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검법
연무장에는 송진으로 만든 횃불이 불타고 있다.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무당이 돈이 없어서 기름으로 만든 횃불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기름으로 만든 횃불이 다 떨어져서 급히 송진으로 만든 횃불로 불을 밝힌 것이다.
현허와 천살의 비무는 사흘째 밤에 접어들었다. 다행히 한시진정도면 날이 밝아오고 내일이 되면 기름으로 만든 횃불들이 새로 도착한다. 무당의 연무장이기에 횃불이 없어서 비무가 중단되면 천살이 무당의 패배라고 우길 수 있기에 제자들이 웃돈을 주고 횃불을 구하고 있다. 이들 정도의 고수라면 횃불이 없어도 비무에 지장이 없지만 어두울 때 천살이 암수라도 써서 이득을 볼까봐 횃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처음에 도검의 부딪힘이 전혀 없던 둘의 대결은 점점 부딪힘이 많아지다가 어느 순간 또 부딪힘이 사라졌다. 현허도법의 위력이 강해지고 응익검법의 안정성이 높아지며 둘의 검법과 도법이 비슷하게 닮아있을 때였다.
그러다 현허도법이 점점 흉험해지고 응익검법이 얌전해지면서 병장기의 부딪힘이 늘었다. 천살의 초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현허처럼 안정적으로 수비해내지 못하기에 부득이하게 도검의 부딪힘이 늘었다.
다음 응익검이 흉험해지고 현허도법이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게 도법과 검법은 서로를 닮아가다가 다시 반대로 닮아가면서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현허의 도에 진력이 실리기 시작하며 현허도법의 위력이 급증했고 천살의 응익검은 내공과 체력의 소모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공격 일변도(一邊倒)이던 현허도법과 응익검법에 수비초식이 생겼다. 천살이 남궁천에게서 훔쳐배운 진력을 현허가 훔쳐배워 현허도법의 위력이 강해졌고 응익검의 초식들도 현허가 훔쳐냈다. 천살 역시 현허도법의 안정적인 운용과 힘의 분배 등을 배우고 자신의 초식을 보완하거나 강화해 나갔다.
현허는 초식을 만들어내고 몇번 사용한 후 버리기를 반복하며 현허도법의 위력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들었다. 천살도 비무를 통해 배우는게 많고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지만 깨달음이나 경험 등이 부족해서 현허만큼 얻어가는게 많지 않았다. 천살의 응익검이 현허도법을 통해 완전해지고 이후 무한히 발전할 토대를 마련했다면 현허도법은 이번 비무를 통해 진정한 절세의 도법으로 완성되었다.
"소협객, 대단하오. 내가 열살만 젊었으면 계속할턴데 참으로 아쉽소. 내가 졌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정신적 고양감으로 현허는 세번째 밤이 되었는데도 쌩쌩해 보였다. 현허도법의 위력이 강해졌어도 천살을 이길 가망이 보이지 않고 자신도 더이상의 발전을 보이지 않자 현허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여기에서 비무를 더 진행해봤자 천살만 발전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당의 제자들은 아쉬움을 느꼈다. 거의 삼일간 진행된 비무를 눈 한번 깜짝할까 조심하며 지켜보았다. 확연한 깨달음을 얻은 자도 있었고 뭔가 얻었는데 확실히 인지하지 못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비무를 지켜본 모두가 뭔가를 얻어간 것은 분명하다.
"첫 비무는 명교 소교주 천살의 승리임을 선포하오. 천소교주는 이각의 휴식시간을 가지시오."
통순의 발표에 일부 무당제자들도 동요했다. 비록 마교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지만 한명의 무인으로 천살에게 감복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선악을 떠나 무인으로서는 존중하고 배우고 싶은 상대이다. 그런데 통순의 뜻은 이각만 쉬고 곧바로 비무를 속행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현허는 통순의 수작이 보기 싫기도 하고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수습하기 위해 비무장을 떠났다. 천살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하려는데 통순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천소교주께서 혹시 무당검법의 일절로 불리우는 장삼풍 조사의 양의검법을 견식해볼 생각이 있으시오?"
