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자승지
강사성의 참열한 죽음에 초영란은 겁을 먹었다. 사람을 처음 죽여본 것은 아니다. 사기진작의 이유로 전선에 투입된 적이 여러번이고 직접 목숨을 취한것도 여러번이다. 그때마다 항상 강사성이 초영란을 지켜주었다. 초영란의 목숨을 위협할만한 상대는 없었지만 얼굴이나 몸에 생채기라도 날까 걱정되어 강사성에게 부탁하였고 강사성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런 강사성이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건장하던 몸은 마른 시체처럼 홀쭉하게 변했다. 내부부터 타면서 몸의 수분이 많이 빠져서 엄청 왜소하게 보였다. 가죽만 뼈를 덮었다는 말로 마른 사람을 표현하는데 강사성의 시체가 딱 그 꼴이다.
"초사매, 정신 차려. 화운의 시체를 불태워버려."
초영란은 선우검파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화운의 시체위에 널부러진 강사성의 시체를 발로 밀어제끼고 화운의 시체를 끌고 갔다. 남아있는 빈 나무집 가운데 하나에 화운의 시체를 넣은 다음 장작을 집안에 던져넣기 시작했다.
"초영란, 정신 차려라. 선우검파는 너에게 화운의 시체만 태우라고 했다. 네 대사형은 난화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사성의 시체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사진군의 비아냥에 초영란은 동작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초영란의 눈은 총기를 잃고 있었다. 자신은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냉정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평소 가장 가깝게 지내던 강사성이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가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선우검파가 화운의 시체만 언급한 것은 사진군을 흔들기 위한 것이다. 오직 그 목적만 있기에 화운의 시체만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군은 교활하게 그점을 물고 늘어지며 초영란을 흔들려고 하고 있었다. 셋만 남은 상황에서 초영란은 갑자기 가장 큰 변수가 되어버렸다.
"초사매, 사진군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침착하게 생각해. 내가 사라지면 사진군은 초사매를 제거할 것이야. 사진군의 유일한 약점이 될테니 말이야."
"선우사형이 부럽소. 선우사형이야 가문의 위세가 대단해 초사매를 제거하지 않아도 큰 걱정이 없지만 가문이 보잘것 없는 이 사진군이야 당연히 초사매를 제거해 일말의 위험이라도 없애야 하지 않겠소."
사진군의 비꼬는 말에 초영란은 한번 더 흔들렸다. 가문의 세력이 약한 선우검파는 초영란을 제거해야 한다. 초영란이 진실을 말하기라도 한다면 선우검파는 만회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사진군은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여 초영란이 입을 열더라도 모함으로 몰아갈 수 있기에 초영란을 살려둘 가능성이 더 높다.
"초사매, 우리 가문은 힘이 부족해서 초사매의 도움이 필요하오. 사씨 가문이야 명분만 빼면 교주자리를 차지하는데 아무 걸림돌도 없소. 잘 생각해 보시오."
다급했는지 선우검파의 말투가 바뀌었다. 초영란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자신이 이 둘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강사성의 죽음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진 것이다.
"초사매, 잘 생각해. 선우검파가 소교주가 되면 한화령과 혼인을 해야 할 것이야.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어. 네가 내편에 서준다면 나는 너를 정실로 맞이할 것이다."
사진군의 초강수에 선우검파는 답답해졌다. 사진군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공격에 힘을 한층 더 실었지만 구유음풍선의 신법은 선우검파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내공의 사용이 보다 자유로워지자 초식은 엉성하지만 전체적인 무위가 높아졌기에 예전처럼 쉽게 공격을 적중시킬 수 없다.
"장우민과 강사성의 시체를 불태워, 그리고 화운의 시체를 남기면 우리는 사형제를 살해한 선우검파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죽이게 된 거야. 장우민과 강사성을 죽이고 불태운 후 화운을 죽이는 선우검파를 초사매가 발견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알리고 우리는 힘을 합쳐 선우검파를 죽인 것이지."
