. 창훈이형네 집이니까 얼른 와. 조자운이도 오기로 했어."
기획사에서 가깝게 지내던 조자운과 서문초신을 불러들였다. 서창훈은 평소 음침하고 소심하던 천마가 사람이 바뀐것처럼 막 밀고 나가자 그 호기에 감동해 계약서를 준비했다. 조자운과 서문초신이 도착하자 셋은 서창훈과 계약을 맺고 천마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조자운은 래퍼이다. 랩도 잘 쓰고 실력도 좋은데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다. 랩을하는 도중 가사가 생각나지 않으면 대충 때우고 넘어가야 하는데 조자운은 말을 더듬으며 무대를 망쳐버리기 일수다. 누구도 조자운과 같은 팀을 하려하지 않아 같은 신세인 서문초신과 천마가 항상 팀을 해왔다.
천마는 내공을 움직여 조자운의 가슴에 맺혀있는 어혈을 풀어주었다. 혈도가 어혈에 의해 막혀 있어서 긴장하면 숨이 가쁘고 말을 더듬게 되는 것이다. 천마의 치료가 끝나자 조자운은 어려운 육분짜리 랩을 연속 세번 부르고도 한번도 틀리지 않았다.
서문초신은 아름다운 미성에 목소리가 딴딴하다. 하지만 약한 천식을 앓고 있어 긴호흡으로 노래를 하지 못한다. 거기에 격렬한 춤까지 불가능해서 솔로로도 그룹으로도 뭔가 부족하다. 천마가 서문초신의 천식을 치료해주자 서문초신은 한풀이라도 하듯 반시간동안 쉬지 않고 격렬한 안무를 소화했다.
천마도 서창훈이 놀랄만한 대단한 춤실력을 보여주었다. 노래실력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노래에 깃든 감정이 냉혈이라 자처하는 서창훈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다.
서창훈이 보름동안 발품을 팔아 방송국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음악방송이 아니라 갤러리로 참여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도 잡지 못했다. 어쩔수 없이 넷이서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세명이 그룹을 이루어 '샛별들의 전쟁' 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했다. 대형 기획사의 대표들이 직접 심사위원을 보는 샛별들의 전쟁은 아이돌들의 등용문이라고도 불린다.
예선을 가볍게 통과한 셋은 본선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예년과는 다르게 이번 본선부터는 생방송으로 진행한다. 인터넷 생방송으로 본선을 방송한 후 이튿날 무대뒤 사정들과 함께 편집된 방송본이 나가는 것이다. 조자운과 서문초신은 무척 긴장했지만 랩이나 노래 및 춤은 전혀 막힘이 없었다. 천마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며 둘도 두근대는 가슴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 작가의말
이번 외전을 소설의 프롤로그로 사용하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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