천살도 조용히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수습하려 하는데 와서 방해하는 통순이 곱지가 않았다. 상대가 장문인이라고 하지만 의자에 앉은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 이렇게 강력히 권하시니 저도 흥미가 돋는군요. 이각이 되면 불러주시지요."
말을 마친 천살은 눈을 감았다. 통순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비무에서 패한 현허를 원망하면서 통순은 장로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고 통순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으나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지 자리로 돌아가는 통순의 얼굴에는 얕은 미소가 어려있었다.
"이각이 되었습니다. 천소교주께서는 두번째 비무에 임하시지요."
통순이 아닌 젊은 무당제자가 천살을 깨웠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던 천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천살을 바라보던 무당제자는 두눈에 번뜩이는 정광을 마주하고 흠칫 놀라버렸다. 황급히 시선을 피해버린 무당제자는 자존심이 상해 빨개진 얼굴로 한켠에 비켜섰다.
비무상대를 확인한 천살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백발이 성성한 무당의 장로로 보이는 두 도사가 똑같이 쌍수검을 하고 천살을 마주했다. 통순이 아까 양의검법을 말할 때 내공을 실었기에 무당의 제자들은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우리 쌍둥이는 원정(元正)과 원반(元反)이라 하오. 양의검법을 상대해보겠다 해서 염치 불구하고 둘이서 나왔소."
이 둘은 정확히 말하면 무당파가 아닌 삼풍파(三豊派)의 제자이다. 송자돌림은 무당의 제자이고 장삼풍을 조사로 모시는 다른 문파의 제자들은 원자돌림이다. 장삼풍 아래로 현자돌림, 원자돌림, 통자돌림인데 무당파만 원자돌림 대신 송자돌림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장삼풍이 무당에 왔을 때 이미 송운자라는 첫 제자가 있었기에 그 배분만 따로 한 것이다. 무당의 현자돌림은 완전히 우연의 일치다.
양의(兩議)는 양어(兩魚)라고도 한다. 태극이 양의가 되고 양의가 사상이 되며 사상이 팔괘가 된다. 다시 팔괘가 사상이 되고 사상이 양의가 되며 양의가 태극이 되고 태극이 무극이 된다. 태극은 태일(太一) 혹은 태초(太初)라고도 부르며 도가에서는 세상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양의는 음양을 칭한다고 한다. 양의가 천지를 뜻한다는 자들도 있고 남녀를 뜻한다는 자들도 있다. 양의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지만 양의음양설이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무공에서의 양의는 양이 움직임이면 음은 정지된 상태를 뜻하고 양이 공격이면 음은 수비를 뜻한다.
천살을 상대하는 원정과 원반은 각자 좌수와 우수로 양의검법을 펼치면서 또 한명이 양 한명이 음을 맡고 있었다. 둘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양의가 사상으로 화하기도 한다.
사상은 태양, 소양, 태음, 소음으로 나뉜다. 무공에서는 음, 양, 강, 유로 나뉘고 연단하는 자들은 금, 수, 화, 목으로 보며 풍수지리사들은 동서남북, 혹은 현무, 주작, 청룡, 백호로 여긴다. 둘의 공격에는 음양이 포함되어 있고 강유가 동시에 깃들어 있다. 가끔 상대하기 힘든 초식을 사용할 때에는 팔괘도 보였다.
두명이 펼치는 양의검법은 말이 양의검법이지 팔괘도 있고 사상도 있고 양의도 있었다. 만약 둘이서 각자 태극을 이루고 그 두 태극이 무극을 이루면 천하에 막아낼 자가 없을 것이라고 장삼풍이 장담한 적이 있다. 하지만 원정과 원반은 둘다 아직 양의검법으로 태극을 이루지 못했다.
천살은 차라리 강한 힘으로 공격해 오는 무공이 상대하기 나았다. 기억력이 좋아 둘의 투로를 암기하면서 분석하려 했지만 양의와 사상 그리고 팔괘의 원리를 자세히 모르기에 분석이 불가능했다. 좌수와 우수가 서로 다른 초식을 사용하기에 잔뜩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두 사람이 네개의 검에 강과 유를 제멋대로 섞으니 대처하기 힘들었다.
