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확보
한선후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대고 어떤 혈도들이 짚였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때 한원영의 오른팔이 움직이더니 손으로부터 아름다운 선이 그려졌다. 한선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팔에 공력을 집중해 검을 막았다. 그러나 서문고운이나 다른 자들의 검을 잘 막아냈던 팔이 이번에는 실패했다.
한선후의 왼팔로 향하는 검은 빠르면서도 묵직했고 급하면서도 영활했으며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웠다. 왼팔이 잘려서 하늘을 날았지만 팔의 단면에서 피 한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한선후는 급히 신형을 뒤로 물리면서 어깨의 혈도들을 짚었다. 천마신공을 멈추면 피가 다시 흘러나오기 때문에 미리 점혈해 두는 것이다.
"교주, 위명은 많이 들었소. 이런식으로 만나게 되어 참으로 유감이오."
남궁천은 거의 무방비의 한선후를 상대로 소성에 이른 절정검을 사용하면서 필살을 예감했다. 하지만 한선후의 공력이 잔뜩 실린 팔을 베어낸 후 검은 모든 힘을 잃어버렸다. 자존심이 상해 처음에는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계획에 순순히 따른것이 잘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한선후는 갑작스런 두통때문에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자신의 아들이었는데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고민을 시작하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선후는 두통을 피하려고 생각을 멈추면 크게 후회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마를 찌푸려가며 사고를 계속했다.
'유손이는 오래전에 죽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서 속았다.'
"내 아들은 어디에 있소? 명문대파의 사람들이 인질극을 벌인것도 모자라 내 아들인척 하고 암습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남궁천은 한선후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선후가 일의 전후를 알아내기 위해 계속 속은척 한다는 생각을 못한 남궁천은 사실대로 말했다.
"당신 아들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오. 당신 아들이라고 보내준 자가 사명군이라는 자더군."
사장로는 무림맹에 교주의 아들을 잡아서 보낸다며 사명군에게 한원영의 옷을 입혀 보냈다. 아무에게나 옷을 입혀서 보낼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안되는 중요한 일이기에 교주와 자주 만난 사명군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서무림맹에는 당문의 독혈대가 있었고 당문의 독혈대에는 당무영이 있다.
당무영은 한원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사명군이 누군지는 안다. 당무영이 사장로가 보내온 자가 교주의 자식이 아닌 사명군임을 밝히자 마교가 역으로 함정을 파려는 것이 아닌지 의견이 분분했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사명군을 고문했고 사명군은 이각도 못 버티고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명군의 말은 허황된 듯 했지만 전후와 인과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마인은 사장로가 키운 것임도 알게 되었고 관련된 자료들이 장원의 밀실에 보관되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함정을 파고 한선후의 팔 하나를 잘라내게 된 것이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다 말하지 않았지만 한선후는 남궁천의 짧은 대답에서 사장로가 역모를 일으켰고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왔음을 확신했다. 밖에서 힘든척 하던 원각을 비롯한 여섯이 들어와서 한선후를 다시 포위했다.
"당신들이 나를 제거하면 황제의 칼날이 다음에 가리킬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하지 않소?"
"말로 우리를 흔들려고 하지 마시오. 폐하에 대한 우리의 충심은 하늘이 굽어살피고 있소."
남궁천은 한선후의 말에 지체없이 대답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트집이 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비록 말로 곧바로 반박했지만 모두의 마음속에는 한선후를 굳이 죽여야 하나 라는 생각이 조금씩 깃들기 시작했다.
한선후는 원앙연환각(鴛鴦連環脚)에 고산종의 공력을 실어 일곱을 상대했다. 원앙연환각은 여자들이 많이 익히는 각법이다. 남자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연속으로 두 다리를 놀려야 하는 이 무공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을 겪는다. 한선후도 많이 수련한것은 아니지만 한팔로 일곱을 상대할 수 없어 익숙하지 않은 각법을 꺼내들었다.
원앙연환각의 초식이 조금은 서투르지만 남궁천을 비롯한 일곱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한선후는 여유가 생겼다. 일곱을 상대한다고 해도 많아야 두명이 협공하는 것이 다이기 때문에 한선후는 싸우는 와중에도 앞날을 고민할 수 있었다.
