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련천강
"탕탕탕, 한박자 쉬고, 탕탕탕, 한박자 쉬고."
야장 노인의 구령에 맞춰 천살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했다. 모양을 잡고 쇠를 접는 등 기술일은 노인이 했지만 철을 정련하는 과정은 힘이 세고 체력이 좋은 천살이 맡아야 했다.
"자, 담금질."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쇳덩이가 식어갔다. 작은 망치로 여기저기 두드려본 야장 노인은 천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년간 일해온 야장들도 쇠를 두드리는 박자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지금처럼 두가지 이상의 철을 합치는 합철기술이 들어갈 경우에는 더욱 힘들어한다.
하지만 천살은 그 박자를 정확히 잡아냈다. 이는 야장 노인이 잘 가르친 덕분이다. 박자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명확히 알려주자 천살은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루어냈다. 철을 두드리면 철은 일시적으로 형태가 아주 미세하게 변형한다. 하지만 곧바로 원래 형태로 돌아오는데 원래 형태로 돌아온 순간 다시 한번 가격해야 한다.
무조건 빠르게 두드리면 철의 강도가 낮아져서 쉽게 부러지고 느리게 두드리면 경도가 떨어져서 검에 흠집이 쉽게 난다. 쇠를 오랫동안 다뤄본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오묘한 것을 천살은 머리로 이해하고 몸으로 구현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정련을 하자꾸나."
말을 마친 야장은 나무통 하나를 가져다 천살의 앞에 놓았다. 천살은 본인이 토혈공이라고 명명한 신화공 탐구 수련을 시작했다. 최근들어 그림의 순서가 틀린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닌지 의심되었지만 혈도를 튼튼하게 하고 불사공의 수련도 겸사겸사 되는터라 매일 몇번씩 시도하고 있다.
얼마 시간이 안 지나서 천살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천살이 토한 피는 나무통안에 쏟아졌다. 야장은 곧바로 하얀 분말을 통에 넣고 나무막대로 휘휘 저었다. 마지막 담금질은 천살의 피로 해야 한다며 피를 모아두고 있는 것이다. 분말은 피가 굳지 않게하는 약가루이다.
"이미 구천칠백사십번 담금질을 했는데 아직도 더 정련할 여지가 남아있다. 내 생에 만련의 정강(精鋼)을 눈으로 볼 수 있을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구나."
검을 불에 달군 후 망치로 두드려서 정련을 한다. 그 과정에 불순물들이 밖으로 밀려 나오고 결국에는 떨어져나간다. 하지만 너무 많이 하면 오히려 강도가 내려가 쉽게 깨진다. 경험이 많은 야장들은 철을 두드려서 그 소리로 더 정련할 수 있는지 판단한다.
한시진에 열댓번씩 정련할 수 있다. 하지만 정련은 한사람이 같은 박자로 해야 한다. 여럿의 손을 거치면 품질이 오히려 떨어진다. 체력의 한계로 한시진에 두어번만 정련하는것이 보통인데 천살의 무한에 가까운 체력 덕분에 정련하고 담금질하고 곧 불에 달궈서 다시 정련하고를 반복했다. 그래서 넉달도 되지 않는 기간에 만련정강을 만들 수 있었다.
"보통은 야장의 전성기 시절에 삼년의 세월을 들여 만련정강을 하나 만들어내는데 우리는 넉달만에 해내는구나. 네 덕분에 한철을 얻었고 네 덕분에 만련을 할 수 있었으니 너는 내 평생의 은인이나 다름 없구나."
평생 대장간에서 쇠를 다루다보니 야장의 귀는 그닥 좋지 않았다. 실력이 없으면 몰라도 실력이 출중한 야장은 커다란 대장간에서 수많은 도제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일감도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소음이 끊기지 않았고 크게 소리지르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하지만 천살이 야장을 처음 만날 때부터 야장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야장도 알고 있기에 천살에게 유독 고마워하는 것이다. 천살도 대강 짐작을 하고 있기에 두사람은 만난지 넉달이 되어가는데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구천구백구십구번째 담금질이 끝나자 야장은 작은 망치로 신중하게 두드리고 귀를 바짝 대고 소리를 들었다. 사실 망치로 두드리며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한번 더 담금질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음을 알지만 만번째라 신경을 더욱 썼다.
야장은 다시 풀무질을 힘차게 했다. 풀무질은 기술일이라며 천살에게 손도 못대게 했다. 요즘 들어 기침이 잦아진 노인이지만 풀무질을 할 때에만 기침 한번 하지 않았다. 풀무질을 멈춘 야장은 집게로 검의 손잡이를 집어 모루위에 올려놓았다.
"마지막 담금질은 내가 하겠네. 이정도는 양보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젊은이?"
천살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자신은 야장도 아니니 마무리에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다. 특히 마지막 담금질은 그간 모아둔 천살의 피로 한다. 특별한 담금질인 만큼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도리이다.
대나무로 만든 통에는 천살의 피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직 뜨거운 검을 핏속에 넣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김이 올라왔다. 노인은 품속에서 잘 접은 서신 하나를 꺼내 천살에게 던져주었다.
"그것 좀 읽어보게."
천살이 복잡하게 접혀진 서신을 펴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 노인은 품속에서 예리하게 갈린 비수를 꺼내 오른손에 들었다. 천살을 한눈 살펴본 후 비수를 자신의 심장에 꽂았다.
