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부정
서무림맹과 명화교의 협의서는 검은 비단천에 붉은 주사로 썼다. 일반적인 주사가 아니라 곱게 갈린 고급주사라서 협의서 자체로만 해도 엄청 값나가는 물건이다. 하지만 협의서의 내용은 더욱더 값지다.
당문, 청성, 아미가 서무림맹을 만들고 명화교와 상호불가침의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을 누구 하나가 어기면 남은 세 세력이 그 하나를 공동으로 응징하기로 했다. 누군가 이 조약을 어기려면 최소 한개 세력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억지력이 있다고 해야 한다.
조약은 네 세력 중 세개의 세력이 의견 일치해야 무효를 선언할 수 있다. 이는 명화교에게 무조건 불리한 듯 하지만 바꿔서 명화교는 셋중의 하나만 같은편으로 만들면 된다. 그리고 현재 이 조약이 더 시급한 것은 명화교가 아닌 사천의 세 세력이다. 명화교는 이들이 무림맹의 편을 들면 더 많은 피를 흘리고 더 어려운 길을 가면 되지만 이들은 세력이 반토막나는 결과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이 조약으로 인해 서무림맹은 세력을 급확장할 수 있다. 명화교를 두려워하는 군소세력들이 서무림맹에 가입하기를 희망할 것이기에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대세력 하나만 있으면 무림맹을 추월하는 건 시간문제이다. 그러면 서무림맹의 핵심세력인 세 문파가 가장 큰 혜택을 받을 것은 불보듯 뻔하다.
당문을 떠나는 행렬은 서른명으로 줄어있었다. 천살은 은근슬쩍 당무영에게 칠변절독의 해독법을 알려주었음을 당가주와 당문의 장로들에게 흘렸다. 그리고 당무영이 한철의 매장지를 알고 있다는 정보도 하인과 하녀들이 있는 자리에서 수차례 흘렸다. 그래서 당가주는 당무영이 남아서 한철을 어떻게 다루는지 경험을 전수해야 한다며 천살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당형, 다음 만남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오."
검은 비단으로 만든 장포에는 검은 실로 흑룡이 수놓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수수하지만 자꾸 눈길이 가게 되고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옷이다. 옷에서 벌써 당무영이 당문에서의 위치가 어느정도로 중요하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천형, 내 걱정은 마시고 몸 보중하시기 바라오. 이 당무영이라는 짐덩어리 하나 덜었으니 더욱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바라오."
수하들중에 실질적으로 천살에게 도움이 된 것은 왕쌍말과 연화훈이다. 정보를 얻어오는 능력도 있고 위조와 사기를 치는 솜씨가 뛰어나 천살에게 부족한 점을 잘 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당무영 역시 천살 대신 호위대를 잘 관리했지만 스물여덟밖에 남지 않은 지금 관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자신을 항상 당형이라 부르며 잘 대해주는 천살에게 당무영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가문에서 쫓겨난 당무영은 천살에게 동질감도 느끼고 있다. 비록 천살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풍기는 기운이 당무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명현공이라는 대단해보이는 무공을 천살이 아무 조건도 없이 가르쳐주자 그때부터는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천형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나를 갈고 닦아야 한다.'
천살이 알려준 정보들을 천천히 풀면서 이득을 최대한 챙겨야 한다. 당문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어 누구도 당무영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게끔 해야 한다. 그렇게 힘과 세력을 키워 천살이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고삼은 고일이 죽은 후 당무영에게 많이 의지했다. 천살은 의지하기에는 너무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기에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많은 당무영에게 더 의지했다. 이제는 당무영도 없이 자신이 호위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이별의 슬픔 때문에 원체 적은 말수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천살 역시 몸의 움직임이 많이 달라져 변화한 육체에 적응하는데 신경 쓰느라 말이 없었기에 서른이나 되는 거한들은 조용히 길을 재촉했다.
매일 반나절 이동하고 남은 반나절은 호위대의 수련을 도왔다. 남은 스물여덟의 호위대는 자질이 크게 뛰어난 자가 없었다. 다만 이를 악물고 버틸 뿐이다. 고삼에게는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고 강사성도 자신에게 비교하면 기분 나쁠 정도로 자질은 부족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고된 훈련을 버텨내는 끈기는 대단하다.
평생 정진할 수 있는 내공과는 달리 육체의 전성기가 오기전에 일정 경지를 돌파하지 못하면 외공은 더이상의 진전을 보이기 힘들다. 육체가 쇠락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일정 경지로 끌어올려야 하기에 천살은 당분간 호위대의 수련을 집중적으로 돕기로 했다.
