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귀강림
조장로는 오랫동안 사장로에게 충성해온 자이다. 비록 호장로에게 밀려 크게 중용을 받지 못했지만 사씨가문과 호장로를 제외하면 사장로에게 가장 많은 충성심을 보인것이 조장로가 틀림없다. 그래서 지난번 전면전에 자신을 총지휘로 점찍자 기회를 잘 잡아서 호장로의 위치를 대신할 야심을 불태웠다.
하지만 전면전에서 초반에 승기를 잡았지만 기마부대의 등장으로 후퇴했다. 패배로 인한 후퇴가 아니라 손실을 줄이기 위한 후퇴이다. 하지만 교주가 사라지고 사도에 의문모를 병이 돌면서 적지 않은 사람이 죽자 그날 우위를 점했던 전면전은 패배인 것처럼 비춰졌고 조장로는 그 책임으로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사장로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조장로라고 바보가 아닌 이상 사장로가 사씨가문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심복과 수하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수가 없다. 조장로는 자신의 힘으로 출세가 어렵자 사장로에게 충성을 한 것이다. 하지만 교주가 사라진 뒤 사장로가 양성한 살수들과 마인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조장로는 사장로의 부름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예전에는 한선후를 제거하고 사장로의 가문에서 교주자리를 차지하길 바랐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렇게 되었다면 조장로 자신은 곧바로 찬밥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교주가 있을때는 무력이 필요해 조장로를 끌어들였지만 지금 사장로에게 필요한 자는 머리를 굴릴줄 아는 자들이다.
답답한 마음에 술 한대접 또 들이켰다. 예전에 자신에게 아부하는 자들과 함께 기생을 끼고 마시는 술은 참 달달했는데 지금 홀로 마시는 술은 쓰게만 느껴졌다. 다시 술단지를 들어 대접을 채우려는데 술단지가 들리지 않았다.
내공을 운용해도 술단지가 움직이지 않자 조장로는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공도 움직이고 팔다리 근육에 힘도 들어가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자 조장로는 고함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명문혈로부터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이 몸안으로 침투하더니 심장이 덜컥 멎어버렸다.
호장로는 자신의 수하들을 모아놓고 함께 술을 마셨다. 처음에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시간이 지나자 많이 안정되었다. 무공보다 머리를 굴리는데 더 열심이어서 술을 많이 마시면 취하기는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몇대접 마셨는데 기분좋게 취기가 오른다는 것은 호장로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첫날에 조장로와 가장로의 시체가 교주전 앞의 광장에 떨어졌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타올랐다. 기이한 것은 시체가 타는데 연기가 전혀 나지 않았고 시체가 타버린 후 재가 전혀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부 교도들은 하늘의 불이 내린 것이라고 엎드려 절을 하기까지 했다.
이튿날 여장로를 포함한 네명의 장로의 시체가 광장에 나타났고 똑같이 불타서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백명의 교도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고 천신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세번째 날이 되자 호장로는 겁이 나서 혼자 지낼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하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수십명의 수하들 중 호장로의 부름에 응한것은 열명이 조금 넘었다. 이번 겁난을 피해가면 자신을 외면한 자들에게 확실한 보복을 해주리라 다짐하며 호장로는 술을 연속 들이켰다.
호장로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들도 죽고싶은 심정이다. 이들은 호장로 덕분에 이런저런 이권을 차지해서 먹고사는 자들이다. 호장로의 한마디면 내일부터 당장 돈줄이 끊어지기에 어쩔수 없이 호장로의 부름에 응했다. 하지만 연회가 아니라 초상집같은 분위기에 술맛이 날리가 없었다.
이런 연회에는 원래 기생들도 부르고 풍악도 울려퍼지고 해야 하는데 호장로는 악사나 기녀사이에 자객이 섞여 들어올까봐 일절 부르지 않았다. 하인하녀들도 모조리 치우고 술단지를 열 때마다 은수저로 독이 있는지 검사했다.