사진군은 초식수련이 부족하여 공격이 힘들어지자 아예 공격을 포기하고 신법으로 선우검파의 공격을 피하는데만 전념했다. 사진군이 공격을 포기하자 선우검파는 사진군의 입을 막을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초사매에게 반하게 되었어. 백일 되는 날 교주와 모든 장로의 앞에서 나와 초사매가 백년해로를 맹세했음을 밝히겠어."
결국 참지 못한 선우검파는 입을 열었다.
"초사매, 나라면 우선 장우민의 시체를 어딘가에 숨기겠소. 장우민의 시체를 태워버리면 초사매가 무엇으로 이 망나니를 제어한다는 말이오."
"초사매, 천살이 죽지 않았다.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장우민의 시체를 가지고 멀리 가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선우검파의 말에 반색하던 초영란은 사진군의 말에 겁을 먹었다. 작년 비무에서 천살의 무자비한 검을 경험한 후 천살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신화동에 들어온 이튿날 천살이 화운의 방향으로 향했으니 말이지 자신의 방향으로 향했다면 겁이 나서 피해버렸을 것이다.
큰 것을 노리는 자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큰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선우검파의 말에 따라서 장우민의 시체를 숨겨두고 초영란 본인도 숨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교주와 장로들의 앞에서 사진군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면 장우민의 죽음을 덮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장우민의 시체로 사진군을 압박해야 한다.
만약 선우검파가 사진군을 죽이더라도 장우민의 시체가 필요하다. 가문의 힘이 부족한 선우검파는 자신이 사진군을 죽인데 대한 정당성을 장우민의 시체로 증명해야 한다. 화운의 시체는 선우검파 본인에게 불리하기에 태워버려야 하고 강사성의 시체는 초영란과 협상하기 위해 남겨두던지 초영란을 안심시키기 위해 태우던지 해야 한다.
초영란에게 현재 가장 좋은 선택은 장우민의 시체를 가지고 잠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초영란은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았다. 강사성의 시체를 장작더미위에 놓고 불을 붙인 후 초영란은 장우민의 시체가 있는 방에 장작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두 사형은 저를 설득해야 할 것이예요. 저를 제대로 설득하시면 저는 한쪽에 불을 지르고 다른 한쪽의 시체를 지킬 거예요."
선우검파는 초영란의 멍청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사진군을 베어버리고 초영란의 사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최선은 초영란이 장우민의 시체를 가지고 잠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 화운은 선우검파가 죽인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체를 잘 살피면 다른자가 덤터기를 씌우려 했다는 증거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장우민은 소음공이 확실하다. 사진군의 소행인지 제삼자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장우민의 시체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선우검파에게도 최선이고 초영란 자신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다. 선우검파와 사진군 둘중 누가 살아남든지 초영란은 최고의 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선이 안되면 차선이 있다. 차선은 초영란이 화운의 시체를 가지고 잠적하는 것이다. 화운의 시체를 가지고 사라지면 선우검파에게 역시 유리하다. 선우검파는 장우민의 시체가 훼손되지 않게 지키고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초영란이라는 변수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선우검파는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원래 선우검파는 사진군을 제거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사진군을 죽이기 쉽지 않음을 느끼고 차선으로 사진군을 장우민을 죽인자로 몰아갈 생각이다. 이 계획의 맹점이라면 모든것을 기획한 자의 속셈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자의 속셈과 맞아떨어져야 선우검파가 사진군을 제치고 소교주가 될 수 있다.
