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우강호
주체가 발표한 관과 무림의 상호불간섭의 조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살인을 한 무림인은 관의 조사에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피살자 역시 무림인임이 증명되면 무죄로 처리하는 것이다. 대신 관의 조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왔을 때면 금의위의 추살조를 맞이해야 한다.
명황실은 강호의 넘쳐나는 힘을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으로 소모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림맹과 명화교도 바보가 아니기에 돈으로 병사를 모집해서 싸우게 하고 무인들의 투입은 최소화했다. 하지만 주체의 발표때문에 강호는 혼란에 빠졌다. 이권의 크기는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노리는 자들은 많다. 예전에는 명분과 평판 등 때문에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지만 관에서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니 슬슬 과격한 자들이 칼을 갈기 시작했다.
"소교주가 일을 잘 처리했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를 이루었소."
선우복명이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내자 사장로의 얼굴에 미미한 동요가 일어났다. 가문의 힘을 총동원해도 천살이 이룬 성과의 절반이라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했다. 더구나 천살은 수하 한명만 대동하고 출발했다고 한다. 빨라도 반년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석달도 되지 않아 맡겨진 임무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관과 무림 상호불간섭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이제 우리가 중원으로 마음대로 향해도 관과 군에서 우리를 막지 못한다는 뜻이오. 허튼 생각을 할 시간이 없소. 이 기회를 이용해서 무당과 소림을 누를 계획을 짜시오."
교주의 말에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다. 관의 감시와 간섭 때문에 뭉쳐서 중원으로 향하는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흩어지면 각개격파만 당할 뿐이니 이제까지 소수의 인원으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히 수십명 수백명씩 뭉쳐서 다닐 수 있다.
무기의 소지도 간접적으로 허용되었다. 하지만 무기를 들었다는 것은 죽어도 관에서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실력에 자신이 없는 자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병장기를 더 꼼꼼히 숨기거나 아예 휴대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소교주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오?"
"천산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린다고 전갈을 보내왔소."
천살의 공덕을 더 칭송하기 싫은 일부 장로들은 곧바로 무당과 소림을 어떻게 소모시킬지 계획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소림뿐 아니라 무당도 이제는 뿌리가 든든해져서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몇년에서 몇십년으로 길게 계획을 잡고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괴롭혀야 한다.
천살은 예전에 한철을 숨겨두었던 장소에서 그대로 있는 한철을 발견하고 고삼에게 짊어지게 했다. 한철은 일반 철보다 조금 더 무겁다. 야장노인은 잡질이 적어서 그렇다고 했는데 천살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고삼은 묵직한 한철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싱글벙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가 가까워지자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중독되어 피살당한 형이 생각난 것이다. 고삼의 기운이 변하자 천살은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넌 지금 무공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럴때 주화입마에 걸려들기 쉬우니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불사공 덕분에 주화입마따위는 걱정해본적도 없는 천살이다. 하지만 무공검법도 그렇고 만상무결도 그렇고 마음공부에 대한 지적은 여기저기 널려있기에 적절한 조언을 건넬 수 있었다.
"대형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너는 네 운명이 기구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자기 의지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네 형도 저승에서 기뻐할 것이다."
고삼에게 하는 말뿐이 아니라 천살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의 천살에게는 힘이 있다. 그 힘을 키우고 키워서 운명에 저항할 것이다. 예전처럼 무력하게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고삼은 울적하던 기분을 수습하고 평온한 기분으로 사도에 돌아갔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쌍말이 똑같은 중독증세로 피살된 것이다.
"저는 왕쌍말과 따로따로 조사를 했습니다. 어제 저녁에 왕쌍말이 찾아와서 단서를 발견했는데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캐물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점심이 되어서도 왕쌍말이 나타나지 않아 찾아가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연화훈은 왕쌍말이 무언가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혼자 공을 세울 작정이었는지 연화훈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살의 주도하에 왕쌍말의 방을 낱낱이 수색했지만 뭔가 단서라 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너도 이 일의 조사에서 손을 떼거라. 이 일은 내가 직접 조사를 해야겠다."
왕쌍말 역시 고일과 마찬가지로 목덜미에 상처가 있었다. 한번이면 우연일 수 있지만 두번이면 필연이다. 상대가 무공이 강하다면 굳이 독을 쓸 필요가 없다. 이는 흉수가 일격필살의 무공이 없거나 아예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라는 것을 설명한다.
상처가 왜 하필 목덜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천살은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선우복명에게 부탁을 하여 독의 종류와 출처부터 알아내야 한다. 당무영도 처음 보는 독이라 했다. 하지만 이정도 강한 독이 무명일리는 없고 사도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섬이 아니다. 독의 이름과 출처만 알아내면 흉수의 범위를 크게 좁힐 수 있다.
"부인은 어디에 가고 없는 것이냐?"
천살의 질문에 총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최근 들어 몸이 불편하여 자주 의원을 찾았습니다. 오늘 오전 심한 어지럼증을 호소하여 배를 타고 용한 의원을 보이러 출발했습니다."
"어디의 의원인지 아느냐?"
"교주전의 총관이 직접 나서서 안배한 것이라 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천살은 교주전에 보고를 올리러 가는 한편 한화령의 행방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산에서 돌아오며 복수를 다짐했는데 그뒤로 한화령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모용궁현과 모용부설이 잠깐 시비를 걸었다고 주체앞에서 반역을 꿈꾸는 자로 모함했다. 그런데 아직도 한화령에 대한 복수를 참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었다. 공평성을 위해서라도 한화령을 괴롭혀야 한다.
"사부님께 문안 올립니다. 사부님의 홍복에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 네가 이번에 본교를 위해 큰일을 해냈다. 조만간 본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예정이니 너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라."
