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수련
밀사들을 만나고 침소로 돌아온 숙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교의 자객이 이미 왕부에 침투했다고 하는데 최근 왕부에 인원변동이 없었다.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잠입해 있었다는 뜻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자가 없었다.
밤이 깊어 잠을 청하려고 옷을 벗는데 품속에서 종이 한장이 떨어졌다. 펼쳐보니 지불강자지불달(志不强者智不達) 언불신자행불과(言不信者行不果)라고 적혀있었다. 뜻이 굳세지 않으면 지혜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마교의 마지막 경고라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탁자나 침상에 올려놓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자신의 품속에 서신을 넣었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암살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연왕의 서신이 아니었으면 무슨 영문인지도 까맣게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귀한은 숙주위에 소속된 군관이다. 조정에서 정삼품의 관직을 맡고 있는 백부를 믿고 방약무인하게 지내다가 숙왕에게 밉보여 한직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뭔가 변화가 생겼는지 숙왕이 갑자기 불러다가 술을 따라주며 잘 지내보자고 화해의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며칠 뒤 숙주위에서 군량을 서녕위로 옮기는 일을 맡게 되었다. 천명의 군사와 함께하기에 산적이나 마적들이 감히 넘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머무는 현성에서 쏠쏠한 부수입도 챙길 수 있어 얼굴에 꽃이 피었다.
성격이 더러운 조귀한이지만 군량을 인계하는 장소에 약속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은 서녕위의 군사들을 탓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서녕위까지 군량을 다 옮기고 싶었다. 보통 군량을 넘기는 쪽은 떼먹지 못한다. 받는 쪽에서 눈감아주지 않으면 인계수량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받는 쪽은 인계를 완성한 후에 얼마든지 군량을 착복할 수 있다.
군량 착복은 일반 군관이 해낼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걸 해내려면 서녕위를 책임진 위장정도는 되어야 한다. 조귀한은 자신의 언변과 배경으로 서녕위의 위장을 설득할 자신이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여기까지다. 서녕위의 군사들이 늦게 나타나면 조귀한은 그걸 빌미로 트집을 잡아 작은 이득이라도 챙길 궁리로 가득했다.
멀리에서 기병과 보병이 혼합된 군대가 나타나자 조귀한은 아쉬움을 느꼈다. 많이 늦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이정도 시간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연히 늦을 수 있는 시간이니 트집거리가 되지 못한다. 상대 책임자에게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어낼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군량을 운송하는 마차를 지키던 병사들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다시 다가오는 군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복식이 이상했다. 깃발의 글씨를 살펴보니 성화(聖火)라는 두글자가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든 조귀한은 급하게 자신의 말을 찾았지만 온데간데 없었다. 마차에 묶인 말을 풀어내려 했지만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일이라 마음만 급했지 풀어낼 수가 없었다. 몸을 돌려 두다리로 도망치려니 멋부리려고 입은 갑주가 거치적거렸다.
"명나라 군관 한놈 포로했습니다. 그냥 죽일까요?"
조귀한은 자신의 덜미를 잡은 자의 말에 오줌을 찔끔했다. 하지만 곧장 들려오는 소리에 안심했다.
"살려둬라. 중요한 자면 포로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은자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밧줄에 꽁꽁 묶인 조귀한은 두눈이 검은 천으로 가려졌다. 아마 자신을 마교의 총단으로 압송하려는가보다 생각한 조귀한은 긴장이 풀리며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며칠동안 매일 술과 고기에 파묻혀 살고 낮에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바람에 피로가 쌓인 것이다.
매일 씹기 괴로울 정도로 딴딴한 만두를 하나씩 먹으며 며칠을 버티니 머리의 천이 벗겨졌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마교가 아닌 숙주위의 군영이었다. 두눈에 노기가 가득 찬 숙왕이 조귀한을 보며 호통을 쳤다.