문득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천살은 이마를 찌푸렸다. 갑자기 느껴졌다는 것은 그전까지 기운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갑자기 기운을 드러낸 것은 도발의 의미인지 유인하려는 목적인지 알 수 없었다.
'네 사부다. 수하들에게 사도로 돌아가라 명해라. 너는 나와 같이 다녀올 데가 있다.'
천살은 협의내용을 적고 네 세력이 날인한 비단천을 고삼에게 주어 선우복명에게 직접 전하라고 명했다. 홀로 다녀올데가 있으니 지금과 같은 속도로 사도로 돌아가라 명하고 전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경공을 시전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맡겨주신 일은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덤으로 송백자가 내상을 입었습니다."
천살의 복수대상은 넷으로 화산, 소림, 무당 그리고 한화령이다. 그중 화산과의 원한은 이미 해결되었다. 비록 마음속의 한이 다 풀린것은 아니지만 입으로 화산과의 은원은 끝났다고 말을 뱉었으니 화산은 제외해야 한다. 지금 송백자의 내상으로 무당에 복수할 절호의 기회이기에 천살은 송백자가 내상을 입은 일을 대면하자마자 한선후에게 전했다.
"장하구나. 하지만 지금은 매우 중요한 일이 있기에 무당의 일은 잠시 미루어야겠다. 도착하면 자세히 설명할테니 우선 따라오기만 해라."
청해호에 자리잡은 명화교는 사실 무당에 큰 원한이 없다. 무당의 제자들과 속가들이 광서로 도망가는 일반 신도들을 주살한 일을 명분으로 삼아 무당을 깎아내리기는 하지만 직접 칼을 섞었던 소림과의 은원이 훨씬 강하다. 소림의 원각이 내상을 입었다면 만사 제치고 소림을 향해 달려갔을 수도 있지만 무당의 송백자이기에 한선후는 그닥 적극적이지 않았다.
밤이 되었는데도 한선후는 쉬지 않고 달렸다. 천살 역시 어둠때문에 움직임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기에 말없이 뒤를 따랐다. 평지였으면 더 빨리 달렸을 것이나 산과 계곡을 많이 타다보니 꼬박 이틀을 달려서야 한선후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낭자가 몸이 편치 않다 하여 많이 걱정했소. 지금 멀쩡한 모습을 보니 큰 근심 하나 덜었소."
한선후가 천살을 데려간 곳에는 한화령과 늙은 도인 하나가 있었다. 늙은 도인은 원래 작았는지 나이를 먹어 몸이 줄어들었는지 키가 천살의 허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천살의 덩치가 큰 것을 감안하더라도 도인의 체구는 작았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군요. 몸이 불편한 것도 있고 자택안에서 독살사건이 있어 일부러 피한것도 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참으로 송구합니다."
"우리 셋이서 중요한 일을 의논해야 하니 화령이 너는 다른데 가 있거라."
한선후의 말에 한화령은 자리를 피했다. 한화령이 사라지자 한선후는 천살에게 진중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너한테 한번도 얘기해준 적이 없는데 때가 된 것 같아서 말해준다. 우리 명화교에는 대단한 무공들이 많이 있다. 소음공이나 소양공도 강호에 흘러나가면 절세신공이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부동의 서열 일위의 신공은 신화공이고 이위는 북명공이다."
"솔직히 역대 교주들의 무위를 보면 북명공을 익힌 교주들의 무위가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신화공이 서열 일위인 이유는 북명공은 인간의 무공이지만 신화공은 천신이 명화교를 위해 내린 신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교주가 한 얘기들은 천살도 사진군에게서 들어 알고는 있다. 하지만 사진군이 얘기할 때는 그저 과장이 섞인 말이겠거니 했는데 교주가 직접 진심을 담아 얘기하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북명공은 약한 인간이 강한 맹수들을 닮기 위해 만들어낸 강해지기 위한 무공이라면 신화공은 인간이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이 내린 무공이다. 무공의 위력만 따지만 북명공을 익힌 교주들이 훨씬 강했지만 명화교의 전성기는 항상 신화공을 익힌 교주들이 이루어냈다."
교주의 눈에는 슬픔이 차올랐다. 그 눈빛에는 천살이 항상 그리워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하기 힘든, 천살이 갈망하는 무언가가 교주에게 있다.
