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지수
방으로 돌아온 천사성은 책들을 정리했다. 대부분 불경이지만 천축어로 된 여행일지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천사성이 이미 읽어본적이 있는 책들이다. 분류를 끝낸 뒤 자신의 법호를 명혜라고 밝힌 노스님이 준 대반야경을 읽었다.
불경의 내용이야 다 똑같았지만 추가된 주해는 제각각이다. 명혜스님이 준 대반야경의 주해는 재미있었다. 주해의 말투가 익살스러울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해석을 동시에 하고 그 해석들을 자체로 평가했다. 글씨체가 고른것을 보니 혼자서 작성한 듯 한데 주의안하고 읽으면 여럿이 작성한 주해로 오해할 것이다.
특히 재밌는 것은 모든 주해의 마지막에 답은 부처님이 알고 있다 라고 적어놓았다. 천사성은 반야경의 내용은 대충 훑고 주로 주해 위주로 읽었다. 반야경이 다 끝난 뒤에 응담필록(鷹談筆錄)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글은 응이라는 사람과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지낸 삼년정도의 기간동안에 서로 나눈 대화에 대한 간략한 글이었다. 서로 어떤 대화들을 나눴고 그 대화들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를 상세히 적었다.
대반야경을 덮은 천사성은 코웃음을 쳤다. 응담필록에서는 일화일세계 일엽일여래라는 열글자를 통해 화엽신공이라는 절세무공을 깨달았다고 했다. 하지만 천사성은 아무리 이 열글자를 되뇌어봐도 아무런 깨달음도 오지 않았다. 응담필록을 적은자가 허풍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천사성은 대반야경을 펼쳐들고 다시 한번 정독했다.
무공검법을 얻었을 때도 허풍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련하면서 허풍이 아닐수도 있다 생각되었고 서장로의 검법에 대한 견해를 듣고나서 확신을 가졌다. 무공검법은 위력이 강한 검법은 아니지만 검의와 검리가 매우 완전한 검법이다. 서장로의 기준 대로라면 고급검법에 속한다.
응담필록을 허풍이라 생각한 것은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천사성은 두 사람의 대화를 차근히 살피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두사람의 대화는 대단히 함축되고 비유성이 강해 천사성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가 어렵자 천사성은 응담필록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대반야경을 덮은 천사성은 천축어로 된 여행일지를 살폈다. 배를 타고 세상의 모든 바다를 항해했다는 여행일지는 허풍이 분명했다. 왜냐면 그자는 중원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자는 백성이 백만정도 되는 나라를 대국이라고 칭송했다.
지형이나 사람의 이름, 동물이나 식물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많아 이해도 어려웠다. 천사성은 흥미를 잃고 다른 책을 뒤적였다. 이번 책은 연금술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책인데 돌덩이를 금으로 만들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돌덩이를 금으로 만드는 물약을 제조하는데 들어가는 재료가 금보다 수십 수백배는 더 귀중해 보였다. 농사를 잘 짓겠다고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썩혀 거름을 주는 것이나 진배없다. 천사성은 다른 책들도 뒤졌지만 천축어로 된 잡서들은 도움이 되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중원의 잡서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불경중 읽어보지 못한 불경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몇장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천소협, 지금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풍운당에 모였습니다. 천소협도 풍운당에 가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이 자리는 이제자인 단손경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손경은 아내가 둘째를 임신하여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대제자인 조자운은 아직 조사동에서 나오지 못했기에 어쩔수 없이 천사성이 참가해야 했다. 돌아가는대로 천사성을 화산에 입문시키기로 했기에 서장로도 동의했다.
평소에 편하게 입던 옷이 아니라 화산파에서 정성들여 준비한 옷을 입었다. 귀한 비단옷은 아니지만 일반백성들은 평생 입어보지 못할 옷이다. 시골에서 땅을 뚜지고 진흙을 주무르던 코흘리개가 출세했다고 생각하며 천사성은 옷매무새를 한번 더 살폈다.
풍운당에 가자 여러가지 색과 여러가지 형태의 옷을 입은 여러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다. 풍운장의 총관이 화산의 천공자가 입장한다고 호(呼) 했지만 누구도 천사성을 쳐다보지 않았다. 화산파의 후기지수라면 조자운과 단손경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작은 문파의 무인이라도 있었으면 천사성에게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는 어느정도 세력을 자랑하는 문파들만 모여 있어서 조자운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천사성은 조용히 구석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장내를 살펴보니 여자는 몇명 없었고 대부분 남자였다. 큰 무리는 예외없이 여자 한명씩 있었고 작은 무리들은 비슷한 복색의 남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풍운당의 중간에 자리한 무리의 중심에는 두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 무리의 대화를 주의깊게 들어보니 여자는 남궁소저라 불리우고 남자는 각각 서문공자와 장공자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서문공자는 서문고검의 손자로 천사성도 인사를 나눈적이 있다. 천사성의 기억에는 자부심이 강하고 오만하여 무리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여러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장공자는 풍운산장의 소장주이며 소림의 속가제자이다. 속가제자임에도 소림의 절학인 금강불두공(金鋼拂頭功)의 수련을 허락받은 기재였다. 금강불두공은 삼십여년전에 소림의 칠십이절예에 새롭게 포함된 무공이다. 내공과 외공을 동시에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그 성취가 매우 느리지만 대성하기만 하면 금강불괴의 몸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외공을 아무리 수련해도 머리는 언제나 약점이다. 하지만 금강불두공의 최고경지인 금강불두를 이루면 약점이 사라진다. 천사성은 모르고 있지만 장공자의 손이 옅은 자색을 띄는 것은 금강불두공이 이단계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칠단계인 금강불두와는 거리가 멀지만 후기지수라 불리는 나이에 이단계에 들어선 것만 해도 대단했다.
