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혈개문
눈을 살포시 감고 조용히 정좌한 천살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나 천살의 몸속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다. 만상무결의 내공편에서 발견한 가능성을 불사공을 믿고 시도해보았는데 보란듯이 성공했다.
일반무인들은 내공을 물처럼 느낀다. 모이는 특성이 있고 일부만 뽑아서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처럼 가벼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천살의 내공은 동자공을 통해 정순해졌기에 물보다는 좀 더 무겁고 끈끈한 기름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만상무결의 내공편에서 저자는 의념(意念)이 내공을 정의하고 제한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내공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순간 내공의 한계가 정해지기에 내공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공에는 한계가 없고 그저 인간의 상상력에 한계가 있을 뿐이라 여러곳에 서술했다.
청해호는 크기가 커다란 이유로 가끔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용권풍이 분다. 호수 가까이에서 부는 용권풍은 호수의 물을 하늘로 뽑아올린다. 이를 용흡수(龍吸水)라고 하는데 바다나 큰 호수에서 부는 용권풍을 뜻하는 말이다.
용권풍을 목도한 천살은 영감을 얻어 내공에 응용해 보려 했다. 선뜻 시도해보기 힘든 일이지만 만상무결을 믿었고 불사공을 믿었다. 단전속의 내공을 용권풍을 흉내내어 소용돌이치게 했다. 단전안의 내공들은 태양을 따라 동쪽에서 출발하여 높은곳으로 향하여 서쪽으로 지고 그다음 달을 따라 서쪽에서 출발해 낮은곳으로 향하여 동쪽에서 모습을 감췄다.
높은곳은 남쪽이고 낮은곳은 북쪽이다. 천살의 내공은 단전안에서 동, 남, 서, 북의 방위로 움직였고 동, 남, 서는 양의 기운으로, 서, 북, 동은 음의 기운으로 동에서 음이 양으로 바뀌고 서에서 양이 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순환과 음양의 전환에 신경을 쓰며 내공을 돌리자 단전에 작게나마 기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천살이 의념을 더욱 집중시키고 내공의 순환에 가속이 붙자 소용돌이는 점점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소용돌이에 어느정도 힘이 생기자 흡력이 발생하여 전신의 혈도들로부터 기운을 끌어모았다. 단전의 기운이 강해지자 소용돌이에 한층 힘이 붙어 흡력이 더 강해졌고 강해진 흡력은 더욱 빠르고 철저하게 전신 혈도들로부터 기운을 거세게 빨아들였다.
혈관이 피를 수송하는 보이는 기관이라면 혈도는 기운을 보관하고 수송하는 역참과 같은 보이지 않는 기관이다. 혈관에 피가 없으면 사람이 죽는것처럼 혈도에 기운이 사라지면 사람 역시 생명이 위험하다. 피가 없으면 곧바로 죽는것과는 달리 온몸의 기능들이 서서히 정지되며 산송장이 되어버린다.
혈도들은 기운을 단전에게 빼앗기자 천살이 호흡으로 폐속에 끌어들인 기운들을 서로 다투며 흡수했다. 미처 기운을 확보하지 못한 혈도들은 기운이 상대적으로 많은 혈도들로부터 기운을 빼앗았다. 물이 높은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기운도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단전을 제외하면 말이다.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천살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가빠졌다. 평소 한번 호흡할 시간에 세번이상 호흡했다. 하지만 단전의 기운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흡력도 강해지기 때문에 호흡으로만 혈도들에게 충분한 기운을 공급할 수 없다.
내공수련은 단전의 내공이 전신의 혈도들을 돌아다니며 눈덩이 굴리듯이 기운들을 묻혀가지고 단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고급심법일 수록 필요한 기운만 묻혀올 수 있어 내공의 정제가 빠르기에 어느정도 경지에 이른 후 내공이 모이는 속도가 늘어난다.
하지만 현재 천살은 전통적인 수련방식이 아니라 단전에서 흡력을 발생시켜 일방적으로 혈도의 기운들을 빼앗고 있었다. 안전하지 않은 수련법이기에 마공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마공을 정공으로 만드는 수단을 천살은 가지고 있다.