수하들은 술잔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위로하다 호장로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상석을 바라보았다. 언제 사라졌는지 호장로의 자리는 텅텅 비어있었다. 온몸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수하들은 경공을 시전해 교주전으로 달렸다. 개중 몇몇은 술을 마시고 운기하다가 작은 내상까지 입었다.
아무도 없던 광장에 갑자기 여덟구의 시체가 나타났다. 전부 장로들이었고 가장 눈에 띄는것은 당연히 호장로이다. 명화교에 장로가 수십명이라지만 교도들에게 얼굴까지 널리 알려진 장로는 열을 넘지 않는다.
여덟 시체가 불타기 시작하자 천명은 넘는 교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입속으로 중얼중얼 경전을 읽으면서 가끔 두손을 비비며 절을 올렸다. 교도들의 태도는 경건했고 기도는 정성스러웠다. 가끔씩 교도들의 입에서는 신강천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신강천사(神降天使)는 명화교의 오래된 전설이다. 자신의 교도들이 큰 위험에 처할때 신은 사자를 내려 위험의 원인이 된 교도들을 처단하고 교도들에게 위험이 된 적들도 함께 처단한다. 첫날에 두명을 처단하고 둘째날에는 네명 셋째날에는 여덟명 이런 식으로 칠일째에는 백이십팔명을 죽이는 것으로 분쟁을 끝내버린다.
암흑신의 사자가 죽이고 광명신의 사자가 그 시체들을 흔적도 없이 불태운다. 신의불은 단순히 시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교도들의 마음속의 번뇌와 불안도 함께 태워버린다. 사도에 자리잡은 후 오랫동안 성화를 접하지 못했기에 교도들은 기적적으로 보게된 신의불에 경배를 올렸다.
"제기랄, 어떻게 교의 장로들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교도들은 아무런 동요가 없지? 교를 위해 수십년간 한 헌신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냐?"
강장로는 화가 미칠어 올라 부들부들 떨었다. 교에 헌신한 장로들이 시체가 되어 불에 타는데 교도들은 차분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나 올리고 있다. 교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젊은 시절부터 싸움터를 전전했고 늙어서도 장로가 되어 노심초사한 자신들을 장작삼아 신인진 뭔지 하는 작자에게 제사를 지내는것 같다는 생각에 강장로는 미칠 것 같았다.
"당장 모두에게 일러 무기를 가지고 내 장원에 모이라고 해라. 오늘 광장에서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전부 처단하고 말리라."
넷째날이 되자 강장로뿐 아니라 다른 장로들의 동요도 극심했다. 더구나 사도 여기저기에 자리했던 마인과 암살단을 사씨가문으로 집중시켰기에 그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당문의 기습으로 크게 손해를 본 뒤 사씨가문이 양성한 마인과 암살단은 사도 곳곳에 자리잡고 당문의 침투와 암습에 대비했다. 하지만 장로들이 연이어 죽어가자 그들을 전부 사씨가문으로 불러들였다.
수하들은 손에 병장기를 들고 강장로의 뒤를 따라 살기등등하게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도착한 후 강장로의 명을 기다렸지만 강장로는 아무말도 없었다. 선두를 바라보니 앞에서 수하들을 이끌던 강장로가 사라져버렸다.
강장로의 수하들뿐만 아니라 강장로와 같은 생각으로 광장으로 향한 몇몇 장로들의 수하들도 똑같이 미망에 빠졌다. 갈팡질팡하는 장로들의 수하들과는 달리 이천명에 육박하는 교도들은 차분한 태도로 신의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도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있었기에 외곽지역에 있던 수하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장로의 시체가 광장에 갑자기 나타나고 곧바로 불에 의해 사라지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들중 대부분은 교도가 아니라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무인이고 일부 명화교 출신들도 신심(信心 - 믿는마음)이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뒤 교도들을 따라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닷새째가 되자 도망을 시도하는 장로들이 생겨났다. 넷째날까지는 지금 누리는 부귀영화와 권력이 아까웠고 사장로가 무언가를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하루에 열여섯명의 장로들이 죽었고 그중 일부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더 이상 남아있어봤자 살길이 없음을 감지한 장로들은 사도의 탈출을 시도했다.
