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개시
천살은 개봉의 가장 큰 대장간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천살정도의 경지에서 땀을 흘리기란 매우 힘들다. 육체와 정신의 능력을 거의 끝까지 끌어내야만 가능하다. 천살은 정련용 망치로 음혈을 두드리면서 음혈에 배인 혈기들을 제거했다.
일원의 도움을 받아 이미 완성된 음혈을 다시 정련하니 검신이 보다 하얗게 변했다. 음혈 표면에 나있던 무늬들도 전부 사라졌다. 며칠의 노력끝에 음혈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천살은 음혈이 한층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군림(君臨)이다."
음혈을 군림으로 바꾼 뒤 천살은 고삼의 검도 정련했다. 기술과 지식은 당무영보다 부족하지만 천살은 본능적으로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기에 오히려 선대의 지식을 물려받은 당무영보다 나았다. 이틀의 시간이 지나자 검보다는 몽둥이 같았던 고삼의 쌍검이 검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날을 세우지 않았지만 외형상으로 둔검에 가깝게 된 것이다. 거기에 무게가 전혀 줄지 않았기에 몽둥이처럼 사용하는데도 문제가 없다.
"대형, 제 검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고삼은 조금 더 무겁고 긴 검을 오른손에 들고 손가락 반마디정도 짧고 무게가 살짝 더 가벼운 검을 왼손에 들었다. 왼손과 오른손의 근력이 조금 차이가 나기에 검의 무게가 조금 다른것이 오히려 더 균형적이었다.
"오른손의 검은 발산(拔山)이라 하고 왼손의 검은 개세(蓋世)라고 하자."
고삼의 늠름한 모습을 보던 천살은 역발산 기개세의 초패왕 항우가 생각났다. 그래서 고삼의 검에 발산과 개세라는 이름을 들아주었다. 고삼은 천살이 지어준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이 비무일이구나. 큰 싸움을 치뤄야 할지도 모르니 어디가서 배부터 불리자."
천살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외모와 행색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거기에 명현공을 익힌 천살이기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싶지 않으면 누구도 주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천살이 객잔에서 음식을 시켜 먹었지만 누구도 천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고삼도 천살과 함께 다니면서 이미 적응했기에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대형, 소문이 이상하게 퍼졌습니다. 잘못된 소문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염소수염과 애꾸의 대화를 들은 고삼이 말을 걸자 천살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 나는 세력을 이룰 생각이 없기에 명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게 아니라 순리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기에 굳이 힘을 쓰는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당무영과의 대화이후 천살은 심경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버렸다. 자신 역시 이 세상의 일부이기에 자신의 바른 행동으로 인해 무언가 뒤틀린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당무영의 격려에 자신의 결정에 자꾸 의심하던 습관도 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저렇게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좀 아닌것 같습니다."
"저 자들이야 그저 물고기의 편린만 본 자들이니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게 당연한 것이다. 이는 어리석음과 현명함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니 너무 가슴에 두지 말거라."
대화를 중단하고 음식을 입안에 쓸어넣던 천살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혹시 저자들처럼 편린만 보고 호매령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부러 십일뒤로 정한것은 검을 손보려는 생각도 있지만 십일뒤에 화산에서 사람이 오는지 안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음혈이야 언제든 시간을 내서 손볼수 있고 굳이 내일 비무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에 십일이라는 기한은 화산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림맹의 일을 끝내고 바로 화산에 가서 호매령을 만나보자. 외면한다고 진실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편린만 보고 혼자 가슴을 앓을것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한 후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
가슴속에 쌓였던 것들을 털어내자 천살은 마음이 후련해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무림맹을 도발하고 비무를 할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심술이었다. 더 부드럽게 처리할 수도 있는데 굳이 과격적인 방법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자신이라고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법이 없다. 부족한 혹은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은 무마할 힘을 가지고 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가기전에 돌아서면 된다.