"분부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화령이 아프다는 말을 들었는데 상태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어디 의원인지 가르쳐 주시면 제가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총관이 함께 갔으니 호전이 되면 돌아올 것이다. 부부사이가 화목한 듯 보이니 나도 기쁘구나."
자택에 돌아와보니 고삼이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번 강호행으로 조금 밝아진 것 같았는데 왕쌍말의 죽음 때문에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천살은 당무영과 대화를 나누며 이번에 명현공을 사용하며 느꼈던 점들을 들려주었다. 당무영에게 당분간 호위대의 일은 전부 고삼에게 맡기고 무공수련에 전념하라 일렀다.
하지만 고삼이 들고 온 한철을 발견한 당무영은 마음을 다잡고 수련에 열중할 수 없었다. 장원안에 자그마한 대장간을 차려놓고 본인이 사용할 암기들을 직접 제작했다. 하지만 한철을 다루기에는 부족하기에 천살의 허락을 얻고 대장간을 증축하고 장비들도 좋은 것으로 교체했다.
한동안 천살과 고삼 그리고 당무영은 고삼의 검과 당무영의 암기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고삼은 길이가 일척정도 되는 짧은 쌍검을 만들었다. 대신 검신이 두꺼워 무게는 장검 못지 않았다. 외공을 익혀 몸이 튼튼한 고삼은 양손에 검 하나씩 들고 공격 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좋다.
당무영은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비표를 만들었다. 한철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만드니 오십이개의 비표가 완성되었다. 당무영은 특수한 약물로 광택이 없어지도록 처리했다. 특이하게 윤곽에 전부 날을 세워 두 손가락으로 가운데를 집어서 던져야 했다. 비표 하나가 집 한채 값이라며 당무영은 비표를 애지중지했다.
"폐하, 이번 폐하가 고안한 상호불간섭 정책이 큰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주체의 상호불간섭은 사실상 무림인들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관이 너희에게 간섭하지 않을테니 백성들을 건드리지만 말고 너희들끼리 싸우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하는 것이 그 주요 골자이다. 하지만 주체와 천살도 생각지 못한 효과들을 보고 있었다.
우선 각 지역에서 이권을 차지한 자들이 자신들은 무림인이 아님을 천명했다. 일부 방파는 해체하고 상인연합으로 재탄생했다. 더 강한 무공을 가진 문파나 세력에게 이권을 빼앗길까 걱정한 것이다. 무력을 포기하고 관의 보호를 받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고 위법행위를 좀체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세가들이 자신들은 무림세가가 아님을 공표했다. 관과 관계가 밀접하거나 무력에 비해 많은 이권을 차지한 세가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과 더 밀착할 수밖에 없고 관의 지휘에 더 잘 복종할 수밖에 없다.
"저희 금의위 무림특무조에서 예측한 결과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강호에는 대문파와 대세가를 제외한 소문파들이나 작은 가문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관의 보호안에 들어오든지 아니면 대문파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 강호에서는 아무리 강한 문파를 등에 업었다고 해도 자체로 실력이 없으면 언제든 횡액을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의 보호를 받으려면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해야 합니다. 이들이 추후에 무림인을 죽였다 하더라도 무림인간의 항쟁이 아니기에 관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주체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띄자 보고하는 금의위 정사품의 지휘검사는 신이 났다. 황제가 좋아할만한 보고를 올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위로는 정삼품의 지휘사 하나와 종삼품의 지휘동지 둘밖에 없다. 이번에 황제의 눈에 제대로 띄었으니 지휘사를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 이대로 소세력들이 사라지면 무인의 숫자가 적어집니다. 저희의 간략한 통계에 따르면 소림의 원각 정도의 절대고수 한명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만명 정도의 무인이 필요합니다. 무인의 숫자가 줄어들면 고수의 숫자도 줄어들고 고수가 적으면 무인이 되려는 자들도 줄어들 것입니다. 이렇게 양성으로 발전하면 언젠가 무법천지의 무도한 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무공비급들을 다 태우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금의위에서 관련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무인의 수를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 무림인이 아님을 선포한 문파나 가문에서 무공비급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무림인이 아닌 자가 무공비급을 감추고 무공을 몰래 익힐 경우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구전(口傳 - 입으로 전함)은 막을 수 없지 않느냐."
"무공비급으로 전해져도 대가 끊기는게 무공입니다. 글로 적어도 이해가 달라서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데 말로 전하면 지속적으로 왜곡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무공을 믿고 황법을 마음대로 무시하려는 자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의위의 지휘검사는 계속하여 보고를 올렸다. 상호불간섭을 선포한 후 한동안은 서로 눈치를 보았지만 곧 강호의 여기저기에서 피흘리는 싸움이 진행되었다. 일부는 일반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쳐 관에 잡히거나 저항하다 금의위의 추살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추살조의 손에서 벗어난 자는 방을 붙여 죄목과 무공의 강약에 따라 수배금을 붙였다. 많은 자는 은자 오십냥까지 걸렸기에 전문적으로 수배자를 쫓는 자들도 생겨났다.
"보통 강호가 어지러우면 세상이 어지러운데 폐하의 영명한 결책에 의해 강호에만 풍우가 휘몰아치고 일반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만백성들이 입을 모아 폐하의 은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 작가의말
風雨江湖, 비바람이 몰아치는 강호.
왜 천마가 자꾸 환생하는지 이번편에서 밝혀냈습니다. 천마는 미리 세상의 무인을 싸그리 없애버리는 음모를 꾸며 주체를 통해 그 음모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환생해서 혼자 무공을 사용하며 갑질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스케일 있는 천마는 제 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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