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교도들이 청해호를 떠나는 모습을 확인하고 천살은 곧바로 움직였다. 미리 당무영의 언질을 받은 독혈대가 당문에 서신을 보냈기에 서무림맹의 해체는 매우 쉬웠다. 당문을 비롯해 청성과 아미가 미리 다 준비해 놓고 천살이 오자 천하에 서무림맹을 해산한다고 선포해버린 것이다.
당문을 통해 무림맹이 아직도 건재함을 알아차린 천살은 다음 목표를 무림맹으로 잡았다. 무림맹마저 해산시킨 후 다시 무엇을 할지 생각해볼 생각이다. 곧바로 떠나려는 천살을 당무영이 붙잡았다. 무림맹을 해산하는 일에 당무영이 끼어들면 이상하기에 당문은 당무영에게 가문에 남으라 명했다. 당무영은 이별주를 마셔야 한다고 우겨서 천살을 잡아두었다.
"천형, 천형은 왜 무림맹이나 마교를 해산시키려 한 것이오? 큰 힘이 큰 악을 만든다는 말은 나도 공감하는 바요. 하지만 천형이 왜 그 일을 하려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소."
천살은 술을 입안에 부어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복마전을 떠날 때 초화규의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죽여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대로 떠났다. 사도에서는 백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그때는 이자들은 죽어도 싼 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천형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오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이라서 하는 것이오?"
천살이 대답이 없자 당무영은 질문을 바꿨다. 서안에 들리기 전까지 천살은 환골탈태라도 한듯이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서안에서부터 무언가 위태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빛을 마음껏 발산하던 천살이 다시 빛을 거둔 느낌이었다. 함께 있을때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지만 막상 헤어지려니 마음에 짐으로 남았다.
"나도 모르겠소. 내가 무언가 변한것 같기는 한데 변한게 무엇인지 명확히 모르겠소. 내 눈을 가리고 있던 것들을 벗어던졌는데 내가 원래부터 눈앞을 못보는 맹인이었다는 생각이 드오."
당무영은 천살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어떻게 도울까 고민하던 당무영은 천살에게 도움이 될만한 말을 겨우 찾아냈다.
"내가 천형을 쭉 지켜본 바로는 천형은 매우 바른 사람이오. 그러니 하고싶은대로 하시오. 마음이 바른 사람이니 마음가는대로 하면 바른 일만 할 것 같소."
당무영의 말에 천살은 답답하던 마음이 많이 시원해졌다. 본인이 무언가 깨닫고 결정하는 것보다 곁에서 누가 명확히 말해주는 것이 더욱 진실되게 다가온다.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확신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천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생기자 당무영의 무겁던 마음도 많이 가벼워졌다.
'가문의 정보망을 이용해 천형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내가 여태껏 천형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구체적인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자 당무영은 자신이 천살에게 너무 무심했다고 자책했다. 수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항상 천살을 자신보다 강자라고 생각했기에 무언가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최근에 천살이 부쩍 강해진 모습을 보자 천살의 여린 마음이 대조적으로 강하게 느껴져서 이제야 무언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튿날 넉넉한 은자를 받아든 고삼은 천살과 함께 당무영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당무영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섭섭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서무림맹 소속이었던 당무영이기에 무림맹을 해산시키는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봉의 무림맹 본부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병을 핑계로 칩거하던 남궁천이 갑자기 수많은 무인들을 데리고 본부로 발길을 향했다. 곧바로 황제의 붕어소문이 들려왔고 죽기전에 황제가 무림맹의 해체를 명하는 조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궁천이 먼저 무림맹의 해체를 언급하면 무림맹의 이름으로 구매한 장원과 여러가지 건물들을 분배하는 과정에 손해를 볼것이 뻔하기 때문에 남궁천은 꾹 참고 기다렸다. 무림맹주가 무림맹 본부에 거주하는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팽가를 위수로 한 황실파들도 딱히 트집을 잡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초조해지던 남궁천의 마음은 마교의 몰락과 서무림맹의 해산소식이 연이어 들려오자 느긋하게 바뀌었다. 수하들을 시켜서 무림맹이 계속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냐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렸다. 이미 해산을 위한 준비를 다 끝냈고 무림맹의 해체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리 물밑작업을 해놓은 것이다.
