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규명
"누구시오? 밤에 성문을 열려면 개봉부윤의 영패가 있어야 하오."
"받아보시오."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작은 소리를 내며 병사의 손에 안착했다. 많은 경험은 아니지만 돈주머니를 두어번 받아본 경험이 있는 천사성은 은자가 들어있는 돈주머니의 소리와 비슷하다가 생각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두어번 났다. 아마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돈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하는 듯 했다. 곧 육중한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의 바퀴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천사성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굴려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차가 멈추자 사내가 천사성을 안아내렸다.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천사성은 당혹감을 느꼈다. 사내는 화령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두 장한중의 한명이었다. 혈도가 짚혀서 그런지 밤공기가 유독 추웠다.
사내는 따뜻한 모닥불가에 천사성을 눕혔다. 혈도가 짚혀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어 나무에 기대 앉히는 것도 불가능했다. 천사성은 이럴줄 알았으면 앉은 자세로 혈도가 짚힐걸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깐 떠올렸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른 뒤 향긋한 냄새가 천사성의 코를 찔렀다. 화령의 몸에서 나던 향기가 분명했다. 천사성은 화령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입이 열리지 않아 참아야만 했다.
"천공자, 잘 지내셨나고 묻고 싶지만 대답을 이미 아니 안부는 생략할게요."
화령은 천사성에게 다가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천사성은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천사성의 얼굴을 다 닦아준 화령은 천사성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아시다시피 우리 천산파는 무당의 초청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나고 무당의 제자들과 함께 돌아가려고 마차를 기다리는데 한명의 무당제자가 눈치를 보며 사라지더군요."
"제가 어릴적부터 호기심이 많아 궁금한 것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몰래 빠져나와 그 무당제자의 뒤를 따랐습니다."
화령의 얼굴은 모닥불의 열기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몰래 빠져나간 제자는 무당의 대장로인 송백자와 만나더군요. 야심한 시간 사조와 도손의 은밀한 만남, 생각만으로도 짜릿하더군요."
화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사성은 뭐가 짜릿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듣기만 해야 할 신세이다.
"그런데 둘이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곧바로 영문을 알고 전음도청술을 시전했죠."
화령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칭찬을 바라는 아이같은 순진무구한 표정에 천사성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대장로님, 서문초신의 말을 들어보니 천사성이라는 자의 자질이 과연 대단한 것 같습니다.'
'나도 소문은 들었지만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과장된 일이라고 생각해 개의치 않았었는데 사실인 것 같구나.'
'서문초신은 허언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천사성이라는 자를 제거해야 함이 마땅치 않을까요?'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다. 그 천사성이라는 아이가 현재 어디 있는지 알아오거라.'
천사성은 화령이 무당제자와 송백자의 말투를 흉내내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시뒤 무당제자가 돌아와서 송백자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더군요. 귓속말이라 안타깝게도 엿듣지 못했습니다."
화령의 얼굴에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천사성은 화령의 표정이 참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은 곧바로 움직였습니다. 둘이 화원으로 향하자 저는 멈출수밖에 없었어요. 화원에서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거든요."
천사성은 갑자기 무언가 깨닫고 깜짝 놀랐다. 화령은 송백자에게 들키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런 화령도 화원에서는 기척을 숨기기 어렵다고 계속 따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서장로는 자신이 가까이 있고 소리를 내려 애쓰는데도 자신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어린 나이에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척을 숨기는데 능숙한 화령도 의심스럽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자신의 혈도를 짚은자가 누구인지, 서장로는 왜 자신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여러모로 의심스러웠다.
"저는 추적술이나 도청술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먼 곳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무당의 두 조손이 나누는 전음을 다 엿들었죠."
"전음을 길게 나누었습니다만 대략적인 것은 이렇습니다. 송백자가 격공점혈의 수법으로 천공자의 혈도를 짚었고 무당의 성쇄진(星鎖陳)을 펼쳐서 천공자의 기척을 차단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다른 제자를 시켜 화산의 서장로를 그곳으로 불러왔다고 했습니다."
천사성의 머릿속에는 번개가 내리쳤다. 토막토막 끊어져있고 중간중간 사라졌던 진실들이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송백자의 행동이 약간 작위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너무 큰 비통에 무시하고 있었다. 화령에게서 감춰진 진실들을 알아내니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서장로와 송백자의 만남이 끝난 후 송백자가 제자에게 전음으로 천공자를 남모르게 납치해서 데려오라고 명하더군요. 무당의 손에 떨어지면 천공자의 운명이 어찌될지 뻔히 보여서 수하를 시켜 천공자를 모셔왔습니다."
"무당파의 점혈법은 독특해서 저도 풀지 못합니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르면 아혈이 풀릴 것이니 궁금한 것은 그때 물어보세요."
말을 마친 화령은 천사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인 천사성이 부끄러움에 먼저 눈을 돌렸다.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목 근처에서 움직였다. 입을 벌려보니 꿈쩍도 안 하던 두 입술이 그제야 분리되었다.