닷새째 저녁 서른두명의 시체가 태워졌다. 서른두명중 몇몇은 장로가 아니었다. 이제 사도에는 사장로를 제외하면 그 어떤 장로도 남아있지 않다. 요 몇년안에 새롭게 장로가 된 사씨가문의 사람들도 전부 처단되었다.
사장로는 가문안에 꽁꽁 숨어있던 몇년전 장로가 된 조카들이 전부 죽음을 면치 못하자 사도에 더이상 안전한 곳이 없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엿새째 되자 가문의 무공을 모르는 식솔들을 몰래 사도 밖으로 빼돌렸다. 조금의 불안감이 있지만 사장로는 교주의 상징인 성화령(聖火令)을 손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이것 덕분에 자신만 이번 겁난에서 벗어났다고 믿고 있었고 믿고 싶어했다.
'이건 신의 징벌이 틀림없다. 소림에 보낸 살수가 무형지독을 사용하지 못하고 죽은게 틀림없다. 천살이 소림을 봉문시켰다는 말은 거짓말이 틀림없다.'
눈밑이 거뭇하게 죽어있는 사장로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이며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차라리 이 모든게 신이 신실하지 못했던 자신들에 대한 벌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 모든것이 천살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려니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때 사장로의 방에 쥐 한마리가 기어들어왔다. 쥐는 익숙하게 먹을것이 놓여있는 상자안으로 기어들어가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장로가 몸에 달려있는 작은 죽통을 끌러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먹는데만 열중했다.
'전부 안전하게 사도밖의 피신처로 이동. 새벽에 다시 움직여서 두번째 지점으로 이동할 예정임. 모든것이 순조로움.'
마지막 모든것이 순조로움에 사장로는 마음이 놓였다. 죽통이 작아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 한마디로 많은 정보를 담는다. 모든것이 순조로움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순조로움은 과정에 문제가 생겼지만 잘 해결했다는 뜻이다. 만약 아무 언급도 없다면 문제가 생겼고 해결이 깔끔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주의력이 나한테 집중 되겠지. 그렇게 되면 가문의 식솔들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내 한목숨으로 가문을 구한다고 생각하자.'
여섯째날 광장에서 색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그전까지는 시체를 불태웠지만 이번에는 육십사명의 살아있는 자들이 불태워졌다. 그자들은 하나같이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몸을 태우는 불길에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갈구했다. 신을 향해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듯한 모습에 교도들은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사장로는 깊은 밤이 되자 쥐를 통해 전해온 서신을 읽고 또 읽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가문이 양성한 백명에 가까운 마인들중에 육십사명이 산채로 광장에서 불태워졌다는 소식이다. 조심성이 극에 달한 사장로는 밀실에서 문을 꽁꽁 닫아걸고 모든 보고를 쥐를 통해 받았다. 하지만 가끔 쥐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 보고를 늦게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사장로는 급히 종이를 찾아 세필로 명령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인해 글씨가 자꾸 틀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손가락에서 나는 피로 겨우겨우 서신을 작성한 사장로는 죽통을 쥐에게 채운 뒤 밖으로 내보냈다. 서신의 명령은 글을 아는 자라면 오해할 여지가 없이 명확했다.
'各自逃亡(각자도망)'
- 작가의말
잠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장면을 현대판타지에 가져다가 신의 이름으로 부정부패한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을 처단한다면 어떤 댓글들이 달렸을까 하고 말입니다. 시원하다는 평이 우세할까요 아니면 소설이지만 개연성이 없고 망상이 과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일까요?
4달여전에 처음 글을 쓸때에 비해 마음가짐이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여러분이 읽고 싶은 글도 쓰고 싶습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통해 글읽는 분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 글읽는 분들이 읽고 싶어하는 글을 쓰면서 글읽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 두가지가 다 이루어져야 소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두가지를 한 작품에 녹여서 인기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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