매달 열리는 무림맹의 정기회의에서 남궁천이 상석에서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자 팽가의 대표로 온 팽월이 남궁천의 태도를 지적했다.
"남궁맹주께서는 무림맹의 일들이 귀찮으신가 보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더니 회의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팽대협 오해하셨소. 어차피 맹주따위는 필요없는 맹이라 가만히 있어주는게 무림맹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되어서 그랬소. 팽대협의 말을 듣고보니 이 남궁천이 생각이 짧았소. 그래서 오늘 올린 안건들은 전부 다음달로 미룰것을 맹주의 이름으로 명하오. 한달간 밤잠을 설치면서라도 이 맹주가 직접 해결방안을 찾아보겠소."
팽월은 남궁가도 명문가이니 명분을 따질 것이라는 생각에 말로 꼬투리를 잡았는데 남궁천이 막나갈줄을 몰랐다. 천살을 상대할 때 짧게 만나보았고 무림맹주가 된 남궁천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슬쩍 찌른 한마디에 육중한 쇠몽둥이로 응수할 줄은 몰랐다.
말문이 막힌 팽월을 구해준 것은 전령이었다. 운기하여 경공으로 달려온 듯 전령의 얼굴은 살짝 붉게 상기되었다.
"급보입니다. 정문에 자신을 천살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수하 한명을 데리고 맹주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맹주전으로 모시게. 회의는 잠시 중단하고 급한 일부터 처라하도록 하지."
기다리던 희소식이 오자 남궁천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냉큼 대답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경공으로 맹주전을 향해 달렸다. 남은 자들도 어쩔수없이 회의장에서 일어나 맹주전으로 움직였다.
팽월은 천살의 무림맹 방문을 금의위에게 알리기 위해 비둘기를 띄우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맹주전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남궁천과 천살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남궁대협의 인품은 이 천모가 일찍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남궁대협같은 분이 맹주로 있으니 큰 걱정은 안 되지만 몸이 불편해서 맹의 사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마교도 사라지고 서무림맹도 해산된 마당에 무림맹이 계속 이대로 있으면 천하사람들이 남궁대협이 다른 마음을 품은게 아닌지 의심할까 걱정됩니다."
"과찬의 말이오. 이 남궁천이 원래 부덕한 자라 맹의 사람들도 백안시하며 멀리하고 있소. 천소협의 말을 들어보면 무림맹도 해산하고 각자 문파와 가문으로 돌아가 생업에 열중하는게 맞지만 이 남궁천이 아무런 힘도 없어서 걱정이오."
"제가 남궁대협과 가벼운 인연도 아닌데 한번 도와드리지요. 어차피 이 천모야 아직 읽어본적도 없는 천마신공을 만들어낸 천하의 대마두가 아니겠습니까."
찻잔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살은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천살 무림맹의 해산을 명하오. 불복하는 자는 칼을 드시오. 백명이고 천명이고 다 받아주겠소."
천살의 말은 무림맹의 담장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볍게 보인 한수에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천살이 은연중에 살짝 내비친 기세는 무림맹의 모두를 무겁게 짓눌렀다.
"남궁맹주, 외인이 맹의 존폐에 왈가왈부 하는데 맹주로서 나서야 하지 않겠소?"
산동에서 온 유씨가문의 대표가 남궁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공은 겨우 고수대접을 받을만큼만 되지만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입을 연 것이다.
"힘없는 나를 윽박지르지 말고 유대협이 직접 천소협과 겨뤄보시오."
"부끄럽지만 내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본인이 잘 알고 있소. 무림맹주이자 무공이 가장 강한 남궁대협이 나서는게 맞는것 같소."