"우선 화령소저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오. 이 천사성이 도울수 있는 일이라면 두팔을 걷고 나서겠소."
"우선 이것 하나만 묻고 싶소. 화령소저는 무당의 초청을 받고 오셨는데 왜 화산과 나를 돕는 것이오? 내가 세상물정은 잘 모른다지만 무당에서 나를 확보하면 화산에게서 무림맹주의 자리도 양보받을 수 있을 것이오."
"천산이 무당을 버리고 화산과 손잡으려 한다는 것은 천공자도 알고 있지 않나요? 이정도 공이면 화산도 천산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할 거예요."
천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령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천사성은 화령의 표정변화를 따라가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장로와 송백자의 대화는 육성으로 나누어서 엿듣지 못했어요. 거리가 너무 멀어 독순술도 소용이 없었구요. 혹시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있을까요?"
천사성은 둘의 대화를 빠짐없이 화령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천살마성인 것만은 비밀로 하고 나이가 차지 않은 천살성을 죽인자가 화를 당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화령은 둘의 대화내용을 다 들은 후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듣기로는 경지에 이른 자들은 거짓을 말하면 수련에 지장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야 하는데."
화령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서장로가 자신의 말을 진실로 만들려면 천사성을 화산제자로 받지 않고 데리고 있다가 하늘이 정해진 명만큼 산 천사성을 죽여야 한다.
"괜찮소. 내 마음은 이미 화산에서 떠났소."
"제 생각에는 서장로가 천공자를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비밀로 할 것 같네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서장로가 본인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공자의 배분은 송백자와 같아져서 함부로 천살성이니 뭐니 입에 올리지 못할 겁니다."
천사성은 연화의 입을 통해 들은 화산제자들이 서장로에 대한 평가들을 떠올렸다. 본인의 수련을 위해 제자도 받지 않고 혼인도 하지 않은 사람이 서장로이다. 천살성인 자신을 위해 서장로가 본인의 수련에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화산에 돌아가서 화산의 제자가 되어야 화령소저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터인데 내 마음이 이미 화산에서 떠났으니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소."
"만약 천공자를 무당의 손에서 빼돌린 공으로 화산과 손잡으려 했다면 곧바로 서장로에게 데려갔을 거예요. 굳이 성밖으로 모셔올 필요가 없었겠죠."
천사성은 화령의 말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 천모가 아둔하여 화령소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천공자는 참으로 나쁜 사람이군요. 이 화령이 천공자를 사모하여 구해드렸다는 뜻입니다. 처음 천공자를 보았을 때부터 운명을 느꼈습니다."
말을 마친 화령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천사성은 화령의 기습에 대처를 할 생각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이럴때는 점혈당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어떤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했을지 모를 것이다.
"천공자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중원의 예법에야 여자가 이러는 것이 수치이지만 변방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중원의 예법으로 저를 판단하지 마시기 바래요."
"화령소저와 같은 분에게 저같이 하찮은 놈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이제 화산제자가 될 가능성도 없으니 신분상으로도 너무 차이가 납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중원의 예법은 다 버리라구요. 변방에서는 마음만 맞으면 그만입니다. 주변의 시선이나 쓰잘데기 없는 예법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천사성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뜻하지 않게 진실을 접하게 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서장로에 대한 고마움이 많이 가시게 되었고 화산에 대한 귀속감도 사라져버렸다. 예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들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화산의 제자가 된다는 것도 천사성의 추측이지 서장로가 명확하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생각이 호매령에게 미치자 가슴이 아릿해왔다. 하지만 호군천도 자신이 천살성인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딸자식과 혼인을 시킬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호매령과는 겨우 몇번 본 사이이다. 눈앞의 화령과 얼굴을 맞댄 시간이 호매령보다 훨씬 오랠 것이다. 하지만 천사성의 마음은 여전히 호매령에게 가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난 천사성은 머리가 뜨거워지며 불쑥 말을 꺼냈다.
"화령소저가 이 하찮은 자를 백안시하지 않고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천모는 화령소저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여자에게 눈돌리지 않겠소. 상전이 벽해가 되더라도 이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오."
화령은 천사성의 뜬금없는 고백에 놀랐는지 한참동안 대답을 못했다. 천사성도 홧김에 말하고는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자신과 화산 및 호매령의
인연은 이미 끝났다.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지며 침묵을 지키던 화령은 겨우 입을 열었다.
"천공자의 마음도 저와 같다니 안심이 되네요. 저 혼자만 속앓이를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내일 저와 함께 개봉으로 돌아가서 서장로를 뵙고 정식으로 화산의 제자가 되세요. 그리고 천산으로 와서 저한테 다시 구친을 하세요."
그때 화령의 수하가 불쑥 나타나 종이 한장을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화령은 종이를 모닥불에 태웠다.
"아무리 모닥불이 있다고 해도 밖은 추우니 마차안에서 쉬시지요. 밤길에 마차를 움직이기 불편하니 내일 아침 함께 개봉으로 가시죠."
- 작가의말
요즘 제가 메시의 드리블영상에 푹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글도 그런가 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드리블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인내가 필요한 구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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