원정의 좌수검이 강으로 공격하고 우수검이 유로 천살의 공격을 방어했다. 원반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좌수검은 양으로 대놓고 공격하고 우수검은 음으로 암습을 시도했다. 좌수가 음이고 우수가 양인데 반대로 사용했기에 팔괘의 원리가 적용되어 천살을 어지럽게 했다.
무공검법의 오운밀포가 상대의 눈을 흐린 후 반응하기 힘든 공격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둘이서 네개의 검으로 허와 실, 강과 유, 정과 반을 혼합하니 둘이 아니라 넷, 여덟, 열여섯을 동시에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의 검으로 해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천살을 기만하고 공격을 적중시켰다.
하지만 천살을 상대하는 둘도 그닥 통쾌한 기분은 아니다. 천살의 몸에 닿은 검은 옷자락이나 찢는 정도이고 강한 반탄력에 천살의 피륙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검의 위력을 높이려고 억지로 힘을 실으면 지금 무공의 현묘함과 변화의 다양함으로 잡고 있는 우위가 사라져 버린다. 현허때는 감히 떠드는 자가 없었는데 같은 배분인 원자돌림들과 송자돌림들이 가끔 환호를 지를 때면 달려가 싸대기를 후리고 싶었다.
현허도법에서 안정과 완전함을 배운 응익검은 양의검법에서 균형을 배우고 있었다. 좌우의 균형, 공방의 균형, 초식의 균형, 힘의 균형 등을 응익검은 흡수해 나갔다. 현허도법을 상대하면서 응익검법의 틀을 짰다면 양의검법을 상대하면서 그 틀안에 각 요소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깨달아갔다.
천살의 옷이 점점 더 너덜해지지만 핏자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구경하던 무당제자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보통 명문대파의 제자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외공을 수련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공이 고강한 천살이 외공을 익혔고 그것도 극성으로 익혀 웬만한 도검으로는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원정과 원반은 현허처럼 패배를 인정하고 싶었다. 비록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상대에게 타격을 가할 방법이 없다. 양의검법 자체가 높은 경지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무학이지 위력이 강해 다툼에 적합한 무공이 아니다. 상생과 상극을 통해 생생불식(生生不息)의 초식으로 천살에게 숨쉴틈도 안주고 있지만 상대는 호신지기를 이룬 고수이다. 이대로 시간만 흐르다가 둘이 먼저 지칠 것이다.
'지더라도 체력과 내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 지자.'
둘은 서로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무당파 덕분에 아무 걱정도 안하고 무공수련에 힘쓸수 있기에 무당의 봉문을 원하지는 않는다. 현허사숙과 사흘 가까이 싸웠으니 자신들이 오래 버티기만 하면 다음부터는 지친 천살을 상대로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허와 상대할 때 천살은 사흘에 가까운 시간동안 검법의 변화를 여러번 이루었다.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면서 검법의 틀을 이루었다. 하지만 양의검법을 상대하면서 그저 검법의 균형, 각 초식사이의 균형 등 이런 부분에 대해 배웠기에 검법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경하는 자들은 전부 천살이 지쳤다고 판단했다.
네시진이 지나서 오후가 되자 원정과 원반이 먼저 지쳤다. 지친 몸으로 실수를 하여 꼴사납게 패배하기 전에 둘은 먼저 뒤로 물러서며 패배를 인정했다.
"두번째 비무, 명교 소교주 천살의 판정승임을 선포하오. 이각의 휴식을 취하시기 바라오."
두번 다 무당이 먼저 체력부족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통순은 판정승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서 천살을 깎아내리려 했다. 무당제자들의 마음속에 패배감이 깃들까 걱정된 것이다. 자신이 가장 먼저 패배감에 젖어있음을 통순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살은 의자에 편히 앉아서 잣을 넣고 푹 삶은 잣죽을 천천히 음미했다. 통순은 싫은 걸음을 억지로 떼어 천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천소교주께서는 무당의 칠성진을 견식해볼 생각이 없으시오?"
- 작가의말
제 글은 다른 글들과 차별화를 원합니다. 왜 항상 주인공만 기연을 얻고 주인공만 깨달음을 얻습니까.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한번만 출연하는 현허따위도 기연을 얻게 만들었습니다. 혹시 예전에 비슷하게 주인공의 상대가 기연을 얻는 소설이 있었다면 그저 우연일 뿐 오마주나 표절은 아님을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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