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랑분분
조유천은 망설임을 버리고 연화봉으로 올라갔다. 봉문이라는 것은 화산의 사람들이 화산에서 내려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화산을 제외한 곳에서 무공을 사용하면 안되고 강호에서 화산의 이름으로 일을 벌이지만 않으면 된다. 찾아오는 손님도 거절하지 않는다.
화산의 산문을 지키던 제자는 조유천을 공경한 태도로 대하며 태상장로님이라 존칭했다. 한다리로도 충분히 걸을 수 있지만 뜀질을 해야 하기에 보기 흉하다. 그래서 조유천은 지팡이 하나를 마련했다. 지팡이가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유천의 귀에 거슬렸다.
호군천이 장문인의 자리를 내놓았고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기에 조자운이 대리 장문인을 맡고 있었다. 조유천은 조자운의 얼굴을 보기가 좀 그랬지만 중대한 사안이라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너를 볼 얼굴이 없다만 무당과 종남이 화산을 멸문시키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다. 혹시 따로 얻은 정보는 없는 것이냐?"
조자운은 마음의 정리가 끝났는지 의연한 태도로 조유천을 대했다.
"태상장로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속가들이 많이 떨어져나가서 정보가 별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걸 말씀드리면 마교의 한선후가 직접 수하들을 거느리고 개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관과 군에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을 보면 황실과 미리 협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유천은 한선후가 직접 움직였다는 말에 크게 놀랐다.
"혹시 그 무리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느냐?"
"대놓고 움직인 자들을 보면 절반 이상의 전력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밖에 나왔기에 첩자들이 정보를 남기기 용이해서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장로라는 자의 세력과 교주의 세력이 거의 전부 동행했고 기타 세력들은 없습니다."
"천살의 소식은 없더냐?"
"이상한게 천살의 호위대라는 자들이 교주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천살 본인은 종적을 감춘지 한참 되었다고 합니다."
조유천은 무언가 변고가 있음을 확신했다. 십중팔구 천살이 교주에게 당한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제자들은 교주와 함께 하고있지 않으니 어떻게든 찾아가서 설득해야 한다. 가능한 많은 자들을 설득해 화산을 도와야 한다.
"나는 가서 최대한 구원병을 모아올테니 너는 무공이 강한 속가제자들만 화산으로 불러들이거라. 모든 제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강적의 출현에 대비하거라."
조자운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태상장로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갔다 다시 들어온 조자운의 손에는 나무를 깎아만든 가지(假肢 - 가짜 다리)가 들려 있었다.
"눈대중으로 만든거라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솜씨라 웃지만 말아주십시오."
조유천은 가지를 받은 후 경공을 시전해 뜀질로 연화봉을 최대한 빠르게 벗어났다. 눈에 맺힌 눈물을 보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잘린 다리를 가지에 대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처음에는 다리가 자꾸 가지에서 빠져나와 불편했지만 요령을 습득하자 경공을 사용해 비교적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한편 무당파에서 송백자가 몇몇 장로들을 불러놓고 화를 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게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소? 마교와 무림맹이 싸움이 붙어버리면 이 계책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이오."
송백자는 화산을 멸문시킨 후 마교의 소행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놓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마음이 맞는 몇몇 장로들에게 언질을 주어 종남과 협상하고 은밀히 준비하게 했다. 화산이 멸문 당하면 무림맹과 눈치만 보던 강호문파들의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거기에 서무림맹도 마교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송백자는 무림맹을 개봉에서 화산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주장할 생각이다. 화산파의 재건을 도와주고 마교의 도발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명분이 있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때 종남이 예전에 받은 화산제자들이 자연스럽게 화산파의 명맥을 이어받고 시기가 성숙될 때 종남과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하지만 준비가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마교가 갑자기 수백의 무인들을 움직였다. 송백자는 혹시 한선후가 머리가 돌아서 화산을 공격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한선후는 다른 길을 선택했고 목적지는 개봉이었다. 요행을 바라고 잠시 늦췄던 준비를 부랴부랴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정보가 진운도사에게 새나간 것이다.
마교와 무림맹이 붙기 전에 화산을 멸문시켜야 한다. 그리고 마교의 성동격서라고 주장하며 강호의 협사라고 자칭하는 멍청이들이 무림맹의 편에 서게 해야 한다. 무당과 종남이 강력히 마교의 짓이라 주장하고 무림맹도 무당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조사도 없이 마교의 짓이라고 단정지을게 뻔하고 조사를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대충 할 것이다.
만약 마교와 무림맹이 이미 싸움을 시작한다면 전장은 아마 개봉이나 그 인근이 될 것이다. 그러면 화산을 멸문시키더라도 무림맹을 옮기자는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무림맹의 뒤에 숨어 실력을 보전하려는 계획이 실패하는 것이다. 오히려 마교가 화산에 자리를 잡아버릴지도 모른다. 무당와 화산의 거리는 팔백리가량밖에 안 되어 이틀정도 눈속임에 성공하면 기습이 가능하다.
"마교가 하루에 이십리에서 사십리씩 움직이고 있소. 개봉까지 가려면 한달은 더 걸릴테니 좀 더 확실하게 준비하는 것이 맞소."
송백자는 숫자놀음을 하는 사제가 갑갑했다.
"그러다 갑자기 속도를 높이면 어떡하겠소? 그리고 화산의 멸문이 무림맹에 전해지는 시간도 있고, 나도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것처럼 하고 황급히 무림맹을 향해야 하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도 실패할지 모르는데 시간이 이토록 촉박하면 협상할 때 더 많이 양보해야 한다는 말이오."
무림맹에서도 회의가 한창이었다.