'교는 버려야겠구나. 사장로가 나를 대신해 잘 관리해주기를 바라야지. 지금 최우선 순위는 아들을 낳는 것이다. 교는 언제든 되찾을 수 있지만 더 늦으면 한씨가문의 대가 끊어진다.'
겉보기에는 한선후가 남궁천을 비롯한 일곱을 상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힘을 빼고 화려한 동작으로 혹시모를 감시꾼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다. 한선후도 곧바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이들도 쉽게 놔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당무영은 독혈대를 인솔해서 금의위의 특무조와 함께 사도로 침입했다. 목표는 사씨가문의 장원에서 마인에 관련된 자료들을 확보하고 마인을 만들어내는 무공을 찾아내는데 있다. 당무영은 당문의 장로로부터 가능하면 천마신공을 빼돌리거나 필사를 해오라는 귀띔을 받았다. 독혈대는 여섯명인데 반해 특무조는 서른도 넘기에 몰래 빼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도의 지리를 잘아는 당무영 덕분에 전혀 헤매지 않고 사장로의 장원에 도착했다. 천마신공을 익힌 아이들을 비롯한 가문의 핵심들은 은밀한 곳에 숨어있고 사장로는 방계와 가신가문의 무인들과 함께 전장에 나섰다. 본인이 아닌 조장로를 책임자로 한 것은 혹시나 패배할 경우 그 죄를 조장로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것이다.
특무조는 장원으로 은밀히 침투해 미리 파악해둔 밀실에서 마인에 관한 자료들을 확보하기로 하고 당무영과 여섯명의 독혈대원은 밖에서 장원을 벗어나는 의심가는 자가 없는지 감시하기로 했다.
특무조가 전부 사라지자 당무영은 여섯명의 독혈대원들을 장원의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곧 명현공을 운용하여 장원으로 침투했다. 밀실의 자료에 관심이 없기에 곧바로 사장로의 방으로 향했다.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천마신공을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당무영의 명현공도 경지가 낮지 않아 쉽게 들키지 않았다. 독혈대의 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명현공의 공이 컸다. 독을 쓰는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암기와 해독은 당문에서도 열손가락안에 꼽힐 정도가 되었다. 암기술에 명현공을 결합하면서 은밀한 공격이 가능해져 천살이라는 배경이 사라져도 여전히 가문의 중용을 받았다.
사장로의 방에 거의 다가가는데 누군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사장로의 방에서 나왔다. 당무영도 얼굴을 아는 자였다. 젊은 세대중에서 교주의 제자들을 제외하면 가장 무공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현군이라는 자였다. 사현군이 한손으로 가슴을 짚고 조심스레 움직이자 당무영은 연유를 짐작하고 은밀히 사현군의 뒤를 따랐다. 동시에 당문 특유의 암호로 독혈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현군은 천마신공을 익힌 아이들과 가문의 핵심들을 대피시키는데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것에 매우 큰 불만을 가졌다. 가주의 장자인 자신을 위험한 이곳에 그대로 남겨두고 다른 자들을 대피시킨다는 것은 다음대 가주로 자신을 꼬물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 무림맹과 전면전을 하러 출발할 때 몰래 빠져나왔다. 은밀히 숨어있다가 사장로의 방에 들어가 천마신공을 훔치는데 성공했다. 이제 사도를 몰래 벗어나서 천마신공을 숨겨둔 다음 상황을 봐가면서 그대로 도망갈지 가문으로 돌아올지 정하기로 했다.
독혈대원들은 금의위 특무조가 대놓고 견제하자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 그러다 당무영의 신호가 들려오자 풀어졌던 마음을 급하게 다잡았다. 귓등에 꽂은 얇은 바늘이 당무영이 내공으로 보낸 소리에 의해 진동했는데 해석해보면 최고등급으로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최고등급의 일이라면 천마신공밖에 없다.
당무영은 명현공으로 사현군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독혈대원들은 먼 거리를 두고 사현군을 포위했다. 으슥한 골목길로 사현군이 들어가자 당무영은 신호를 보냈다. 하독하는 수준이 낮아서 다른 독혈대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무영의 신호에 조심스럽게 다가온 독혈대원은 당무영의 암기에 독을 정성스레 발랐다.
