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혜검
복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상대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복수를 끝내는 자들은 대부분 의무적으로 복수를 하는 자들이다. 복수를 끝내야 할 의무때문에 복수를 할 뿐 직접적인 원한관계는 없다. 상대를 잡아놓고 두고두고 괴롭히는 자들은 보통 가슴속에 원한이 쌓여 그것을 풀려는 자들로 깊은 원한관계인 경우다.
천살 역시 한때 복수를 갈망한 적이 있었다. 하늘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자신을 기만했던 모든 자들을 원망했다. 서창훈과의 대결에 운좋게 이겼고 서창훈이 자결한 후 한동안 자신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복수가 끝났는데 속에 쌓였던 원한이 전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강한 힘을 얻게 되고 나서야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자들에게만 복수심을 품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복수심과 원한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조자운에게 큰 복수심을 품은적 없고 유씨 삼형제들도 우연히 만나지 않았으면 복수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복수심과 원한은 천살의 공포심이 근원이었다.
자신이 겁에 질려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자들에게만 복수심을 품었음을 깨닫고 나자 머릿속이 더욱 명확해지고 미망이 거두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욱 객관적으로 누구한테 복수를 해야 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한선후, 한화령, 송백자, 그리고 소림사의 알지 못할 누군가이다.
예전에는 화산 전체를 미워한 적도 있다. 무당 역시 전부 미워했고 한화령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명화교를 난장판으로 만들 생각도 했다. 그때는 화산이 서창훈의 편 같았고 무당이 송백자의 편 같았으며 명화교가 한화령의 힘이 되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안에 가서 연화의 얼굴을 보았을 때 기분이 매우 나빴다. 천살은 당시 호매령이 생각나서 그런 것이라 여겼는데 팔다리가 불구가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유씨 삼형제를 보고 자신의 복수가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화산의 속가제자 신분을 박탈당한 유씨 삼형제는 당시 소교주인 천살에 비하면 약자였기 때문이다.
'힘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다. 힘이 없으면 상황에 휘둘리고 사람에 휘둘리고 결국 자기자신에게도 휘둘린다.'
운명에 휘둘리고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의 이익에 휘둘리던 천살이 강한 힘을 가지면서 끝내 자신만의 확고한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나이에 비해 성숙함이 부족했고 사고의 폭도 제한되었지만 강대한 힘이 천살을 가두던 틀을 강제로 찢어버렸다.
'여긴 무당이다. 깔끔하게 복수를 끝내고 수하들을 찾아내 도망간다. 봉문했으니 산문만 벗어나면 쫓아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네가 수하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갸륵하다만 뒤편에도 사람들이 있다."
송백자는 천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천살의 마음을 흔들려는 목적으로 입을 연 것이다. 네가 수하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다를 앞에 말해놓으면 상대가 말려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적이기는 하지만 앞부분은 자신에 대한 칭찬이기에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인다. 그 말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자신밖에 모르는 자사자리(自私自利)한 자라도 자신이 수하들을 아낀다 믿고 수하들의 안위로 분심(分心)하게 된다.
천살은 송백자와 지저분한 대화를 계속하기 싫었다. 그래서 검을 뽑아들고 송백자를 향해 짓쳐들었다. 송백자는 천살을 포위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송백자가 가장 앞에 있었기에 천살이 송백자를 쫓으면 알아서 포위망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송백자의 패착이었다.
천살은 포위망에 들어가자 곧바로 칠성연주로 성라운포를 사용했다. 칠성연주는 일곱번의 공격을 하는 것이다. 천살은 성라운포를 일곱 방위로 시전해버렸다. 무당의 칠성진에서 배운대로 가장 먼 자를 북극성이라 하고 자신을 북두칠성중 하나로 여기고 북극성의 방위와 여섯 별의 방위로 성라운포를 거의 동시에 일곱번을 시전한 것이다.
거의 전부 소모되자시피 한 전신혈도의 내공들이 순식간에 다시 차올랐다. 그 과정이 천살의 몸과 정신에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혜성처럼 밝고 태양처럼 뜨겁고 달처럼 은은한 별들이 유성처럼 짓쳐들자 송백자를 따라온 스물 남짓한 무당의 장로와 제자들은 황급히 검을 놀려 수비를 하려 했다.