몸이 위기에 처하자 불사공이 눈을 떴다. 신체의 기능들을 조율해 호흡기능을 최대화하는 동시에 천살의 몸에 잠들어 있는 기능들을 깨워나갔다. 자신이 있다는 듯 불사공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나갔다.
인체의 혈도의 갯수는 문파마다 다르다. 의서나 여러가지 서책에 적힌 혈도들은 오랜 시간동안 검증을 거쳐 그 성질이나 위치가 명확한 혈도들이다. 하지만 바위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모래알마다 무게가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혈도가 다르다. 이름이 지어진 혈도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위치나 성질이 같은 혈도들일 뿐이다.
불사공은 천살이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혈도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혈도는 단전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체기관이 아니다. 사람의 몸을 아무리 해부해봐도 단전을 찾을 수 없고 혈도를 찾을 수 없다.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의념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천살이 의식하지 못한 혈도들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념을 통해 그 존재를 인지해야 비로소 감각의 영역에 있는 손발이나 기타 신체기관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살이 해야 할 일을 불사공이 현재 대신해주고 있는 것이다.
단전에게 기운을 착취당하던 혈도들은 갑자기 수많은 우군들이 나타나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단전의 흡력은 점점 강해질 것이고 혈도의 기운은 유한하다. 유한과 무한의 싸움에서 유한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때 불사공이 마지막 절차를 밟았다. 피부표면의 혈도들을 깨운 것이다. 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달하고 삼화가 취정을 한 후 내외의 구분을 느낄 수 없을 때에야 열린다는 피부의 혈도들이다. 그것을 노화순청은 커녕 단전의 내공을 채우지도 못한 천살이 불사공의 도움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피부의 혈도들은 호흡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자연속의 기운들을 흡수한다. 피부의 혈도를 여는것은 내공의 증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삼화취정까지 이룬 무인이 내공이 부족할리가 없다. 피부의 혈도를 여는 것은 그저 하나의 경지에 대한 증거일 뿐이다.
하지만 천살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단전의 기운이 반의반도 차지 않았고 현재 소용돌이의 흡력 때문에 체내에서 기운의 부족을 느낀다. 피부표면에 자리한 혈도들의 기운들은 다른 혈도들과 단전에 의해 순식간에 빨렸다. 하지만 활짝 열린 혈도들은 곧바로 그 기운을 외부로부터 복구하였다.
혈도들로부터 억지로 쥐어짜내지 않아도 많은 기운이 단전으로 모였다. 혈도들도 단전에 빼앗긴 기운 이상으로 기운을 보충하였다. 단전의 흡력이 강해질 수록 그 과정이 가속화되었고 결국에는 단전이 피부를 통해 외부의 기운을 직접 빨아들이는 것과 같은 형국이 되었다.
단전이 전신의 혈도에서 기운을 빨아들이고 체내의 혈도들은 피부의 혈도들에서 기운을 보충한다. 그리고 피부의 혈도들은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여 보충한다. 이 과정에서 전신 혈도들의 기운이 어느순간 변화하지 않고 안정을 찾았다. 흐름은 여전하지만 결과만 보면 단전이 직접 외부기운을 흡수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내외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어느순간 전신 혈도들의 기운이 안정을 찾자 천살은 단전에 집중시킨 의념을 거두었다. 단전에 온갖 기운으로 가득차서 더이상 기운들이 흡수되지 않고 사방으로 튕겨나가고 있다. 이제는 기운의 흡수를 멈추고 동자공으로 정제를 해야할 시간이다. 아마 불필요한 잡기운들을 다 버려도 단전의 반은 거뜬하게 채웠을 것이다.
