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명신공
"고맙다. 사부로서 너한테 해준것도 없는데 이득도 없는 일을 선뜻 승낙해주다니."
"제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사부님의 자식이고 화령의 동생이니 남은 아니잖습니까."
천살과 교주는 서로가 필요해서 맺어진 사제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사제의 정과 같은 무언가가 없었다. 지금 교주가 고마움을 표현하지만 자식이 완치된 후에는 여전히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계로 남을 것이다.
"교주는 내가 신호를 준 후에 들어오시게. 내가 침을 놓는 동안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반년후에나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으니 아무도 안에 들이지 마시게."
교주의 손에는 성물이 들려 있었다. 천살은 성물로부터 은은히 느껴지는 신화공의 힘을 감지하였다. 아마 사진군이 찾으려고 했던 그 물건일 것이다. 교주에게는 목숨과 같이 소중한 물건인데 이렇게 들고 나왔다는 것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교주와 한화령은 밖에서 기다리고 천살과 도인만 안으로 들어갔다.
"소교주는 편하게 누우시게. 교주는 쉽게 얘기했지만 단전과 다른 혈도들을 격리한다는 건 쉬운일이 아니네. 매우 큰 반발이 일어나기 때문에 대침 여섯개만 박고 끝날 일이 아니라네. 실수가 있으면 소교주나 나나 다칠 염려가 있으니 몸에서 최대한 긴장을 푸시게."
도인은 가늘고 짧은 침들을 꺼내 알몸이 된 천살의 손발에 꽂았다. 가끔 위치가 마음에 안드는지 뽑아서 다시 꽂는 경우도 있었다. 수십개의 작은 세침을 손발에 꽂은 후 도인이 입을 열었다.
"소교주의 경지가 생각보다 많이 높아서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네. 내외의 구분이 사라져 여섯개의 침으로 모자랄 듯하니 내 교주에게 대침 여섯개를 더 준비하라 부탁해야겠소."
밖으로 나간 도인은 교주에게 말했다.
"만혈개문의 경지인데 갓 발을 들인게 아니라 깊은 경지네. 준비한 침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최대한 빠르게 많은 침을 모아주게. 그리고 대침은 여섯개 더 필요하오."
교주의 눈짓을 받은 한화령은 밖으로 향했다. 데리고 온 수하들에게 명해 최대한 많은 침을 구해와야 한다. 대침은 가장 굵은 침인데 웃기게도 가장 부러지기 쉬운 침이기도 하다. 그래서 넉넉히 준비했지만 여벌이 없기에 최대한 많이 긁어모아야 한다.
다시 안으로 들어간 도인은 천살의 팔과 다리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무릎아래와 팔꿈치아래에 침이 한가득 꽂힌 천살은 꽤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도인의 도복은 땀에 절어 이미 반쯤 젖어 있었다. 밖으로 나가 새로운 침들을 받아온 도인은 천살에게 양해를 구했다.
"팔다리에 침을 다 꽂고 몸에 꽂을 때가 되면 두개의 밧줄위에 몸을 지탱해야 하네. 일부 혈도는 동시에 꽂아야 하는데 하나가 앞에 있고 하나가 뒤에 있는 경우가 있어서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소교주께서 참아주시기 바라네."
천살의 사지가 철침으로 빼곡히 둘러쌓였을 때 도인의 도복은 물에 갓 헹구어낸 것처럼 땀에 푹 젖어있었다. 바라보는 천살이 괴로울 정도로 도인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었다.
"교주, 들어와서 잠깐 도와주시게."
두가닥의 밧줄을 열뼘 정도의 간격으로 묶어둔 후 천살의 몸을 그 위로 올렸다. 밧줄 하나가 천살의 허리와 엉덩이를 이어주는 부분을 지탱하고 남은 하나의 밧줄이 겨드랑이가 있는 위치의 등을 지탱하면서 천살의 거구를 허공에 띄웠다. 도인의 말처럼 밧줄 두개에 의지해서 몸을 허공에 띄우는 것을 불편했지만 무공을 익히는 무인에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교주가 다시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휴식을 더 취한 도인은 다시 천살의 몸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가끔 가슴과 등에 동시에 침을 꽂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도인은 그때마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온몸에 천개도 넘는 침을 꽂은 천살이 멀쩡한데 도인은 기름이 다한 등잔처럼 언제든 꺼질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기력이 다했는지 도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붉은색의 단약 하나를 꺼내 복용한 후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얼굴에 홍조가 여러번 올랐다 내리는 것을 보니 보통 귀한 약이 아닌 듯 했다. 이각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도인은 다시 처음의 쌩쌩하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이를 먹으니 모든게 예전같지 않다네. 낡아빠진 육신 때문에 아까운 약 하나 소모했네. 소교주께서는 이 늙은이가 쓸모없다고 비웃지만 말아주시오."