고삼은 천살의 얼굴이 많이 펴이자 속으로 안도했다. 작별할 때 은자를 건네며 당무영이 천살에게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으니 잘 살펴보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고삼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다행히 천살의 근심걱정이 한순간에 날아간 것 같아 그저 기쁘기만 했다.
날이 밝자 옷을 차려입은 둘은 무림맹으로 향했다. 무림맹의 가장 큰 연무장에는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십일의 시간동안 무림맹은 가능한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황실의 고수들도 팽가나 유가의 무인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천살과의 대결에 참여할 준비를 마쳤다.
천살은 연무장에 들어선 후 천여명의 사람을 둘러보았다. 조자운과 호매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한결 놓이는 느낌이었다. 천살이 태연한 기색으로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는 모습에 자리한 일부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같은 편임에도 감히 쳐다보기 두려운 고수들이 즐비한데 그들을 상대해야 할 천살의 태연함에 기가 질린 것이다.
예전의 음혈은 살기가 너무 강해 금속으로 된 칼집을 사용할 수 없어서 가죽으로 칼집을 만들었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군림은 살기가 사라졌기에 개봉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가 좋은 철과 황동으로 멋진 검집을 만들어 주었다. 천살은 군림을 뽑아든 후 검집을 고삼에게 건네고 연무장 중간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다시 한번 규칙을 말씀드리겠소. 이번 비무는 한가지 제한이 있소. 바로 한번 도전했던 자는 다시 도전할 수 없소. 만약 두번째로 도전해 온다면 검에 사정을 두지 않겠소. 그리고 이각동안 도전자가 없으면 내가 이긴것으로 하겠소."
천살의 말이 끝나자 남궁천이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나섰다. 자신이 먼저 나서서 패하면 나서는 자들이 얼마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살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숨길 수 있다. 그리고 남궁가는 천살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세력을 키워가고 무림맹의 재물과 자산들을 분배할 때도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다. 이번 일을 마무리하고 가문의 호법 자리에서 내려와 무공수련에만 전념할 생각이기에 이번 일은 최선을 다해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남궁천은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다. 아직 대성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문턱까지는 다다른 절정검이 천살의 요해를 강해 무자비하게 쏘아졌다. 날렵하게 찔러오는 남궁천의 육중한 일격을 천살은 똑같은 찌르기로 응수했다. 무수한 변화를 품고 찔러오는 남궁천의 검끝이 천살의 검끝과 부딪히자 우레소리와 같은 굉음이 울려퍼졌다.
뒤로 세걸음이나 물러선 남궁천은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천살의 내공의 경지는 자신을 훨씬 초월하여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무공과 초식은 자신이 조금 낫거나 최대한 양보해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의 일수에서 천살은 아주 적은 내공만 사용했다. 전력을 다한 남궁천을 약간의 내공만 이용해 무공으로 뒷걸음질치게 만든 것이다.
'나 따위는 열명이 와도 상관이 없구나. 격차가 너무 커서 무언가 배울것도 없다.'
남궁천은 검을 반수로 쥐고 천살에게 포권을 올렸다.
"손속에 사정을 둔것에 감사하오. 오늘 이 남궁천이 천소협에게 목숨 하나 빚졌소."
남궁천이 일합만에 패배를 인정하자 장내의 분위기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 자리에 남궁천의 일검을 받아낼만한 자가 스물이 넘지 않는데 그런 남궁천이 일합만 겨루고 패배를 인정했다. 남궁천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사람들은 그제야 천살의 무위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팽가의 호위대요. 부족하지만 천소협의 검을 견식하고 싶소."
그 상황에 나선것은 팽가의 무인으로 가장한 금의위였다. 도를 사용하는 자들은 팽가의 무인으로 검을 사용하는 자들은 유가의 무인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열여덟명의 금의위는 천살을 포위한 뒤 진법을 발동시켰다.