노인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천살의 피와 섞였다. 노인이 갑자기 휘청이자 급하게 달려간 천살은 가슴에 꽂힌 비수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고, 고맙네."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노인은 눈을 감았다.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눈매와 비틀린 입매이지만 천살은 노인의 얼굴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천살은 노인이 자주 머무르던 곳에 땅을 파고 노인의 시신을 묻었다.
"관도 없이 이렇게 묻어드려 죄송합니다."
노인이 사용하던 망치를 배장품으로 함께 묻었다. 나무를 깍아 묘비를 만든 후 천하제일야장이라고 글을 적었다. 다시 대장간에 돌아와 검을 손에 잡으니 손잡이까지 통짜로 된 검이 부르르 떨었다.
"나와 노인의 피를 마시고 태어났으니 음혈, 네 이름은 음혈(飮血)이라 하겠다."
천살이 검의 이름을 지어주자 검의 떨림이 멈췄다. 보자기로 검을 잘 감싼 후 노인이 건네준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내 평생의 은인에게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것을 알고 올해는 천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텼네. 나이 먹어 변덕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의 뜻이었네.
자네 덕분에 평생 소원을 풀고 간다네. 내 나름대로 검에게 이름을 지었는데 천강 어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이름을 짓게나.
여기에서 삼십리 정도 동쪽에 가면 내 제자가 차린 대장간이 있네. 장훈이라는 이름인데 이 검을 보여주며 노야장의 마지막 작품이라 말하고 마무리를 부탁하게.
심두혈(心頭血)에는 사람의 마음이 깃들었다네. 비록 내 몸은 죽어서 썩어 사라지겠지만 내 마음은 이 검과 함께 영세토록 세상에 남아있을 것일세.
그러니 슬퍼하지 마시게. 인간은 언제나 죽는 법, 어떻게 살았는지보다 어떻게 죽었는지가 가끔 더 중요할 때가 있다네.'
"음혈아, 네 또다른 이름은 천강이다. 음혈로서 내 적의 피를 마시고 천강으로서 노야장의 마음을 영원토록 지켜줘야 할 것이다."
천살은 노인이 알려준대로 장훈을 찾아갔다. 검을 보여주자 장훈은 검을 부둥켜안고 슬피 울었다. 검의 호수를 만들고 검술을 달아주었으며 손잡이에 가죽을 감아주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검집을 만들었다.
"이 검은 기가 너무 강해서 철로 된 검집을 사용하면 검집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 가죽검집이 수명이 되어 새로운 검집을 바꾸실 때 꼭 가죽으로 된 검집으로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장훈은 나이가 천살보다 많았지만 시종일관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천살은 검을 만들고 남은 한철을 숨겨둔 위치를 장훈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장훈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한철을 다룰 수 없다며 사양했다.
만련을 한 보검이지만 겉모습은 수수했다. 검집도 일반 가죽으로 만든 평범한 모습이고 아무 장식도 없었다. 다만 천살의 덩치에 맞게 만들어 일반 검보다 크기가 훨씬 컸다.
장훈은 야장 노인의 뒤를 이은 진정한 제자이다. 야장 노인에게 맡겨지던 병장기의 의뢰들을 전부 장훈이 맡고 있었다. 그래서 강호의 정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천산파는 십년도 더 전에 멸문당했고 천산의 제자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워낙 폐쇄적인 문파라 그 영문이나 결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멸문시킨 당사자들밖에 없을 것이다. 천산파의 장문인은 화령이라는 수양딸이 있었는데 멸문 당시에 이미 스물에 가까웠으니 천살이 만난 화령은 가짜가 분명했다.
천살은 명화교에 대한 정보들도 장훈에게 꽤 들을 수 있었다. 명화교는 크게 세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본부는 청해호의 사도(沙島)라는 섬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 교주를 비롯한 장로들과 수뇌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음 하나는 서녕위와 가까운 곳인데 그곳에 명화교의 무인들과 군사들이 거점을 하나 차지하고 명나라의 군사와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군사들과의 마찰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몇년동안 무림맹과의 실랑이질만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또 하나는 탑리목분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명화교가 중원으로 들어올 때 처음으로 성화를 옮긴 신화동(神火洞)이 있다. 성화동, 화신동, 천신동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신화동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곳은 성지로 불리며 수백의 무인들이 자원하여 지키고 있다.
천살은 명화교의 수뇌부가 사도라는 섬에 위치하고 있고 허락받지 않은 자는 접근도 할 수 없다는 말에 막막해졌다. 화산의 권파 사람들을 찾아 자신도 화산 출신이고 서장로의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혼원공을 배우려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서녕위 쪽으로 가면 명화교에서 무사를 모집합니다. 그곳에서 공을 세워 직위를 올리시면 명화교의 수뇌부와 접촉할 수 있습니다."
중원에서 무인들이나 백성들이나 마교라 칭하면서 경원시하는데 비해 이쪽 사람들은 명화교를 그저 군벌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명화교가 딱히 악행을 일삼는 것도 아니고 명화교 덕분에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야심이 큰 젋은 사내들이 명화교에 가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천살은 명화교의 무사로 가입하면 무림맹과 싸워야 함을 알고 있다. 조금 내키지 않았지만 혼원공을 배운다는 목적을 위해 사소한 문제는 눈감아야 한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을 만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며 서녕위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 작가의말
萬鍊天罡, 극한으로 단련한 천강, 천강성은 북두칠성의 자루에 위치한 별의 옛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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