약의 도움으로 기운을 차린 도인은 다시 천살의 몸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꽂기만 하는게 아니라 일부 침을 뽑기도 했다. 비상한 기억력으로 침을 꽂는 순서를 암기하던 천살도 침을 뽑기까지 하자 따라가기 힘들었다. 심지어 뽑았던 혈도에 다시 침을 꽂아넣기까지 하니 더더욱 헷갈렸다.
여섯시진이 흐르자 대침을 꽂을 차례가 되었다. 도인은 고개를 갸웃하고 한참 고민하다고 결심을 내렸는지 약 하나를 더 복용했다. 붉은 환약 하나를 더 복용한 도인의 눈에는 총기가 흘러넘쳤다.
"소교주 덕분에 귀한 약을 하루에 두알이나 먹게 되었네. 이후 한동안 드러누워 있어야 하니 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 귀한 약이 헛되이 낭비되지 않았으면 하네."
약의 효과가 확실히 좋은지 도인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넘쳤다. 대침을 잡고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던 도인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천살의 몸속에 굵고 긴 대침을 찔러넣었다. 매우 아프리라던 천살의 예상과는 달리 침이 들어가는 이물감만 느껴질 뿐 크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배와 등에 각각 다섯개의 대침이 박혔다. 마지막 남은 두개의 대침은 관원혈과 명문혈에 동시에 꽂혀 들어갔다. 관원혈은 단전이고 명문혈은 등에 있는 혈도인데 다른 사람의 몸안에 내공을 주입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혈도이다. 열두개의 대침이 성공적으로 꽂히자 도인의 얼굴에는 득의의 표정이 드러났다.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네. 한번만에 성공했다네."
한참동안 지켜보던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살의 몸에서 침들을 순차적으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천살의 몸에 남은 침이 삼백개정도 되었을 때 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 준비는 끝났소."
혈도에 침이 꽂혀있지만 점혈당한 것과는 다르다. 점혈은 상대의 혈도에 타격을 주거나 자신의 기운을 주입해 그 혈도의 성질을 일시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기운을 묶어둠으로 상대를 강제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단순히 침을 꽂은 것으로 혈도에 어떠한 제약도 줄 수 없다. 그래서 천살은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오는 교주와 한화령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주의 얼굴은 평소 그대로였다. 하지만 뒤따라 들어오는 한화령의 얼굴에 득의에 찬 미소가 서려있는 것을 확인한 천살은 급히 내공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단전뿐 아니라 전신 혈도의 기운들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공뿐 아니라 외공의 기운들도 삼백여개의 침에 의해 제압당한 것이다.
도인은 교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약속은 지키리라 믿겠습니다."
말을 마친 도인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도인이 떠나자 한화령도 천살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미천한 작자는 어쩔수가 없구나. 한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두번씩 당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한선후는 이마를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더니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냐? 언제 철이 들 작정이냐."
"아닙니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한화령은 호흡을 정리한 후 천살에게 말을 건넸다.
"기뻐해주세요. 제가 회임을 했어요. 아이의 이름을 미리 생각해 두시라고 전하러 왔어요."
한화령은 천살이 아무 반응도 없자 찝찝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갔다. 부친의 강요에 의해 천살에게 무릎을 꿇고 억지로 잘못을 빌었다. 천살이 화를 내며 길길이 뛰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아무 내색도 하지 않자 전날의 치욕을 제대로 씻어내지 못한 것 같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네가 이해해라. 내가 딸을 잘못 키운 것 같구나."
한선후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아이의 괴질을 위해 신화공을 익힐 수 있는 제자를 찾은것은 사실이다. 나도 북명공으로 신화공의 내력을 흡수해서 몸에 간직하고 있고 그 덕분에 소음공과 소양공을 동시에 대성했지만 신화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치료의 효과가 전무하더구나."