하지만 검을 움직인 자는 서넷에 불과했다. 남은 자들은 미처 검을 잡은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천살이 빚어낸 최강최흉의 초식을 몸으로 받아냈다. 검을 움직인 자들은 송백자와 그 주변에 있던 자들로 천살의 검이 움직이자마자 검을 움직인 자들뿐이다. 남은 자들은 천살의 초식을 예상도 못했기에 반항의 여지조차 없었다.
송백자는 자신의 가슴에 난 구멍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심장을 직격당하지 않았지만 스쳐지나가며 심장의 일부가 사라졌다. 홍진단을 먹고 이곳으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가 한번 출수했을 뿐인데 무당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자신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모두 자신이 꾸민 일이니 자신으로 끝내고 무당에 화풀이하지 말아달라고 빌고 싶다. 그런데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오는 입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만 한 숨을 몰아 천살에게 애원하려고 하는데 천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화산의 서창훈도 이 성라운포의 초식에 패하고 자결했소. 너무 억울해 하지 마시오."
천살은 송백자가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서창훈이 죽었을 때와는 달리 천살의 마음은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는 자신의 복수심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때라 복수를 하고도 제대로 복수한게 맞는지 고민되었었다. 하지만 지금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복수의 결과를 즐길 수 있었다.
송백자를 따라온 자들은 목숨을 잃은 자가 없었다. 하지만 예외없이 두 팔의 근육과 힘줄들이 파열되어 검을 잡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 송백자는 끝내 마음속의 말을 천살에게 전하지 못하고 눈을 뜬 채 죽어버렸다.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무당에 대한 걱정 때문에 편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남은 분들은 나와 함께 다시 올라가서 자신들의 죄를 알리고 벌을 받으시오. 만약 내 수하들이 한명이라도 다치면 여러분의 목숨은 내가 거두겠소."
짙은 패배감에 잠식된 이들은 천살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화가 난 천살이 무당에서 난동이라도 부리면 큰일 나는 것이다. 현재 천살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현허밖에 없는데 현허는 명상으로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어딘가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천살의 여섯 수하들은 포로가 되어 있었다. 실력차이가 너무 커서 반항의 여지도 없었기에 오히려 다치지 않고 혈도만 짚혀 있었다. 뒤늦게 송백자의 계획을 전해들은 통순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모르고 송백자가 성공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다 물빠진 생쥐꼴을 한 사형제들과 사숙들이 천살에게 포로되어 함께 올라오자 까무라칠 것 같았다.
급히 천살의 수하들의 혈도를 풀어준 뒤 통순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소교주께서 오해가 없으시기 바라오. 이 모든것은 저들의 단독범행으로 무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소. 저들을 가장 엄한 벌로 다스린 뒤 무당에서 축출할 것이니 소교주는 노여움을 푸시기 바라오."
"장문인께서 무당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저에게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없고 무당의 입장을 밝히기에 급급하시군요.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통순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송구한 표정으로 천살에게 답했다.
"내가 소교주께 실례를 범했소. 명문정파인 무당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일을 벌였으니 그만 정신이 없었소. 소교주께 심심한 사과를 표하오. 혹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든 들어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소."
천살은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요구할 것은 없었다. 아무리 무당이 구석에 몰린 상황이라고 해도 무당의 무공비급들을 천살에게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재물따위는 천살에게 큰 의미가 없으니 천살은 그저 손사래를 쳤다.
"소교주께서 이렇게 담백한 사람인지 몰랐소. 오늘 일을 비밀에 붙여주신다면 장삼풍 조사께서 우화등선하기 전에 마지막 깨달음을 정리한 태극혜검을 보여드리겠소. 아직까지 무당에는 태극혜검을 보고 무언가를 얻어낸 제자가 없소."
통순은 천살이 태극혜검을 보여주겠다는 자신을 의심할까 걱정되어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당 최고의 고수인 송운자가 태극혜검을 보고 폐인이 되었고 무당오자중의 하나도 태극혜검을 보고 점점 무공을 잃어가고 있다. 만약 천살이 태극혜검을 보고 송운자처럼 곧바로 무공을 잃어버린다면 처단하고 오늘 일을 덮을 수 있고 천천히 잃어간다고 해도 무림을 위해 큰 해를 없애는 셈이니 나쁘지 않다.