소림의 소나한진을 참조하여 만든 이 진법은 제압에 중점을 둔 소림의 나한진과는 달리 살상에 중심을 두었다. 개개인의 무공은 부족하지만 여러가지 암기와 독 그리고 휴대가 간편한 기관들을 몸에 지니고 무수한 훈련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것처럼 긴밀하게 움직이기에 진법의 위력이 약하지 않다.
진법을 펼치자 곧바로 천살을 향해 암기들이 날아갔다. 천살은 군림을 가볍게 휘둘러 자신을 향하는 암기들을 전부 가루로 만들었다. 힘이 약하거나 강하면 암기들이 튕겨나갈턴데 적당한 힘으로 가격하고 검과 암기가 닿는 순간 발경으로 암기를 부숴버렸다. 육체와 내공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주었지만 장내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되었다.
곧 여덟명이 도를 세우고 천살을 향해 덮쳐갔다. 천살이 군림으로 여덟개의 도를 잘라버리자 후퇴하는 여덟의 소매에서 수전(袖箭)이 천살을 향해 발사되었다. 화살끝이 검푸른 색을 띤 것을 확인한 천살은 검끝으로 화살들을 톡톡 건드렸다. 여덟개의 수전은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서 수전을 쏘아낸 자들에게 쏘아졌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수전이 어깨에 박히자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급히 해독약을 먹였지만 독성이 강한 독이라서 그 고통이 오래갔다. 상대가 독을 사용하자 천살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이들의 팔 하나씩 더이상 쓸수없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열여덟이 팔병신이 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투입한 자들인데 오히려 분위기를 더 무겁게 바꾼 것이다. 그때 서문고검이 앞으로 나섰다.
"천소협, 지난번에도 이 늙은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나이 먹으니까 염치가 사라져서인지 또 나서게 되었소.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너그럽게 생각해 주시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다. 서문고검은 몇년간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의 한끝을 잡고 있는데 그 다른 한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다급함에 노구를 추스려서 천살의 앞에 선 것이다.
"노선배께서 내가 무공도 모르는 아이일때 장차 천하제일검이 될 것이라 예언하셨소. 오늘 선배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천하에 증명해 보겠소."
서문고검이 검을 들기도 전에 천살은 서문고검을 향해 세번의 찌르기를 시전했다. 첫번째는 빠른검, 두번째는 빠르고 강한 검, 세번째는 빠르고 강하면서 변화까지 포함한 검이었다.
천살이 검을 거두자 서문고검의 감긴 두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첫번째 검에서 두번째 검으로 향하는 길을 천살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또다른 경지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만 목적지를 모르면 방향조차 잡지 못한다. 명확한 목적지를 알기에 언젠가는 무적의 쾌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고맙소. 천소협의 은혜 서문가 대대로 잊지 못할 것이오."
서문고검이 검 한번 내밀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자 장내는 침묵에 빠졌다. 금의위의 책임자 벽휘동이 머리를 싸매고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 자그마한 인형 하나가 천살의 앞에 다가갔다.
"지난번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도 염치불고하고 한번 더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 작가의말
주체가 살아 있었으면 어명에 의해 무림맹이 해산할 것입니다. 그러면 천살이 무공자랑할 기회가 사라집니다. 주인공 무공자랑을 위해 일국의 황제를 죽이는 스케일. 거기에 실제로 주체는 북원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객사했습니다. 역사고증 철저히 하는 치밀함. 그리고 구상중인 다음 무협은 쾌검과 관련된 것입니다. 쾌검의 경지에 대한 떡밥을 미리 던지는 준비성.
다음 무협을 쓰기 전에 판타지나 게임물 등으로 필력을 다듬을 생각입니다. 딴세계 이야기인 무협보다 공감이 더 쉬운 판타지나 현대물 등으로 필력을 좀 더 끌어올리고 준비 되었다 싶으면 다시 무협에 손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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