최악은 바로 지금이다. 초영란을 설득할 밑천은 선우검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설픈 거짓말을 하면 오히려 초영란의 마음이 돌아설 것이다. 문제는 초영란에게 줄수 있는게 많은 사진군에 비하면 선우검파는 줄게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열세임을 인정한 선우검파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사진군을 향해 육양회수(六陽會首)의 초식을 사용한 것이다. 사진군으로도 처음 보는 초식으로 여섯개의 공격이 동시에 머리로 향하자 궁유극미(窮幽極微)의 회피법을 사용했다. 사진군의 몸은 하늘거리는 민들레씨처럼 선우검파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때 몸을 돌린 선우검파는 초영란을 향해 덮쳐갔다. 초영란이라는 변수를 제거한 후 초영란과 사진군이 연수하여 장우민과 남은 자들을 제거했다고 우길 수밖에 없다. 강사성의 시체가 불탄것이 안타깝지만 남아있는 시체에서라도 난화지의 흔적이 발견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장작이 부족해서 강사성의 시체는 절반도 타지 않을 것이다.
초영란은 둘이 자신을 설득하기를 기다렸지 자신을 제거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멍청하게 굳어있는 초영란을 구한 것은 사진군이었다. 후예사일로 초영란을 덮치는 선우검파를 등뒤에서 함소구유(含笑九幽)의 초식으로 공격했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죽어서도 웃는다는 은밀하기 그지없는 살초이다.
소음공의 내력이 등으로부터 빠르게 밀려들자 소양공의 기운이 대항했다. 하지만 사진군의 후속타가 등뒤로부터 선우검파의 심장을 가격했다. 초영란 때문에 분심하는 바람에 선우검파는 강하기 그지없는 무공을 가지고도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소음공을 연속으로 운용한 사진군은 초영란을 바라보며 혈도들을 안정시켰다. 극음지기가 경유한 혈도들이 자신을 지키려고 날뛰는 것이다. 혹시 자신을 공격할까 걱정되어 두눈을 초영란에게 떼지 않았는데 초영란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초영란의 옷들이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초영란은 알몸이 되었다. 부끄러움에 빨갛게 물든 얼굴과는 달리 초영란의 몸매는 매우 도발적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과 잘룩한 허리, 허리아래로 급격히 넓어지는 골반은 사진군의 음심을 동하게 만들었다. 적지 않은 여인을 안아보았으나 맹세코 이토록 사진군을 흥분시킨 여자는 없었다.
초영란은 몸을 뒤돌리더니 두손으로 뒷짐을 졌다.
"사형이 저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제 손을 뒤로 묶으세요."
무공을 수련해서 초영란의 어깨는 일반 여자들보다 넓다. 그 넓은 어깨에서 밑으로 내려오다 허리에 이르면 갑자기 좁아진다. 잘룩한 허리에서 더 내려오면 갑자기 어깨보다 더 넓은 골반이 나타난다. 토실토실한 엉덩이 살을 보며 사진군은 초영란을 마음껏 범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뒤에서 두손을 묶는 사진군의 호흡이 거칠고 두손이 덜덜 떨리자 초영란의 얼굴에는 득의의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한화령과 명화교의 이대미녀로 불리지만 교주의 딸이 아니라면 초영란의 미모가 한화령의 위에 놓였을 것이다. 사진군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자신의 미색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사진군은 소음공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호흡이 정돈되지 않고 두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무공이 자신보다 강한 선우검파를 죽인 흥분, 장우민과 화운의 죽음 그리고 불타고 있는 강사성의 시신, 소교주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이 얼버무려져 사진군의 음욕을 한껏 부추겼다. 손을 등뒤로 묶인 초영란이 몸을 천천히 돌리는 것을 감상하며 사진군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선우검파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끝까지 남은자가 승자요, 대사형.'
- 작가의말
剩者勝之, 남은자가 이긴 것이다. 중국어에서 남을 잉자와 승리 승자가 발음이 같습니다. 둘다 썽으로 발음합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설명이 필요하군요.
생각보다 둘의 싸움이 길어져서 다음 화에 본격적인 묘사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개연성이 아직 죽기 전이라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을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전부 천살의 무위가 낮은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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