남궁천은 유백협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유대협이 나와 생사투를 한번 벌인다면 나도 천소협과 검을 겨루는 것을 고민해보겠소."
유백협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나는 남궁대협이 이 시대의 진정한 열혈남아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옹졸한 분이신줄은 몰랐소."
"이 남궁천이 열혈남아는 아니지만 옹졸함은 거리가 먼 것 같소."
"이 유모가 남궁대협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생사투를 벌이자니 그게 옹졸한게 아니면 무엇이오?"
남궁천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유대협은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이 남궁천와 검을 겨루기를 꺼려하면서 왜 나보고 자꾸 천소협과 검을 겨루라고 하는 것이오? 설마 이 남궁천이 싫어서 차도살인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오?"
말을 마친 남궁천은 천살을 한참 노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두사람의 설전을 지켜보던 천살은 대화가 일단락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더이상 반론이 없으면 무림맹을 해체하는 것으로 하겠소. 불만이 있는 분은 빨리 말하시오."
그때 서늘하고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들이 침묵하니 어쩔수 없이 이 모용부설이 한번 나서보겠습니다."
마교도 사라지고 서무림맹도 해산한 마당에 무림맹의 힘을 차지할 수 있다면 최소 무림의 반은 쥐락펴락할 수 있다. 분명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모용부설은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모용부설을 힐끗 쳐다본 천살은 고삼에게 말했다.
"나 대신 네가 상대 하거라."
천살의 명에 고삼은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향하다 뒤돌아서서 검 두자루를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모용부설이야 원래 권장법을 펼치기에 빈손이지만 고삼이 무기를 내려놓자 모용부설은 자존심이 상했다. 고삼과는 예전에 객잔에서 한번 마주친적 있지만 중요한 만남이 아니어서 모용부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고삼은 덩치가 크지만 얼굴은 앳되었다. 구레나룻을 전부 밀어버려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다. 몇년간 햇볕을 쬐지 못해서 피부가 흰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모용부설은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고삼에게 큰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고삼을 이기면 천살이 나설 것인데 혹시 자신에게 살수를 쓰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다.
은사비등(銀蛇飛騰)의 한수에 고삼이 피하지 못하고 팔뚝을 적중당하자 모용부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상대의 반응을 유도하려는 허초인데 생각보다 고삼이 둔했던 것이다. 천살은 대련에서 허둥대는 고삼을 보며 초식이 정교한 무공을 구해서 익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모용부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분명 모용부설이 고삼을 타격했지만 손해를 본것은 모용부설이다. 천양공의 기운을 해소하지 못한 모용부설은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 상대의 기운을 해소하지 못할 경우 피를 토해낼 때 함께 밖으로 배출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비록 피를 토해내는 것으로 내상을 면했지만 둘의 우열이 금방 드러났다.
극양의 내공에 횡련일기공을 대성한 고삼이기에 극음의 내공을 익힌 모용부설을 쉽게 상대했다. 모용부설은 몸을 일으켜 고삼에게 포권을 하여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여자인 모용부설이 먼저 나서자 무림맹의 고수들의 마음속에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소협은 무림맹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이 무엇이오."
장내의 분위기가 큰싸움으로 번지려고 하자 남궁천이 급하게 나섰다. 천살의 커다란 힘이 모이면 커다란 악을 낳는다는 대답을 원한 남궁천이었지만 천살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천하에 군림하고 싶소. 하지만 사람들은 단체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잘 착각하더군.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미리 손을 쓰는 것이오."
천살이 남궁천을 대하는 말투가 변했지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군림천하라는 광오한 네글자가 모두의 집중력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다음에는 초반에 글을 천천히 써야겠습니다. 그래야 댓글들의 의견에 따라 미리 방향을 바꿀 수 있죠. 하루에 15000자 이상씩 쓰고 제가 원래 또 진행을 빠르게 하다보니 댓글로 의견을 제출해도 수정이 막막합니다. 느림의 미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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