"군량을 운송하는 중요한 일을 맡겼거늘 매일밤 술로 지새우고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수탈해서 원성이 하늘을 찌르게 만드느냐. 거기에 포로가 되어 군의 사기를 다 깎아먹었으니 이놈을 즉참하거라."
조귀한은 뭐라 변명하려고 했지만 옆에 시립하고 있던 병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조귀한의 눈에 한대의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조귀한이 도망을 치려고 말을 풀어내려 했던 그 마차다. 말의 생김새가 특이하여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한대의 마차를 제외하고 남은 마차들은 텅빈 상태였다. 마교 놈들이 왜 마차를 버리고 쌀만 가져갔을지 고민했지만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머리가 몸에서 떨어질 때까지 조귀한은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쌀가마니가 실린 마차는 야음을 틈타 숙왕부로 옮겨졌다. 비싼 옷들을 입은 숙왕의 심복들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가마니를 날랐다. 목과 이마에 핏줄이 선 것을 보니 보통 쌀이 아닌 모양이었다.
며칠후 조정으로 숙왕의 군무간(軍務柬)이 올라갔다. 수송하는 군량을 전부 잃어버리고 백성들을 수탈한 조귀한을 참형에 처할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숙왕의 심복중 하나가 산적들을 물리치고 일부 식량을 되찾은 공으로 관직을 하나 올려줄 것을 요구하는 간이었다.
정직한 일행은 숙왕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숙왕부를 떠났다. 숙왕부의 총관이 몰래 찔러준 두둑한 돈주머니가 넷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숙주위를 완전히 벗어나자 당무영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거의 보름되는 시간동안 긴장해서 죽는줄 알았다. 네놈들은 왜 그리 태연한 것이냐?"
"나는 장사와 사기로 단련된 것이고 고씨들은 그저 둔감한 것 같소."
왕쌍말의 말에 셋은 큰소리로 웃었다. 잠시의 시간 뒤 고삼도 소리를 내어 웃으며 동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화훈이 일행에 합류했다.
"돈주머니 받는 걸 똑똑히 보았소. 나도 한몫 챙겨줘야 할 것이오."
명화교에는 일곱번째 제자인 천살의 수하들이 숙주위에서 운송하는 군량을 털어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건의 진위를 제대로 모르는 일반교도들은 기꺼이 천살에게 환호를 보냈다. 교주도 천살의 일처리 과정을 지켜보고 평가를 달리했다.
천살은 어차피 자신이 나서도 이들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기에 수하들에게 맡겨버렸다. 이들의 계획에서 천살의 역할이 없었기에 수하들만 보낸 것이다. 하지만 교주의 눈에는 천살의 용인술이 대단하게 보였다.
"교주님, 맡겨주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선우검파는 한선후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높은 곳에 서야 더 많은것을 볼 수 있다. 갓 교주의 제자가 되었을 때보다 선우검파는 교주를 더 공경했다. 그때는 무공실력이 낮아 몰랐지만 지금 다시 보니 교주의 실력이 얼마나 까마득한지 감이 조금은 잡혔다.
"늦지 않게 잘 돌아왔구나. 갔던 일은 순조로웠느냐?"
어차피 보고를 통해 전말을 상세하게 알 것이다. 하지만 교주는 자신의 제자들을 시험하기 좋아했다. 교주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가식적이라고 생각한다. 궁지에 몰리거나 위급한 상황에만 본성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평소에 대화를 통해 제자들의 평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하더라도 한번 대답을 잘못하면 평가가 뒤바뀔 수 있다.
"녕왕과 녕왕비 및 왕세자를 공손히 모셨습니다. 세분 다 어떠한 불쾌감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타안(朶顔)삼위를 얻은 연왕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것과 같아서 삼년안에 황권을 차지할 듯 합니다."
연왕 주체의 북평군이 백전을 겪은 강군이라고 하지만 녕왕 주권의 군세가 가장 강하다. 갑병 팔만과 전차 육천대에 원나라에서 투항해온 기병들로 이루어진 타안삼위는 불패의 군단이다.