"그러다 초화규라는 작자가 신화공의 수련도를 도둑질해간 다음에는 아예 희망을 버리고 살았다. 수련도는 밀마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밀마에 대한 풀이가 신화동의 공동 벽에 씌여 있다. 나는 신화공을 도둑당할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신화공의 수련도를 외워두지 못했다."
천살이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자 한선후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천살의 자질은 진심으로 탐난다. 무공이나 다른 능력보다 더 탐나는 것은 저 정신력이다. 강한 정신력은 아니지만 한선후가 느끼기에 지금까지 본 자들중에서 가장 질긴 정신력일 것이다.
"그러다가 네가 서창훈을 이기자 그 천살성의 기운이라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서창훈은 솔직히 나도 이기지 못할 상대다. 내공이 많은것에 의존해 소모전으로 내가 이기더라도 상대의 패배는 아니다."
"그래서 괴령도인을 찾아냈다. 그리고 천살성 특히 천살마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천살마성의 기운은 신화공의 기운에 상응하는 위력을 가졌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치료의 효과는 없다고 하더라. 그래도 괴령도인 덕분에 아이의 수명을 이십년 늘였다. 그 사이에 신화공이 아닌 다른 치료법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한선후는 원래 천살을 힘으로 제압하여 데려오려고 했다. 둘의 무위차이가 분명하기에 한선후가 기습을 한다면 천살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천에서 돌아온 천살의 무위는 괄목상대라는 말로 일푼도 표현이 안될 정도로 강해졌다. 명현공 때문에 작지 않은 착각이 섞인 판단이지만 확실히 기습이라도 한선후가 천살을 제압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천살의 크게 달라진 무위에 놀란 한선후가 기척을 드러냈고 천살에게 들켰다. 그러자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천살에게 전음을 보내 자신을 따라오게 한 것이다. 원래는 혈도를 점하고 꽁꽁 묶어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천살의 발로 직접 호랑이굴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한선후가 천살을 데리고 일부러 험한 길로 돌아가는 사이 수하들이 수로와 말의 힘을 빌어 먼저 도착해서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급하게 판을 짜서 천살을 속인 것이다. 한선후가 초반에 거짓이 아닌 진심만 얘기했고 후반에 거짓을 섞을 때에는 천살이 신화공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낌새를 채지 못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너에게 알려주마. 네게도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다. 나는 북명신공으로 네 몸안의 천살마기를 흡수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천살마성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떠냐,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니냐?"
"그리고 네 건강한 육체는 괴령도인이 가져다 이혼술을 쓸 것이다. 괴령도인의 영혼과 네 영혼이 바뀐다고 한다. 괴령도인의 저 육신은 약으로 겨우겨우 지탱해 나가기에 영혼이 바뀌는 순간 너는 아무 고통도 없이 이 세상을 작별할 것이다. 네 몸은 괴령도인이 잘 사용해 줄 것이다. 물론 마교의 소교주인 천살로서 네 대신 살아갈테니 네 이름은 잘하면 사서(史書 - 역사책)에 실릴수도 있을 것이다."
한선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이어나갔다.
"잠깐 생각해보니 네가 지금까지 한 일들이 전부 나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 것 같구나. 맡겨준 일은 항상 기대이상으로 처리해 왔고 이제 마지막 가는 길까지 내게 큰 선물을 주는구나. 네 제삿날마다 내 필히 너를 위해 지전을 태워주겠다."
- 작가의말
다음 작품은 무협이 아닌 다른 장르를 써볼 생각입니다. 제목 짓기가 참 힘든데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SSS급, 레벨업, 실화냐 이런식으로 제목을 지어야 할지 평범하게 지어야 할지 고민됩니다.
한선후가 천살마기를 흡수하고 천마가 되나? 아님 북명신공보다 강한 신화공이 되려 한선후의 몸속의 신화공의 기운을 빨아들일까? 혹은 괴령도인이 변수가 되어? 한화령이 사실 천살을 진심으로 사랑해 어쭙잖은 연기로 부친을 기만한 후 몰래 들어와 관건적 시각에 교주의 등에 비수를 꽂고 천살을 구해서 백년해로? 당문에 남은 줄 알았던 당무영이 나타나서 천살을 구출? 고삼이 천살의 종적을 추적해서 등장? 다음편을 사흘뒤에 올린다면 이번편에 댓글이 많이 달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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