"마교의 무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자기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시오. 목적지가 개봉임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진짜 유람이라도 온 것처럼 하루에 이십리에서 사십리씩 이동하는 진의가 무엇이라 생각하오?"
서문세가의 서문고검이 술 한병 들고 한선후를 찾아갔다. 뭐하러 왔냐고 묻자 한선후는 중원의 풍광이 그리웠는데 개봉에 볼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나왔다고 말했다. 서문고검은 검을 나누러 갔다가 한선후의 기도에 비무를 포기하고 술잔만 나누고 돌아섰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관과 군에는 미리 마교의 무리와 마찰을 빚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는 황실과 마교 사이에 뭔가 거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거래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실의 정보를 무슨 수로 캐낸단 말이오? 내 생각에는 서문노가주가 비무를 포기할 정도로 한선후가 강해졌으니 무력시위 한번 하려는 것 같소."
"나는 생각이 다르오. 천살마성이 종적을 감춘게 의심스럽소. 한선후가 대놓고 움직이니 성동격서가 의심되오."
"마교의 목표가 따로 있다는 것이오? 하지만 지난번 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소? 마교가 한선후가 데리고 온 수백의 무인들을 제외하면 어딘가를 도모할 힘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오."
"숨겨진 힘이 있다면 어쩔겁니까? 무림맹 차원에서 첩자를 심은게 몇년 안 됩니다. 그전에 어느 문파가 마교에 첩자를 심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만약 그전부터 다른곳에 숨겨놓은 힘이 있다면 겨우 소문이나 들어오는 첩자들이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습니까."
"마교가 숨겨둔 힘에 천살마성이 합쳐져서 무당을 기습할 정도가 된다면 서무림맹의 힘까지 합쳐야 겨우 마교와 비슷하게 싸울 수 있소. 생각만 해도 끔찍하오."
"새로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 마교 교주 한선후가 최근 천신공이라는 무공을 창안해 냈다고 합니다. 천신공은 상대의 몸안에 내공을 주입해 무위를 상승시켜준다고 합니다. 외공만 익힌 삼류수준의 무인을 일류의 위력을 가진 고수로 바꾸어 주었답니다."
"젠장, 천신공은 무슨. 천마공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무림맹에서 탁상공론에 한창일 때 한화령은 강물을 따라 흐르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배가 살짝 부풀어 올랐지만 거동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단지 조금 차가운 강바람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천살 그 개자식은 어떻게 괴령의 손에서 도망쳐나온 것이고 여기는 또 어떻게 찾아온거냐?"
천살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한화령은 괴령의 이혼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한선후가 자신의 계획을 딸에게 일일이 말해주는 자상한 부친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살을 보고도 괴령인줄 알고 한화령이 접근했다면 천살은 네개의 족쇄중 하나를 가볍게 부쉈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부친의 본대에 합류해야겠다. 사도도 위험해."
천살은 어렵게 어렵게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 가서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교주가 자신을 불렀던 곳을 찾아낸 후 기억력을 더듬어서 그날의 경로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교주가 일부러 길을 좀 에돌았기에 그 경로가 다소 이상했다. 천살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줄 알고 주변을 돌며 확실히 기억이 나는 지형을 찾으려 했다.
조금은 늦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찾아왔다. 다만 불행하게도 지형을 확인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발견되었고 천살이 도착하기 전에 한화령이 도망을 가 버렸다. 물론 천살은 한화령이 이곳에 있는것을 몰랐기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한화령의 뒤를 이어 교주의 수하들은 중요한 자료들을 챙겨서 도망갔다. 천살이 도착했을 때는 타버린 재와 텅텅 비어버린 집들만 있었다. 여기저기 뒤졌지만 이런 방면에 소질이 없는 천살이라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최근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듯 방이 깨끗하자 늦기전에 사도로 향하자고 마음먹었다.
청해호에 도착해서 몸을 숨긴 후 밤이 되기를 기다린 천살은 어두워지기 무섭게 잠영으로 사도로 향했다. 수영따위 배워본 적은 없지만 완성에 이른 육체는 본능적으로 가장 정확한 자세로 천살의 몸을 움직였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뭍으로 올라가 내공을 돌려 옷을 말린 뒤 명현공을 사용해서 자택으로 향했다.
자택에는 고삼도 없고 연화훈도 없고 호위대도 없었다. 총관 한명에 하인과 하녀들만 있는 것을 확인한 천살은 교주전과 선우복명의 장원중 고민하다가 선우복명을 먼저 찾기로 했다. 지금 교주전에 가서 교주와 싸우면 선우복명은 교주의 편에 설 수도 있다. 자신이 교주위를 탐내 반란을 일으키는 것 같기 때문에 선우복명이 선뜻 자신의 편을 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선우복명을 찾아 진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선우복명이 자신을 배신하고 교주의 편에 선다면 본전이고 선우복명이 자신을 돕는다면 이득인 것이다. 천살은 자신의 옷과 신발을 챙겨 갈아입은 후 선우복명의 장원으로 향했다.
선우복명의 방에 도착하니 선객이 있었다. 둘의 대화를 엿들으려던 천살은 선객이 조유천임을 알아채고는 반가움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유천 역시 천살 못지 않게 반가웠던지 벌떡 일어서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소교주, 이 늙은이가 이렇게 빌겠소. 제발 화산을 구해주시오."
- 작가의말
巨浪分奔, 큰 파도가 각자 달린다. 파도가 사방으로 마구 몰아치는 모습을 말합니다. 평소 말하는 의견이 분분하다는 紛紛 입니다. 저 때문에 헷갈릴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어제부터 문피아가 좀 시끄럽네요. 그래서 천마의 다섯번째 제자는 외국인으로 결정했습니다. 이름이 joo(쥬), 오마 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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