녕왕 주권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주체는 몇몇 수하들만 데리고 녕왕부를 방문했다. 녕왕은 주체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며칠간 환대했다. 주체가 직접 녕왕부에 들어가서 주권을 안심시키는 사이 북평군의 일부는 분장하고 성안에 침입했고 일부는 밖에 매복을 했다.
거사일이 되자 선우검파와 그 수하들이 녕왕과 왕비 및 왕세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반란의 상황에서 장수는 왕의 목숨을 불구하고 반란진압을 할 수 있다. 대녕성의 수비총지휘인 주감은 수비군을 지휘하다 미리 포섭된 타안삼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초반에 열세에 처했던 연왕 주체가 녕왕의 수하들을 거둠으로 인해 전세를 역전시킬 발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원을 막아내던 최강의 두개 군단이 하나로 합쳐졌고 원나라 최강의 기병부대가 연왕의 손에 들어갔다. 공격적인 입장이던 주윤문이 방어적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선우검파는 본인의 의견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교주는 심계가 너무 깊어 그 속을 추측하고 대응하면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응책이다.
"수고가 많았구나. 너와 장우민의 노고는 내 잊지 않으마. 그리고 얼마뒤에 합동수련이 있을 예정이니 그전까지 푹 쉬어두거라."
교주는 매년마다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함께 수련을 한다. 그 기간은 해마다 다른데 기준을 추측하기 어렵다. 교주와 제자들만 자그마한 분지에서 무공수련을 하는데 먹을것을 직접 장만해야 하는점이 이들에게는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합동수련을 통보받자 강사성은 침울한 표정으로 변했다. 일년간 본인의 생각에도 무위가 크게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교주의 주관하에 진행하는 비무는 강사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초영란마저이길수 없고 화운에게도 미세한 차이로 밀리기 때문에 자괴감에 괴롭다. 천살의 무위를 눈으로 확인하였기에 올해도 자신이 꼴지일 가능성이 크다.
화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초영란과 며칠의 차이를 두고 교주의 제자가 되었다. 하지만 여자인 초영란도 화운은 이길수 없다. 무공의 상성상 강사성에게 우위를 점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라면 강사성을 죽일 자신이 없다. 강사성은 거북과 같아서 단단한 등껍질 안에 숨어버리면 화운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호기롭게 교주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화운을 힘들게 했다.
초영란은 합동수련에 별 생각이 없었다. 다섯번째 제자인데 강사성과 화운은 다 본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천살을 위로 놓아도 다섯번째 제자가 다섯번째로 무공이 강하니 적당한 것이다.
사진군은 고민이 많았다. 영약을 복용해 올해 소음공의 경지가 조금 높아졌다. 덕분에 작년처럼 망신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년이 걱정되었다. 정상적인 흐름이라면 본인이 교주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문득 새롭게 제자가 된 천살이 생각났다. 쓸만하면 끌어들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장우민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자신의 무위를 어디까지 보여야 할지 고민이다. 어차피 교주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우민이 속이고 싶은 것은 선우검파와 사진군이다. 이 둘이 자신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해야 변수가 될 수 있다. 교주가 되는건 불가능하지만 변수가 되어 다음대 교주의 옆에 설 수는 있다.
선우검파는 자신의 검을 천천히 닦았다. 남궁천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는 천살과의 대결이 기대가 되었다. 무공마다 상성이라는 것이 있어 간접비교가 크게 의미가 없지만 천살을 통해 남궁천의 무위와 대략이나마 비교해보고 싶었다.
- 작가의말
연왕 주체가 황제가 되는것이랑 그 뒤의 흐름을 실제 역사보다 조금 빠르게 가져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몇년이 흘렀다를 반복하기 싫어서 입니다. 혹시 역사 잘아시는 분이 계실까 노파심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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