소림의 속가제자뿐 아니라 정식제자들까지 포함해도 다섯손가락안에는 손쉽게 들 장공자와 오만하고 냉랭하던 서문공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만든것은 바로 남궁가의 남궁청아였다. 남궁청아는 말없이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하며 가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만 하는데도 주변에 몰린 사내들은 신이 나서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남궁청아를 에워싼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규모가 조금은 작은 무리가 있었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모용궁현과 모용부설이 있었다. 이 둘은 천사성이 서장로가 언급하는 것을 몇번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둘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남녀쌍둥이는 용봉태(龍鳳胎)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둘을 모용용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둘은 용과 봉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남자인 모용궁형뿐 아니라 여자인 모용부설도 어린 나이에 강한 무공을 익혀내어 강호의 명사들이 모용가의 앞날이 밝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둘은 모용세가에서 몇대동안 익혀내지 못한 청상은설(靑霜銀雪)의 내공을 익혀내었다. 대성을 하면 한여름에도 물을 얼릴수 있다는 극음의 내공으로 한세대에 두명이 동시에 익혀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모용세가의 특징인 짙은 눈섭과 하얀 피부 그리고 둘이 서로 닮은 쌍둥이라는 점에서 천사성은 둘의 신분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남궁청아의 무리가 꽃을 보고 몰려든 나비들의 무리라면 모용용봉을 둘러싼 무리들은 강한 우두머리에게 몰려온 늑대들 같았다. 대화도 주로 모용가의 형매가 주도하고 남은 자들은 짧게 대답하거나 경청하고 있었다.
세번째로 큰 무리는 조금 바깥쪽에 형성되어 있었고 무리의 중심에는 한명의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천사성도 몇번이나 얼굴을 마주친적이 있던 천산파의 대제자 화령이었다. 다른자들을 몰려들게 하는 남궁청아나 모용부설과는 달리 화령은 거미처럼 다른 자들을 끌어당겼다.
손으로 입을 가로막고 웃는 남궁청아와는 달리 화령은 입을 크게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단아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모용부설과는 달리 화령은 여기저기 눈웃음을 날리고 상대의 말에 추임새를 잘 넣었다. 하지만 화령의 주위에 몰려든 자들은 천사성이 보기에도 앞선 두 무리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였다.
조금 특이한 무리는 소림의 중들이었다. 그곳에는 아까 천사성에게 호통을 치던 젊은 중도 포함되어 있었다. 콧볼에 살이 두툼하고 아랫입술이 두꺼워 심술이 많아 보이는 젊은 중은 무엇이 불만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고 있었다. 장공자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소림의 속가제자인 장공자가 자신들을 냉대한채 남궁청아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출가인이라 여자가 있는 무리에 끼기도 그렇고 소림제자란 신분때문에 남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아 소림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얘기를 나누었다. 뭔가 불만에 차있는 소림의 무리와 달리 무당의 후기지수들은 유유자적해 보였다.
무당의 제자들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차를 음미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화는 가끔 한두마디씩 나누고 전부 차의 향을 음미하는데 푹 빠진 것 같았다. 꾸며낸 여유가 아니라 몸에 배인 느긋함이었다. 장삼풍덕에 오랜 시간동안 성세를 누려온 무당파만의 자신감 표출이었다.
무당이 소림을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림이 명화교와 시비가 붙어 침공을 받으며 장경각이 타버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 덕분에 풍운장의 소공자인 장문산이 익히고 있는 금강불두공도 그때 칠십이절예에 포함되었다. 익힌 사람이 없는 몇몇 절예가 불타버려서 복원할 가능성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때 총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개방 소방주 현문천 입장합니다."
현문천은 거지답지 않게 깨끗한 피부를 자랑했다. 이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깨끗이 씻은 것이다. 하지만 거지의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산발을 했고 깨끗하게 빤 옷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었다. 천사성이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현문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현문천은 이러한 냉대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구에서 쭈뼛거렸다. 그러다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고 한적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현재 개방은 개방방주를 비롯해 고수의 숫자가 열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방주인 현문천이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원나라가 통치하는 백년의 시간동안 개방은 가장 많이 탄압을 받은 방파이다. 반원복송(反元復宋)의 구호를 공공연하게 외쳤기 때문이다. 원나라 말기의 여러 반란군의 세력들에는 항상 개방의 제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후 대부분 제자들은 군에 투신하고 개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개방은 몰락에 몰락을 거듭했다. 개방이 다시 부흥하려면 한명의 절대고수나 많은 수의 고수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명황실이 명화교를 견제하기 위해 무림문파들을 암암리에 지원하는 바람에 재능이 있는 자들은 개방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현문천이 움직인 방향은 하필이면 천사성이 있는 곳이었다. 천사성과 현문천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짓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에게서 동류의 느낌을 받은 둘은 굳이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머, 화산파의 천공자 아니신가요? 오셨으면 인사라도 한번 건네지 그랬어요."
- 작가의말
마지막에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소림의 중이면 대박인데 말입니다.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