천살의 의념이 단전을 떠나는 순간을 노려 천살마기가 단전으로 침투했다. 단전의 강대한 흡력이 아니면 하단전에 침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무인의 내공이 물이고 천살의 내공이 기름이라면 천살마기는 용암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름에 비해 훨씬 무거운 용암이 단전에 들어가자 소용돌이가 멈추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긴 호흡으로 수련을 마무리한 후 천살은 두손을 비빈 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대부분 무인은 내공수련의 마무리를 이 동작으로 한다. 천살도 그렇게 배웠고 십년의 시간동안 습관이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하는 것뿐이다.
얼굴에서 손을 떼고 눈을 뜨니 은백색의 정광이 번쩍이고 사라졌다. 단전에 의념을 집중해보니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혈도나 단전은 의념을 집중해야만 그 존재가 느껴진다. 고수일 수록 동시에 많은 혈도에 의념을 두어 운기가 복잡한 초식도 쉽게 시전하는 것이다.
내공은 음양의 구분이 있다. 하지만 내공의 음양의 구분은 상대적인 것이다. 극양의 기운 앞에서는 웬만한 기운은 전부 음의 기운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음양은 일정 기준으로 내공을 두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하기 위한 편의이다. 이 문파에서 음으로 정한 기운이 다른 문파에서는 양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천살마기는 극음의 기운이다. 천살마기의 일부나마 단전에 자리를 잡자 단전의 기운들은 전부 양의 기운이 되었다. 동자공은 순양의 기운을 지향한다. 단전속의 천살마기와 공존할 수 없다는 듯 남은 내공들을 규합하여 강하게 부딪혀갔다.
천살은 음혈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 음혈은 만련을 거친 보검이라 할 수 있다. 불에 달군 검을 망치로 두드리면 검속의 잡질들이 천천히 밖으로 밀려난다. 동자공과 천살마기가 거세게 충돌하자 단전속의 잡기운들도 망치에 두들겨진 검속의 잡질들처럼 단전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단전속의 기운이 요동치자 천살은 다시 눈을 감고 단전에 의념을 집중시켰다. 천살은 천살마기를 감지할 수 없다. 천살마기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기에 그 존재를 정의하지 못했고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내리지 못했다.
덕분에 천살의 모든 의념은 동자공과 동자공을 따르는 기운들에 집중되었다. 단전속의 거센 부딪힘에 내공이 점점 정순해지는 것을 느끼자 천살은 동자공이 잡기운들을 정제하는 과정이라고 인식했다. 어느정도 부딪힘이 지속된 후 천살마기가 존재를 숨겼다. 천살마기가 숨어들자 동자공도 휴식을 취했다.
천살이 다시 눈을 떠보니 저녁에 시작한 수련인데 이미 날이 밝았다. 꼬박 하룻밤을 샌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옷을 보니 기운의 흐름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이 갔다. 따뜻하게 덥힌 물에 시원하게 몸을 담근 후 새옷을 차려입고 교주전으로 향했다. 오늘이 합동수련을 하는 곳으로 출발하는 날이다.
교주전에 도착하니 선우검파와 사진군을 제외하고 모두 도착해 있었다. 약속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화운이 시비를 걸어왔다.
"칠사제, 이런 행사에서는 막내가 항상 가장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하는 것이네."
"제가 처음이라서 몰랐습니다. 내년부터 육사형이 언제 나올지 시간을 미리 알려주시면 그보다 빠르게 나오도록 하지요."
천살의 말에 강사성은 자신이 나서지 않은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재주가 부족해 천살의 말에 받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건 수하들을 시켜서 알아보라고 하면 될 일이네. 사형을 수고롭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걸 모르는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수하들을 시켜 다른분들의 뒤를 캐도 괜찮은가 봅니다. 역시 명화교라 가식으로만 들어찬 정파들과는 다르군요. 사형제들간의 우애가 남다릅니다."
- 작가의말
萬穴開門, 만개의 혈도가 문을 열다. 물론 만개라는 건 아니고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요 몇달째 새로운 취미가 생겼습니다. 알려드려야 할지 망설이다 그래도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것 같아 작가의말에 적습니다. 제 새취미는 ‘글쓰기’ 입니다.
선작이 천명 넘은 기념으로 오늘 삼연참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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