"솔직히 일곱의 제자중에 내가 원해서 받은 제자는 세명밖에 안된다. 한명은 선우검파이고 한명은 강사성 그리고 남은 하나는 화운이다. 장우민은 사도무천의 세력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이고 사진군은 사씨가문의 위세 때문, 초영란은 초장로와의 관계, 너는 천살성이기 때문에 제자로 받아들였다."
"위 세명의 공통점은 신화공을 익힐 자질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사성과 화운의 무력이 부족함에도 닦달하지 않았다. 신화공을 익히는 순간 무력의 강약에 상관이 없이 명화교에서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생긴다. 셋중 누군가 먼저 신화공을 익혀낸다면 나는 곧바로 교주의 자리를 넘겨줘야 했을 것이다."
교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사실 나는 밖에 아들을 한명 키우고 있다. 그 아이가 괴질을 앓고 있는데 신화공을 익힌 자만이 치료가 가능하다. 괴질의 기운이 음양이나 오행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신화공의 기운만이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다. 나는 누군가 신화공을 익혀서 그 아이의 괴질을 치료해주기를 기다렸다."
"여기 이 도인은 신화공을 익힐 수 있는 체질인지 확실하게 판단해 줄 사람이다. 사실 이분을 찾느라고 신화공의 전수를 계속 늦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겨우 찾아낸 지금 제자라고는 너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내 아이의 수명이 몇년 남지 않았기에 네가 동의한다면 너에게 신화공을 전수하고 싶구나. 다만 네가 신화공을 익히면 교주가 될 것이고 네가 교주가 된다면 나와의 사제관계는 사라지게 된다. 네가 내 아이를 치료해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아무런 불만도 토로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살은 그제야 교주의 뜻을 알아차렸다. 본인은 신화공을 익히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지금 천살이 신화공을 익히고 아이를 치료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아마 그 치료때문에 천살이 공력이나 기타 부분에서 손해를 봐야 하는 듯 하다. 신화공을 익히고 교주가 되면 천살이 모른체 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씨 가문이 명화교의 교주를 역임한지도 백년이 되는구나. 가문을 위해 아득바득
하다가 근래 아이의 아픈 얼굴을 보니 갑자기 모든게 허무하더구나."
천살은 듣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짊어져야 할 위험과 부담은 무엇인가요?"
"네 단전의 주위에 여섯개의 침을 박아 단전과 기타 혈도들을 격리시키고 이 도인이 네 단전에 신화공의 내력을 주입할 것이다. 성공한다면 너는 신화공을 익혀내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일년정도 내상치료에 전념해야 한다. 신화공의 내력은 우리 명화교의 성물안에 있는 것을 내가 북명공으로 뽑아내서 도인에게 전달하면 도인이 네 단전에 넣어주는 것이다."
천살은 하마터면 곧바로 하겠다고 대답할 뻔 했다. 천살은 신화공의 내력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초반의 이런 절차를 건너뛰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것은 하수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실 저는 화산과 소림, 무당이라는 강대한 적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기에 명화교에 투신했습니다. 소교주의 자리도 얼떨떨한데 신화공을 갑자기 언급하시니 머리가 복잡합니다."
함께 저녁식사를 끝낸 후 천살은 자신의 방에 앉아 언제쯤 고개를 끄덕이는게 적당할 지 고민했다. 그때 한화령이 다짜고짜 방문을 열고 들어와 천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나쁜 년이고 죄 많은 년입니다. 하지만 제 동생은 아무 죄없이 불쌍한 아이입니다. 제가 지은 죄들이 동생한테 간 것 같습니다. 그 죄들을 제가 다 짊어질테니 제발 제 동생을 구해주세요."
한화령의 말에 천살은 울컥했다. 자신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인육백정들에게 넘겼냐고 호통을 칠 뻔 했다. 만약 천살의 손에 동생의 목숨이 달려있지 않았다면 한화령은 평생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격동한 심정을 겨우 가라앉힌 천살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낭자, 부부지간에 잘잘못이 어디 있겠소. 어서 몸을 일으키시오. 지나간 일들은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해봅시다. 가서 사부님에게 신화공을 익혀보겠다고 전하시오."
한화령이 얼굴에 화색을 띄고 밖으로 달려나가자 천살의 표정은 냉혹하게 변했다. 신화공을 익혀 교주가 되면 한화령에게 잔인한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평생의 시간을 바쳐서라도.
- 작가의말
교주의 부정. 아버지의 정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글이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면서 본인도 재밌는거, 이거 병은 아니겠죠? 정상급 골키퍼들이 큰 실수를 한 후에 부담을 떨쳐내고 본인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하루 연재를 쉰 후 연참과 일일연재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 더욱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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