천살은 장삼풍의 깨달음이라는 말에 마음이 동했다. 불사공은 정신적 수련이 아닌 육체적 수련이다. 그 수련과정이 매우 복잡하여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지만 천살마기 덕분에 손쉽게 익혀냈다. 그 과정에 정신적 깨달음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신화공 역시 정신적 깨달음이 필요 없이 십전도의 자세를 취하고 운기를 하면 되는 무공이다. 십전도의 순서를 깨고 결국 십전도의 자세가 필요없이 일반 내공심법처럼 좌공으로 바꾸는데 깨달음이 필요하지만 천살은 무의식중에 그 과정을 넘겨버렸다.
성라운포는 무수히 많은 검의가 어우러지고 많은 초식들을 버무려서 만든 초식이다. 이러한 초식을 만들어내는데 역시 거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천살은 무공검법과 만상무결을 통해 튼실한 기초를 닦았지만 고급검법이나 고급초식을 접한 경험이 적고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하기에 원래 성라운포를 만들어내는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청풍부월검을 상대하면서 그 검법을 닮아가다보니 우연에 우연이 겹쳐 성라운포의 초식을 만들어냈다. 만약 호군천이 아닌 서창훈의 청풍부월검이라면 천살의 수준에 뭔가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호군천의 경지가 낮아 조금은 어설프기에 천살이 뭔가 얻어내고 절세의 초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천살은 이제껏 정신적인 깨달음보다는 무의식적에 혹은 엉겁결에 뭔가를 이룬것이 많다. 이는 천살의 뛰어난 육체와 정확한 본능이 무의식과 결합되어 천살의 정신적 깨달음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대신 그러한 성과는 커다란 벽이 되어 천살이 더욱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천살도 괴령덕분에 육체가 완성되고 내공이 마르지 않는 경지에 이른 후에 이러한 사실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저 끊임없는 수련과 세월의 연마로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데 느닷없이 태극혜검을 보여준다고 하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장문인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제 수하들은 제가 잘 다독일테니 무당에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만약 천살이 이대로 태극혜검을 살피러 갔다면 여섯 수하의 목숨은 그대로 사라졌을 것이다. 태극혜검으로 거래를 끝낸 상태라 천살도 뒤늦게 뭐라 하기 힘든 상황이다. 천살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수하들의 목숨을 보전시켰다.
통순의 뒤를 따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니 작은 모옥이 하나 있었다. 태극혜검과 같은 절세의 기물을 저런 허술해 보이는 모옥에 보관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찢어진 도복을 입고 몸이 앙상한 늙은 도인이 둘의 앞길을 막았다.
"사부님, 이분은 명화교의 소교주입니다. 무당이 큰 은혜를 입어 보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켜주시지요."
말을 마친 통순은 앙상한 도인을 안아서 옆으로 옮기고 천살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보니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잘 지어진 모옥이었다. 비가 샐 걱정도 없고 안이 전혀 습하지 않아 서책의 보관에 용이해 보였다.
태극혜검은 한벌의 도포에 적혀 있었다. 백이십자정도 되어 보였고 여기저기 몇자에서 십몇자씩 순서없이 적혀 있었다. 앙상한 노도인은 안으로 들어와 천살이 태극혜검을 보는 것을 제지하려 했지만 통순에 의해 저지되었다.
- 작가의말
본편에서는 서술하지 않을 작정이기에 작가의말로 적습니다. 통순은 원래 도명이 청순이었습니다. 무당칠검의 하나였죠. 송운자의 제자로 일곱명이 강호행을 하며 무당칠검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무공이 강한 것은 다섯명이고 청순과 다른 한명은 무공이 평범했습니다.
그중 한명이 초화규와 무공을 겨루다가 패하고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순은 나쁘지 않은 무공으로 무당 장문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호를 통순으로 바꾸었습니다. 송운자의 제자들만 청자돌림을 쓰고 남은 제자들은 장삼풍의 제자들처럼 통자돌림을 씁니다. 청순은 장문인이 되었기에 도호를 통자돌림으로 바꾸었습니다. 본편에 쓰면 외전느낌이 날것 같아 작가의말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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