다시 암기를 건네받은 당무영은 암기에 명현공을 실어서 던졌다. 천살이 검에까지 명현공을 확장했던 것처럼 당무영도 명현공으로 암기에 은밀성을 더했다. 적당한 양의 독이 암기를 통해 사현군의 체내로 들어가 전신을 마비시켰다.
가까이 다가가서 검을 사현군의 목에 댄 후 혈도를 짚었다. 당문과 원한관계를 지는 자들은 쉬운자가 한명도 없다. 그래서 독혈대는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사현군의 가슴팍에서 천마신공을 발견한 독혈대원은 곧바로 당무영에게 건넸다.
당무영은 천마신공을 기름종이로 꽁꽁 감싼 후 천으로 된 주머니에 넣었다. 곧바로 다른 독혈대원이 등짐에서 매처럼 생겼으나 다리가 유난히 긴 새 한마리를 꺼냈다. 머리와 가슴에 꽂힌 몇개의 침을 뽑아낸 뒤 추궁과혈 비슷한 것을 하자 새는 곧바로 깨었다.
유난히 긴 다리에 죽통을 매달고 그 죽통안에 천마신공을 넣었다. 다행히 종이로 된 것이어서 돌돌 말아서 죽통에 넣을 수 있었다. 마른 고기를 꺼내 새를 배불리 먹인 후 곧바로 날렸다. 배불리 먹이지 않으면 중간에 사냥한다고 시간을 지체할 수도 있다. 성질이 더러워 한번 봐둔 사냥감을 잡을 때까지 쫓아다니기 때문에 기운이 팔팔한 사냥감을 눈독 들이면 며칠씩 늦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날리기 전에 배불리 먹인다.
새를 날린 후 당무영과 독혈대원들은 다시 장원의 주변으로 돌아가서 아무일도 없은 것처럼 경계하는 척 했다. 곧 특무조가 하나하나 빈손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독혈대원들은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밀실의 자료들은 대피한 자들이 가지고 떠났던 것이다.
자료를 확보하는 임무에 실패한 특무조는 두번째 임무를 수행했다. 특이한 냄새를 풍기는 먹이로 쥐들을 유인해서 사로잡은 후 검은색 환약을 먹이고 다시 놓아주었다. 이제 저 쥐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음식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리고 배부른줄을 모르고 배가 터질때까지 먹고 결국에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가 썩으면서 독이 되고 그 독에 중독된 자들이 죽으면 시체가 썩으며 또 독이 될 것이다.
만약 특무조가 명화교의 장례 풍습이 화장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지때문에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방식을 선택했다. 시체를 제때에 화장하기만 하면 큰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할일을 마친 특무조와 독혈대가 사도를 떠날 때 마비독이 심장에까지 퍼진 사현군은 심장바미로 죽어버렸다. 아무런 선명한 외상도 없고 은침으로 검증해도 독이 검출되지 않을 것이기에 갑자기 심장이 멈춰 죽은 것으로 판명날 것이다.
검이 한선후의 발에 걷어채이자 남궁천은 그 힘을 해소하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곧바로 원각을 비롯한 여섯이 큰 동작으로 한선후를 공격하며 빠져나갈 틈을 마련해 주었다. 한선후는 여섯의 공격을 연이어 막아낸 후 신형을 훌쩍 날려서 포위망을 벗어났다.
"오늘의 원한을 이 한모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언젠가는 꼭 갚을 것이니 기대하고 있으시오."
말은 원한이라지만 오늘 한선후가 일곱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 이 빚을 먼저 갚은 후에야 복수할 자격이 생긴다. 남궁가와 소림 그리고 당문과 청성 및 점창파는 당분간 한선후와 마교의 보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작가의말
혹시 왜 한선후가 미리 아들을 하나 더 낳지 않았냐고 의문을 가질 분이 계실수도 있습니다. 한선후는 기회만 생기면 노력했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재능이 부족한지 노력이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목적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과정을 즐겼더라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 모두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을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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